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astoral care 현장은 꼭 교회나 어떤 특정한 장소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그랬듯이 어느 곳에서나 Pastoral care가 이루어져야 한다. 부득이 교회에 못 나오는 분들이 간혹 있다. 그들에게는 찾아가서 얘기하고, 필요시는 기도, 예배가 바로 거기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 주님은 두 세 사람이 앉아서 당신의 이름으로 대화하는 그곳, 바로 거기에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는가? 즉 교회 안에서만 있어야 한다는 고정된 관념 때문에 수없이 많은 Pastoral care의 기회를 놓칠 수가 있다는 얘기다. 선교의 영역에 제한을 받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Pastoral care에서 보면 영적(spiritual)이라는 것이 꼭 종교인, 비종교인, 그런 측면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더 넓게 보아서(Entire Human Person) 인간의 모든 내면(feeling)을 영적인 것(spiritual dimension)으로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슬픔, 고독, 분노, 사랑, 즉 종교인이든 아니든지를 막론하고 얘기하는 것이다. 결국은 종교적인 주제로 대화가 진행되겠지만 그 과정은 이렇게 되어 간다는 말이다.
그런데 개인에 대한 이런 Pastoral care의 접근이 두 가지가 있는데, “Thinking Level”과 “Feeling Level”이다. 다시 말하면 Pastoral care는 머리와 머리의 대화가 아니라 가슴과 가슴의 상호작용이라 보는 것이다. Thinking Level은 “완전주의자”와 같은 경향이 있는데, 모든 사건을 먼저 머리로, 생각으로, 처리하려고 하는 경향이다. 그러기에 “맞다, 틀리다”식으로 모든 것을 생각해 버린다. 이것은 학교 선생식이 되고, “Teaching Ministry Style”이 되어 그것에 만족하게 되고, “나는 나, 너는 너”식으로 끝나 버리므로 어떤 행동으로까지 연결되지 못한다. 머리에서 맴돌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안개처럼 사라져 버린다.
얼마나 많은 교회의 일들이 이런 식으로 끝나 버리는지 모른다. 효과적인 목회가 결코 되지 못한다. 한번은 루터교 목사님을 안 적이 있는데, 미국에서 철학을 학부에서 공부하고 신학을 컨콜디아에서 공부한 분이었다. 23년째 목회를 하시는데 ‘목회’를 “가르침”이나 “설교목회”로만 이해하고 계셨다. 상담 마저도 가르치고 배우는 식으로 해왔다. 한 영혼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진심으로 눈물을 흘려 본 적이 23년 동안 거의 없었다고 했다. 그런 목회 철학을 Pastoral care 개념으로 바꾸는데 다섯 사람이 하루에 8시간씩 3개월이 걸렸다. 그것도 이제 막 눈을 뜨는 단계에 불과했다.
목회의 대상인 사람을 머리로만 이해하고, 가르치고, 상대하면 서로의 영혼이 만날 수 없고, 헤어지면 끝나 버리는 것이다. 나도 신학교 시절에 그런 지적을 받은 적이 있다. 교수님이 나보고 “너는 머리는 발달되었는데, 가슴(feeling)은 발달되지 않았구만. 그래 가지고는 제대로 목회하기 힘들다”라고 지적하셨다. 그때는 그게 무슨 뜻인지 잘 몰랐는데, 그 이후에 좀 이해가 가는 것 같았다.
목회에서 가끔 있는 일이긴한데, 어떤 사건이 터지면 교인들은 ”We need you“그러는데, 목회자는 “Thinking Level”에서 6하 원칙에 맞추어 따지고 있다. 막 죽어 가며 찾아왔는데, 몸은 꼼짝 않고 머리로만 이리 재고 저리 재고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목회자들께서 어떤 목회 철학을 가졌느냐에 따라서 수백 명의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다. 머리에서 머리로만 전달되는 목회, ”옳으냐 그르냐“만 찾게 되고 또한 그런 교인들만 역시 만들게 되고, 타인에게 감화나 감동을 주는 영향력 있는 목회자는 결코 될 수 없는 것이다.
혹시 교인들이 존경할지는 몰라도 그것은 ”목사“라는 이름 때문에 존경하는 것이지, 인격이나 그 목회 철학에 감동되어 그런 것은 결코 아닌것 같다. 돌아서서 쓴웃음만 짓고 만다. 많은 목회자들이 이런 슬픈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왜 예수님이나 테레사 수녀 같은 분들이 온 세상에 영향력을 미쳤는가? 그것은 바로 개인적으로 사람들을 care(individual care)했으며, 가슴으로 봉사하며 살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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