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우 목사
이희우 목사

온 대지가 다 꽃으로 활짝 웃는 5월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금년 봄은 울상이다. 힘들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다. 상처투성이가 되고 있는 사회, 교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특별히 정호승 시인의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는 시를 읽으며 위로를 받는 사람들이 많다.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너와 함께 걸었던 들길을 걸으면/ 들길에 앉아 저녁놀을 바라보면/ 상처받은 풀잎들이 손을 흔든다/ 상처 많은 꽃잎들이 가장 향기롭다.” 풀잎뿐만 아니라 아름답게 보이는 꽃송이에도 상처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생명 있는 것들은 다 아픔이 있지만 상처가 풀을 더 강하게 만들고 상흔이 꽃을 더 향기롭게 한다고 했다.

룻기에 등장하는 한 가정의 모습은 ‘상처받은 가정’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슬픔이 너무 크다. 너무 울어 눈물마저 말라버린 상황, 성경은 ‘흉년’이라는 한 단어로 당시 시대 상황과 가정 상황을 표현했다(룻1:1). 땅만 흉년이 아니라 인생 흉년이다. 그런데 룻기를 읽어보면 흉년 중에 임한 은혜가 눈부시다. 그래서 습관적으로 5월이 되면 룻기를 읽는다. 한 가족이 누렸던 그 가슴 벅찬 은혜가 가정사로 바쁜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기도하는 심정으로.

유대인들은 룻기를 아가서, 전도서, 예레미야애가, 에스더서와 함께 다섯 메길로트(Five Megillot), 다섯 개의 ‘두루마리 성경’이라 부른다. 그리고 주로 이스라엘의 절기인 오순절(Pentecost), 맥추절(the Feast of Harvest)이 되면 이 다섯 메길로트를 읽는다. 수많은 단편소설이나 문학작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는 룻기, 마치 기승전결이 함축적으로 잘 나타나는 위대한 단편소설 같다고 할까? 물론 단편소설이 아니다. 역사를 기초로 한 역사서, 실화를 다룬 성문서로 봐야 한다. 가공의 인물이 등장하는 허구적 사실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한데 먼저 생각할 것은 그 땅에 흉년이 들었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흉년, 룻기를 읽으며 주로 언제 흉년을 당하는지, 그리고 흉년이 들 때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생각하면 좋겠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

룻기는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라는 말로 시작된다. 사사 시대 말쯤에 있었던 일로 여겨지기에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사사기 17장에서 21장까지를 읽는다. BC 12C 후반의 기드온 사사시대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때는 미디안 족속의 침입으로 기근이 매우 심하던 때였다.

그 배경을 보면 사사기 17장에 아들 미가가 어머니의 은을 훔쳤는데 그 사실을 모르고 훔친 자를 저주하던 어머니가 아들 미가가 범인인 것을 알고는 축복하는 모습으로 태도를 바꾸는 이야기가 나온다(삿17:2). 그리고 이어서 저주를 풀기 위해 신상을 만들고 은을 여호와 하나님께 드린다(삿17:3). 나와 내 가족은 축복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나 다급하면 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어떤 방법이든 다 동원하려는 자세를 취한다. 이해는 되지만 이때 신상을 만들고 신앙적 용어를 사용하며 제사장까지 돈 주고 세우는 미신적 자세를 취한 것은 문제가 있었다. 유치하다고 할까? 미신적이고 저차원적이며 기복적 신앙양태였다.

그런데 만일 내가 그런 상황에 처하면 어떻게 대처했을까? 과연 신앙인답게 오직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비전, 하나님의 위엄, 그런 스탠스를 취할 수 있었을까? 아니면 나의 한계 속에서, 나에게 갇혀서, 나의 제약을 받으며, 나의 축복과 나의 영광, 내가 구축한 세계를 전전긍긍하지는 않을까? 신앙 용어를 사용하며 신앙적 스탠스도 취하지만 어쩌면 속 빈 위장된 삶, 회칠한 무덤 같은 상태로 지내지는 않을까?

여기서 꼭 생각해야 할 신앙 핵심이 있다. 그건 ‘하나님의 영광인가? 아니면 나의 축복인가?’라는 것이다. 축복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축복보다 하나님의 영광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당시 시대에 대한 평가를 성경은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17:6). 이게 당시 신앙에 대한 결론이고, 성경 기자의 평가라면 그들의 신앙은 철저히 자기를 위한 신앙 태도였다는 것이다.

이어서 사사기 18장은 그때 단 지파는 땅이 없었다는 말로 시작된다. 12지파 중 므낫세 반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 베냐민 사이의 해안 평야를 분배받았지만 블레셋과 아모리인들의 압력으로 해안평지에서 동쪽 산지로 쫓겨난 단 지파는 땅 때문에 한이 맺혀 있었다. 그래서 문제 해결을 위해 정탐꾼들을 보내 살펴보는데 미가 집에 한 가정의 제사장이 있음을 보고 “우리도 제사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정예군대 600명을 파견한다. 칼, 창, 활, 물맷돌로 완전무장한 병사들이 미가의 집을 에워쌌다. 성경은 다섯 명이 미가 집 신상을 탈취하고, 제사장에게 한 가정이 아닌 한 지파의 제사장이 되라고 협상한 것처럼 다뤘다. ‘신상을 탈취하고’, 기가 막히는 일이 벌어진 것, 우상숭배를 도입했다는 뜻이다.

더 기가 막히는 건 제사장의 반응이다. “그 제사장이 마음에 기뻐하여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우상을 받아 가지고 그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니라”(삿18:20). 성공을 추구하는 제사장의 추한 모습이다. 세속적이고, 그저 부패한 본성을 드러낸 꼴, 제사장의 배신이다. 그에게서 사명감도 신앙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돈과 명예만 추구한 사람처럼 거리낌 없이 따라나선다. 마치 성공이 선이라는 생각이었던 같다.

그리고 사사기 19장부터 21장에 나오는 레위인은 하나님께 속한 구분된 지파였다. 그런데 그의 삶이 너무 엽기적이다. 19장 25절에 보면 도덕적으로 타락했고, 29절을 보면 너무 잔인하다. 극악무도한 시체 유기 사건이 펼쳐진다. 열두 덩이로 시체를 조각을 내고, 그 조각을 보고 극도의 복수심을 갖게 하는, 전율할 만한 토막살인 사건이 벌어진 것, 요즘 용어로 표현하면 윤간 치사에 속한다. 너무 끔찍한 토막 살인 사건이 펼쳐진 것이다. 급기야 20장에 보면 시체를 본 11지파가 이스라엘 총회로 모인다. 그리고 기가 막히는 결의를 한다(삿20:10). 첩을 죽인 베냐민 지파의 기브온 사람들을 몰살시키겠다는 결의, 정당할까? 먼저 제사장의 죄부터 물었어야 하지 않나? 그런데 이런 절차가 없다. 묻지 않았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제사장에게 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직무 유기한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사람을 죽여 토막을 냈다.

너무 끔찍한 짓을 한 것인데 우리 사회는 어떤가? 정치 지도자들 중에 죄지은 사람들이 너무 많고, 자숙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큰소리치지 않나? 자신 죄는 인정하지 않고 남의 꼬투리 잡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이게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이 기가 막히다.

결국 감정의 흥분이 가져온 결과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었다. 한 사람의 잘못이 한 지파의 멸절로 이어질 수도 있는 전쟁을 초래한 것이다. 그들의 서원이다. “① 멸절시킬 때까지 장막에 들어가지 않겠다 ② 총회 불참자는 죽이겠다 ③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주지 않겠다.” 아예 씨를 말리겠다는 것, 그들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결의를 했다.

이런 것이 사사시대의 모습이다. 냉담과 우상숭배와 부도덕과 무질서의 시대, 정말 혼란스럽던 시대였다. 오늘날 우리 얘기 같아서 씁쓸한데 룻기는 시대적 배경이 같은 사사시대였지만 사사기와 내용이 너무도 대조적이다. 놀랍다. 사사기를 읽을 때는 온통 천지가 죄악으로 뒤덮인 것 같은데 룻기는 어두운 시대적 배경과 달리 내용이 너무 맑고 깨끗하고 경건하다. 룻기를 읽으며 가정마다 어두움을 물리칠 밝은 빛이 비치기를 기도한다.

모압으로 이주하다

성경 66권 중 여성 이름을 딴 제목의 성경은 딱 두 권이다. 에스더서와 룻기, 더욱이 룻은 이방 여인이다. 그런데 룻기는 내용을 보면 주인공이 룻인지 나오미인지 헷갈린다. 오히려 나오미의 대사가 더 많고, 나오미가 더 주도적이기 때문이다. 스토리가 그렇다. 두 여성이 하나가 되어 불행을 극복해내는데 매사의 주도권은 나오미에게 있었다. 그런데도 제목은 룻기, 그 이유는 성경이 다윗으로 이어지는 구원사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인 것 같다.

스토리의 시작은 흉년이 들었다는 것, 요즘은 흉년 들면 나라가 책임지라고 난리인데 왕이 없었기 때문일까? 약속의 땅에 흉년이 들자 한 가정이 각자도생의 자세로 이민을 갔다. 살길 찾아간 것이기는 하지만 모압으로 갔다는 것에 문제가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이 거주하던 베들레헴이 ‘떡집’이라는 뜻, 아이러니하게 그 떡집 베들레헴이 먹을 떡이 없는 기근의 도시가 되어 떠나간 것이다. 만일 성경이 말하는 ‘약속의 땅’을 끝까지 지켰다면 어땠을까? 그냥 있었다면 굶어 죽었을까? 룻기를 보면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베들레헴 사람들이 굶어죽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풍족함을 누렸기 때문이다.

떠난 것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선택지가 하필이면 모압이었다는 것이다. 뜻밖이다. 성경을 읽어보면 룻기서에서 모압이 아주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성경은 룻이 모압 여인이란 점을 명확히 했다. 짧은 책에서 모압이라는 단어가 무려 14번이나 나온다. 이스라엘과 사이가 좋지 못했던 모압,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두 딸에게서 기원한 족속이다. 암몬과 모압이 그때 기원한 족속인데 출애굽 당시 모압은 술사 발람을 불러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다. 우상 숭배와 성적 타락으로 이스라엘을 망하게 할 뻔했던 것이다. 그래서 주신 말씀이다.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신23:3).

이스라엘은 왕국 내내 모압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나중에 포로기 이후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과 모압 간의 통혼이 문제가 되었다. 그때 개혁을 주도한 느헤미야가 했던 말이다. “그 날 모세의 책을 낭독하여 백성에게 들렸는데 그 책에 기록하기를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느13:1). 이방인과 결혼한 자들을 강제 이혼시키고 쫓아내는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나오미의 가정은 모압에 대한 개념이 없었을까? 여하튼 그들은 모압으로의 이민을 결정했고, 그곳에서 모압 여성 둘을 며느리로 얻기까지 했다. 물론 의도적 도발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이민지로 물색하다가 모압 땅이 가장 적당하다고 판단됐던 것 같다. 그리고 거기서 살다보니 사람들도 괜찮은 것 같고, 눈에 드는 모압 여성들이 있어서 며느리로 삼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것,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것은 큰 후회를 낳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들이 무의식중에 이스라엘과 모압의 경계를 허물고 있고, 차별과 배타와 편견을 깨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방인에 대한 편견을 깨야 하는 것은 무조건 맞다. 하지만 그곳도 사람 사는 곳이고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무리한 주장이다. 보편적 은혜를 말하는 건 이해하지만 성경은 “그곳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고 한 적은 없다.

오히려 나오미는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룻1:13)라고 했고,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라”(룻1:20) 그리고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라”(룻1:21)라고 했다. 그리고 21절 앞부분에서는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라고 했다. 묻는다. 이것도 다 은혜인가? 우기면 안 된다.

은혜는 베들레헴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누렸다. 사랑도 좋고 공동의 연대 의식도 좋지만 싸구려 은혜는 곤란하다. 은혜 남발도 안 된다. 우리가 좋다며 의기투합해 이런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자고 하면 은혜인가? 아니다. 나중에 결과적으로 룻이 큰 은혜를 입기는 하지만 결과만 좋으면 과정은 어떠하든 상관없는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된다. 지금은 달라졌지만 그 당시에는 모압으로 이주한 것도, 이방 여인과 결혼한 것도 해서는 안 될 일, 잘못된 처신이었다. 아니 더 큰 인생 흉년을 초래했던 것을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죽음이었다

주인공보다 비중이 더 큰 나오미의 남편 이름은 엘리멜렉이었다. 나오미는 ‘희락’ ‘기쁨’이란 뜻이고, 엘리멜렉은 ‘나의 하나님이 왕’이시라는 뜻, 신앙적인 이름이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엘리멜렉의 이름 뜻이 룻기의 주제라는 것이다. 사사시대, 인간 왕이 없지만 하나님을 왕으로 삼으면 희망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런데 성경은 그 엘리멜렉이 이주한 지 얼마쯤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일찍 죽었다고 한다. 또 더 충격적인 것은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두 아들도 모압 여인과 결혼하고 곧 둘 다 죽었다는 것이다. 말론과 기룐, 말론은 ‘질병’이라는 뜻이고, 기룐은 ‘허약함, 폐병’이라는 뜻인데 두 아들이 다 젊은 나이에 불행하게 죽었다. 대충 모압에 거주한 지 10년쯤 된 것 같다. 성경은 자식 하나 없이 두 아들이 다 죽었다고 한다.

나오미의 인생이 완전 나락으로 떨어졌다.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고, 손주도 없고, 곁에는 이방 여인 둘밖에 없다. 나름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결과는 세 과부댁, 최악이다. 너무 끔찍하다. 모든 것을 다 잃었다. 오죽하면 베들레헴으로 돌아올 때 베들레헴 성읍 사람들이 긴가민가하며 “이게 정말 나오미인가?”라고 물을 때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 부르라”(룻1:20)라고 한다. 나오미는 ‘사랑스러운 자, 달콤함’이라는 뜻이고, 마라는 ‘괴로움, 쓰다’는 의미, ‘내 인생은 실패’라고 인생 흉년을 탄식한 것이다. 흉년 맞은 나오미, 나오미는 모압으로 가지 말았어야 했다. 결과적으로 볼 때 그 선택은 세상적으로 헤쳐나가겠다고 변칙을 쓴 것, 잔머리 굴린 것에 불과한 잘못된 선택이었다. 잊지 말라.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할 수 있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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