
21세기의 특징은 문예부흥 기간에 형성 된 자유주의의 영향과, 후기현대주의의 삶의 질서 및 전통가치의 무시가 혼합되어 있다는 것이며, 학문분야에서는 그러한 혼돈속에서 다양한 이론이나 논리들이 줄을 잇고 있는 상황에 있다. 죽은 마르크스주의(Marxism)의 망령이 되살아나 활개짓을 하는가 하면, 또한 신학에서는 이미 사장된 진화론이 유신진화라는 가면을 쓰고 살아나 성경의 창조교리에 뿌리를 둔 정통신학의 창조론에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은 정통신학을 하는 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이 이러한 반 성경적 논리를 퇴치해야 하는 결단의 기로에 서 있다.
유신진화론이 무엇인지, 무엇 때문에 이단적 요소가 다분한 논리를 줄기차게 주장하는지 우선 그 실체를 알아보자. 첫째, 유신진화론이란 신의 존재를 믿는 유신론과 찰스 다윈이 주장한 진화론을 합친, 저들의 말대로 하나의 진화된 진화론적 이론이다. 즉, 진화론에 신학을 갖다 붙여 만든 논리가 유신진화론인 것이다. 내용은 모든 생물은 진화의 과정을 거쳐 나타나게 되었으며, 그 현상은 아직도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창조론은 하나님이 모든 자연만물을 그의 위대하신 능력과 인간을 향한 사랑으로 창조하셨다 하는데, 유신진화론을 주장하는 어떤 이는 하나님의 창조성을 부인하여 생물들과 인간마저도 자연 발생적으로 나타나게 되었고, 지금도 그렇게 자연 만물이 진화해 간다는 주장을 한다. 존재론적 입장에서 말한다면, 모든 것이 우연적, 또는 우연성에 바탕을 둔 생물들이고 그런 인간들이라 하는 것이다.
둘째, 유신진화론 주장자들은 신학의 계시보다 과학의 이성을 인간과 자연 우주만물을 이해하는 도구로 쓴다. 이들은 나아가 하나님의 역사운행의 계시성을 부정한다. 신학을 과학적 이성에 근거하여 이해해야지 신앙차원에서 하나님이나 인간, 자연만물을 이해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유신진화론자들은 “성경을 과학책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말, 그리고 신앙을 앞세워 진화론을 부정하는 것”은 학문연구의 자유성을 부정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과학으로 성경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과학으로 신학을 증명하려 하며, 과학으로 신을 이해 하려한다. 이러한 주장은 명백히 하나님이 인간과 자연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신다는 성경의 창조론을 부정하는 것이다.
사실, 과학이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이성적 판별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다. 과학으로 이해 못하면 계시로서 믿음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유신진화론자들은 과학이나 이성의 역할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여 과학으로서만 신을 이해하려는 짧은 토막지식에 의지하는 잘못을 하고 있다. 주객전도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신학자가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셋째, 유신진화론자들은 창세기 1-11장의 내용들, 즉, 아담 창조, 노아홍수, 바벨탑사건 들은 일종의 신화로서 인간이 지어낸 이야기라 말한다. 이런 내용들은 저들이 말하는 것으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들”로서 이성과 과학이 발달하지 못한 시대 사람들이 꾸며 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말하고 있다. 고대 근동의 신화처럼 인간이 만들어 내고, 거기에 신적 신비성을 가미하여 믿게 만든 것으로 주장한다. 그렇게 하여 그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기록된 경전이라는 사실을 부정한다. 성경의 창조론과 하나님의 계시적 은총을 부정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특히 인간구원을 위한 십자가 대속의 은혜마저 부인하게 되는 큰 잘못을 범하는 것이 된다.
넷째,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를 비관적 결과물로 본다. 하나님이 창조하시면서 “보시기에 좋았다” 말씀하신 것을 믿지 않는다. 선, 즉 창조의 의미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세계는 탄생과 죽음을 겪어야 하는 유한의 세계요, 그러한 유한성을 겪는 인간들은 미래적 희망에 대한 상실감을 느끼며 산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죽음은 자연성적 필연으로 봄으로, 죽음은 죄의 결과라는 성경적 가르침 또한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의 죽음은 단순히 자연이 소멸되어 가는 것과 같은 죽음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견해는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우주론적 사랑이라고 하는 성경적 지론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주장이다. 그렇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그야말로 헛된 것이 되고 만다. 진화는 역사가운데서 계속되어 가므로 미래 세계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하는 것으로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Second Coming) 같은 교리를 믿지 않는다. 그렇게 성경적 창조와 성경이 제시하는 미래적 희망에 대해 비관적(Pessimistic) 자세를 취한다.
지금까지 몇몇 유신진화론의 허구를 살펴보았다. 신학은 하나님의 계시나 섭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간을 하나님의 구원의 영역에 두기 위한 것을 말하는 것인데, 이러한 중심 내용을 지지하는 성경의 내용들을 과학으로 판단, 즉 이해할 수 없거나, 증명 할 수 없는 것, 경험 할 수 없다 하여 불트만(Rudolf Bultmann)처럼 비신화화로 치부하여 그 본질 내용을 저하시키고 있다.
여기서 생각해 볼일이 있다. 만약, 창조가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의 근원이 된다는 그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무엇하러 목사가 되고 신학자가 되었단 말인가 하는 것이다. 또한, 성경적 정신이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목회자 양성소 복음주의 신학대학에서 대학이념과 배치되는 유신진화론을 가르치려면 그 학교를 떠나 자신의 학문적 양심을 말하는 것이 타당, 또는 당당한 것이 된다. 예수의 정신을 연구하고 적용하는 것이 신학이고 교육임을 생각하면 그런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은 더욱 명확해 진다. 이단사설성 주장을 하려면 신학자나 목사 타이틀을 반납하고 나서 일반 철학자나, 인류학자, 또는 생물학자 신분으로 주장을 해야 당당한 것이 되고, 자기주장에 신뢰를 얻을 수 있게 된다. 신학자나 신학교 교수로서 창조론을 건학이념 중의 하나로 세운 신학대학교에서 유신진화론을 가르치는 것은, 또한 더불어 이를 지지하는 목사들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배신자들이다.모순과 불신을 파는 것으로 관심받아 자아도취적 만족을 누려보려는 행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필자는 오랫동안 성경의 창조론을 옹호하고, 변호, 변증하는 글을 계속 써 왔다. 그러한 신학적 신념에 불굴의 의지를 담고 있는 것은 창조론에 대한 믿음이 굳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며, 그런 신앙적 신념이 나의 삶의 자세와 일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유신진화론자들을 포함하여 이단 사설을 말하는 자들, 또는 이를 지지하는 소위 아는 체 하는 목사들은 DNA가 그렇게 되어 있어 어떤 논리적 사변으로 설득할 수 없다. 사탄의 논리에 세뇌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해결책은 하나밖에 없다.
“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태복음 18:15~17)
예수님이 주신 해결책이 아닐지, 오호라 통재라 주님 이를 어찌 하오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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