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 데데르트 이사
카라 데데르트 이사. ©Christian Post

미국 크리스천포스트는 카라 데데르트의 기고글인 ‘절망을 극복하는 방법’(How can I deal with despair?)을 19일(현지시각) 게재했다.

 

카라 데데르트는 미시간주 그랜드래피즈에 있는 코너스톤 트러스트의 보조금 입학 담당 이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Think Twice:Everyday Life with Gospel Perspective에 매주 기고글을 게재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에서 (열왕기상 19:1–10), 욥이 자신의 탄생을 후회하며 (욥기 3장), 바울이 너무 큰 환난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고백할 때 (고린도후서 1:8), 살아 있는 소망으로 거듭난 신자들도 고통 가운데 갇힌 듯한 절망을 경험할 수 있다.

시편 기자는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라고 부르짖었다 (시편 42:7). 욥은 “내 영이 상하였으며, 나의 날이 다하였고 무덤이 나를 기다리는구나”라고 탄식했다 (욥기 17:1). 이 말들은 단지 시적인 표현이 아니라, 인간의 감내 능력을 넘어서는 고통의 실상을 반영한다.

절망은 우리가 흔히 예상하는 사람들만 찾아오지 않는다. 우울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 불만 많은 사람들, 혹은 신앙이 약한 사람들만이 아니다. 찰스 스펄전, 마틴 로이드 존스, 존 번연과 같은 신앙의 거장들도 깊은 고통과 고뇌의 시기를 경험했다. 절망은 기질이나 영적 성숙도를 가리지 않는다.

절망에 빠진 사람은 한 가지를 원한다: 바로 그 절망에서 벗어나는 것. 절망의 본질은 해결책도, 출구도 없이 무의미와 패배의 환상 속에 갇히게 만드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깊은 수렁에 빠져서, 발을 디딜 곳도 없고 깊은 물에 빠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 (시편 69:2).

격랑 속에서 허우적대는 것처럼, 구조의 손길이 닿기 직전의 거리에서 우리는 물에 빠져 죽어가는 기분이 들 수 있다.

그것이 느리게 스며들든, 순식간에 닥쳐오든, 절망은 신자의 희망의 현실을 왜곡하고 몸과 마음, 영혼의 감당 능력을 줄인다. 그러므로 회복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약함을 의지하며 “작은” 순종과 인내, 희망의 걸음을 통해 절망의 흐름을 끊고 다시 인식과 능력을 회복하는 데서 시작된다.

되풀이되는 생각을 끊어내기

번연의 <천로역정>에서, 크리스천이 절망 거인의 성에 갇혀 있을 때, 그 어둠은 환상이 아니었다. 숨이 막힐 듯한 현실이었다. 우리 역시 매우 어두운 현실 속에 있을 수 있지만, 절망은 그 현실을 끝없이 되풀이하며 그리스도 안의 소망을 가려버린다. 크리스천이 구출된 것은 상황이 끝나서가 아니라, 그가 주머니에 있던 ‘약속의 열쇠’를 기억해 사용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생각을 반복적으로 방해하고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버림받았다고 느낄 때,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음을 기억하라. 하나님의 손이 닿지 않을 만큼 깊은 곳에 있다고 느낄 때, 그분이 스올까지 내려가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신음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몸을 돌보기

엘리야가 지쳐 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음식과 휴식, 그리고 자신의 임재를 주셨다. 우리는 유한한 존재로 창조되었기에, 소진될 때는 회복이 필요하다. 겸손은 매일 운동하고, 충분한 수면을 취하고, 몸을 잘 먹이고, 햇빛을 쬐며, 의학적 치료를 받고, 책임을 밀어붙이기보다 휴식을 취하는 데서 드러난다. 신체적 필요를 돌보는 것이 사소하거나 헛된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공급을 신뢰하는 강력한 순종의 행위다.

밖을 향해 시선을 돌리기

생존 본능처럼 절망은 고통받는 자의 모든 것을 집어삼켜 자기중심적 고립으로 내몬다. 왜곡된 자기반추의 강력한 힘은, 다른 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관심을 주고받음으로써 줄어든다. 누군가를 통해 사랑을 받는 것뿐 아니라, 대화를 통해 관심을 주고, 기도하고, 격려의 메모를 보내며, 그들에게 집중함으로써 다른 이들을 섬기는 작은 행위들이 자기중심에서 벗어나는 강력한 수단이 된다. 이것은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시선을 회복시키는 자유로운 방식이다.

일상의 구조에 기대기

절망이 우리를 삶의 본질적인 부분으로까지 벗겨낼 때, 그 본질적인 것들을 ‘구원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자. 매일의 루틴, 아무리 작더라도, 질서를 가져다준다. 아침에 일어나기, 빨래하기, 잔디 깎기 같은 단순한 일들이 정상성과 목적의 생명줄이 된다. 아무리 기계적으로 느껴지더라도, ‘다음 할 일’을 하는 것은 곧 희망의 행동이다. “작은 일에 충성함” (누가복음 16:10)은 우리의 감당 능력을 다시 세우고 의미와 목적을 확인시켜 주며, 평범한 것을 구원의 도구로 바꿔준다.

피조 세계의 위로

공포가 커질수록, 하나님의 위엄과 주권 속에서 우리의 ‘작음’을 기억하는 것이 위로가 된다. 하나님은 온 피조물을 붙드실 뿐 아니라 우리도 붙드신다. 욥의 절망은 하나님께서 별자리부터 바다의 문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붙드시며 자신의 성품과 주권을 드러내신 것을 보고 예배로 바뀌었다. 자연 속을 걷고, 별 아래 누워 있고, 꽃을 심고, 동물을 돌보는 것 등 — 피조 세계의 아름다움은 우리를 위로하고 관점을 새롭게 하며, 하나님께서 자연을 통해 우리에게 사역하심을 느끼게 한다.

인내하며 견디기

어둠이 계속되고 즉각적인 회복이 없을 때에도, 고난에서 소망으로 가는 여정에는 반드시 인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이것은 곧 시간과 신뢰를 필요로 한다. 긴장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지만, 약함과 필요는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의존하는 법을 배우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우리는 그분의 승리와 부활의 권능에만 참여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빌립보서 3:10). 믿음의 흔들리는 걸음이라도 계속 걸어가길 바란다. 바로 그것이 이 시기에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맡기신 선한 일이다.

그림자를 두려워하지 말라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질 수는 있지만,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털끝만큼도 흔들리지 않게 하실” 은혜의 하나님께서 (베드로전서 5:10), 당신을 부르셨다. 그림자는 깊어질 수는 있지만, 결코 어둠의 권세에서 구원받아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자들을 삼킬 수는 없다 (골로새서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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