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을 생각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세상의 어떤 고난과 수치심, 부끄러움 가운데서도 위로받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상황을 이기며 희망 가운데 앞으로 나갈 수 있다. 예수님이 어떤 모욕을 받고 어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어떻게 죽으셨는지를 생각할 수 있다면 우리는 다 견딜 수 있다. 예수님이 계신데 세상에 위로받지 못할 고난이 어디 있겠으며 희망 없는 절망이 어디 있겠는가! 어디를 가고 싶은지, 어떤 길을 걸어가고 싶은지, 그것은 우리 각자의 꿈과 소원을 따라 결정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야 할 길은 주님이 가신 길 외에 다름 아니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예루살렘이든, 갈릴리이든, 그 광야이든 중요한 것은 내가 가고 싶은 그 길에 예수님이 계신가 하는 것이다. 사랑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말이나 행동, 겉모습만 보면 그들이 사랑을 안 받는 것 같고 또 못 받을 것 같지만 진실된 사랑은 그 사랑이 실천되는 그 순간 바로 느껴지기 시작하며, 그 영혼의 안식이 시작되고 거기서부터 교육과 변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을 하되 낙심하지 말하야 한다. 때가 되면 반드시 열매를 거둘 것이다. 사랑은 보이지 않는 변화의 시작이다.
김학모 – 금과 은 나 있어도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힉을 따라”(에베소서 1장 11절) 우리가 생명을 위해 하나님에게 두는 우리의 믿음은 두 지주 위에 세워져 있는데 하나는 구원에 도움이 되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공급할 수 있는 하나님의 충분성이며, 다른 하나는 공급할 수 있는 것을 공급하는 하나님의 유효성이다. 전자는 하나님의 본질과 인간의 생존에서 비롯한 것으로서 이 시점까지 설명한 것이고, 이제는 후자를 택하여 하나님의 행동 일반에 대해 서론의 형식으로 말한 다음 하나님의 내적 활동 또는 작정에 대해 말할 것이다. 사도가 에베소서 1장 11절에서 두 가지 모두에 대한 길을 보여줄 것이다. 본문을 보면 먼저 하나님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행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앱 1:23). 이런 이유로 모든 것, 곧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고 하며 예수는 아버지가 일하므로 자신도 일한다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만물의 제1 원인이어서 하나님 없이는 세상에서 어떤 작용도 있을 수 없으므로 이것보다 더 분명한 것도 없다.
페르투스 판 마스트리흐트 – 이론과 실천 신학 3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성을 이야기하면서 예수를 선지자, 천사 그리고 모세와 비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선지자보다 우월하고 천사보다 뛰어나며 모세와도 비교할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왜 예수를 굳이 이 세 가지와 비교했을까? 이것 말고도 비교할 것이 많지 않은가? 예수는 은보다 귀하고, 로마 황제보다 강하며, 헬라의 신들과도 비교할 수 없는 참 신이다. 그런데 왜 예수를 굳이 이 세 가지와 비교할까? 그것은 이 세 가지가 초대교회 유대 사회에 존재했던 ‘예수의 도전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는 당시 유대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대표적인 사상과 가치 그리고 문화였다. 우리는 이를 당대의 세계관이라 부를 수 있다. 세계관은 그 사회가 믿고 있는 ‘신념’이며, 추구하는 ‘가치’의 총체이고, 사람들의 ‘행동’을 이끌어내는 힘이다.
고성준 – 떠내려가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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