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운 선교 과제를 제시한 에큐메니칼 신학은 화해와 일치를 중요한 과제로 삼고 출발하였다. 즉 ‘에큐메니칼’ 이란 말의 어원인 ‘오이쿠메네’ 라는 말이 본래 oikeo (오이케오: 살다, 거주하다) 혹은 oikos (오이코스: 집) 등의 뜻을 지닌 말인데, 현대적 의미로 교회 간의 관계와 일치, 기독교 일치 등을 의미한다. 즉 에큐메니칼 신학의 모토 자체가 전 세계를 하나의 집으로 보고 그 가운데 사는 우리 모두를 한 식구로 보면서, 선교를 할 때도 각개전투하지 말고 힘을 합해서 하며, 한 가족의 구성원인 세계를 잘 섬기자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모토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에큐메니칼 신학의 주된 관심이 화해와 일치에 주어지는 것은 자연스런 귀결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전통적인 신학에서도 화해와 일치가 무시된 것은 아니었다. “....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 17: 11)라는 말씀을 따라 교회가 하나 되는 일이 중요한 일이라는 것에 대하여는 이의가 있을 수 없었다. 물론 현실은 그 말씀처럼 잘 이루어지지 않았던 면이 있었지만, 어찌되었든 전통적인 선교 역시 화해와 일치를 중시하였다.
그렇다면 에큐메니칼 신학의 화해와 일치에 대한 관심이 전통적인 신학의 그것과 어떤 차이를 지니는가? 전통적인 신학은 화해와 일치가 중요하지만 그것은 기독교 내에서 적용되는 것이지, 그것이 타종교나 기타 다른 피조물들에게까지 확대되지는 않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에큐메니칼의 경우는 화해와 일치의 범주가 기독교 내에서의 화해와 일치 뿐 아니라 타종교 그리고 온 우주 만물과의 화해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세계 교회 협의회는 종교의 문제가 인류의 화해와 일치에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음을 보면서 종교간의 화합을 위한 종교 간의 대화에 깊은 관심을 갖는다. 예를 들어 호주 캔베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날 세계의 많은 곳에서 종교가 분열의 힘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종교언어와 상징들이 갈등을 부채질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무지와 관용치 않음이 화해를 어렵게 만든다. 우리는 타종교인들과 존중심과 이해로서 함께 살아가기를 추구하며, 이 목적을 위해서는 상호 신뢰 및 ‘대화의 문화’ 구축이 필요하다. 이러한 일은 우리가 타종교인들과 대화하고, 특별히 정의 및 평화증진에 공동행동을 취함으로써 지역적 차원에서 시작된다.
타종교와의 공존 및 화해 모색에 더하여 에큐메니칼 신학의 관심은 온 세계 만물과의 화해까지 관심 영역을 넓히는데, 이것은 주로 JPIC 즉 ‘정의’(Justice), ‘평화’(Peace), 그리고 ‘창조질서보존’(Integrity of Creation) 으로 나타난다. 이 세 가지가 잘 이루어질 때 만물이 화합과 일치를 이루게 되며 이러한 결과로 우주만물의 생명이 풍성하게 되어지는 것이다. 결국 에큐메니칼 신학이 추구하는 화해와 일치는 생명을 살리고 이 땅 위에 샬롬을 구현하는 사역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화해와 일치가 에큐메니칼 선교의 주된 과제로 인식되면서 성령 또한 이 사역을 이루어가는 분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끝)
※ 좀 더 자세한 내용과 각주 등은 아래의 책에 나와 있다.
안승오 교수(영남신대)
성결대학교를 졸업하고 장로회신학대학원(M.Div)에서 수학한 후, 미국 풀러신학대학원에서 선교학으로 신학석사(Th.M) 학위와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다. 총회 파송으로 필리핀에서 선교 사역을 했으며, 풀러신학대학원 객원교수, Journal of Asian Mission 편집위원, 한국로잔 연구교수회장, 영남신학대학교 대학원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는 『선교와 신학』 및 『복음과 선교』 편집위원, 지구촌선교연구원 원장, 영남신학대학교 선교신학 교수 등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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