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역사학회 제422회 학술발표회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제422회 학술발표회가 온라인 줌을 통해 진행되고 있다.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영상 캡처

한국기독교역사학회(이재근 회장)가 2일 오후 제422회 학술발표회를 온라인 줌을 통해 진행했다. 이날 최상도 교수(한국기독교역사학회 섭외이사, 호남신대 교수)의 사회로, ▲김일환 박사(서울장신대 한국교회학연구소 책임연구원)가 ‘승동교회의 초기 역사에 관한 연구: 1902-1908년 시기를 중심으로’ ▲정병준 박사(서울장신대)가 ‘초기 한인 디아스포라교회의 특징’이라는 주제로 각각 발제 했으며, 김일석(장신대, 임마누엘교회 담임)·박형신(남서울대 교수) 박사가 각각 논찬했다.

◆ 곤당골교회-홍문동교회-동현교회-승동교회로 이어진 승동교회의 초기 역사

김일환 박사는 “승동교회의 초기 역사는 1893년에 설립된 곤당골교회와 1895년에 곤당골교회에서 분립한 홍문동교회와 연결되어 있다”며 “곤당골교회는 백정 박성춘이 1895년 4월에 세례를 받고 상당수의 백정들이 교회에 출석하면서 교인들 사이의 신분 갈등이 표면화되었다”고 했다.

이어 “결국 백정들의 출석에 불만을 제기하던 양반 교인들 중심으로 1895년 5~6월에 홍문동교회로 분립했다”며 “두 교회는 1898년에 곤당골교회가 화재로 어려움을 겪게 되자 1899년 1월 이후에 홍문동교회로 재결합했다. 그 후 1902년 2월에 서울선교지부와의 갈등으로 인해서 17명의 교인들이 징계를 받은 사건으로 교회가 어려움에 직면했지만, 징계를 받은 상당수의 사람들이 잘못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복권되기도 했다”고 했다.

더불어 “홍문동교회는 징계 사건 이후에 구리개에 있는 제중원 건물에서 모이면서 동현(구리개) 교회, 중앙교회(Central Church) 등으로 불리다가, 승동에 교회 부지와 건물을 구입하여 1905년 8월에 이전한 후에는 승동교회로 이름을 바꿨다”고 덧붙였다.

김 박사는 “곤당골교회-홍문동교회-동현교회-승동교회로 이어지는 승동교회의 초기 역사에서 동현교회 시기는 홍문동교회의 분규와 징계 사건으로 인해서 구리개 제중원 건물로 옮겨와 독자적인 예배당도 없이 3년 5개월 동안 지내야 했던 어려운 시기였다”며 “1902년 2월 말부터 1905년 7월까지 제중원 건물에서 모인 동현교회를 담임한 목회자는 밀러, 레이놀즈, 클라크 등”이라고 했다.

이어 “밀러는 1902년 2월 말부터 연말까지 동현교회를 담당한 것으로 파악되고, 1903년 초부터 1905년 4월 1일까지는 미국 남장로회의 레이놀즈가 담임목사로 사역했다”며 “그 사이에 클라크가 1903년부터 1905년 4월 이전까지 부목사와 동사목사로 레이놀즈와 함께 시무하다가 1905년 4월 1일 이후부터는 담임목사로 재직했다”고 했다.

특히 “레이놀즈가 어려움에 직면한 동현교회를 담임하고 클라크가 동역한 일은 연합 사역의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며 “한편 동현교회 시기는 어려움에 직면한 교회를 추스르고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이를 위해서 서울선교지부의 주도로 동현교회, 새문안교회, 연동교회 등 세 교회가 연합하여 사역을 전개했다는 특징이 있다”고 했다.

그는 “1902년 3월에 시작한 주일 오후 연합예배, 3개월에 한 번씩 열린 연합 성찬 예배와 세례식, 1902년 3월에 열린 서울지역 최초의 연합 여성 사경회, 정기적인 주중 예배 및 매일 기도회 등은 동현교회의 분위기를 쇄신하는 것뿐만 아니라 서울지역의 장로교회가 성장하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역이 전개될 때 남성 선교사와 교인뿐 아니라 여성 선교사와 한국인 여성 지도자의 역할도 중요했는데, 특히 동현교회에서 에바 필드, 에스터 쉴즈, 웰본 부인, 에비슨 부인 등과 함께 전도부인으로 활동한 다동 김 부인은 승동교회의 초기 역사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지도자”라고 덧붙였다.

이어 “1905년 8월 1일에 승동으로 이전한 동현교회는 이후부터 지명을 따라 승동(承洞)교회로 부르게 되었는데, 1907년부터 1908년 말 사이에는 ‘承洞’과 ‘勝洞’을 번갈아 사용하다가 그 후부터 승동(勝洞)교회라는 이름을 사용했다”며 “승동교회는 승동으로 옮겨 온 직후부터 양반들의 세거지(世居地)인 북촌 지역 전도를 시도했는데, 별도의 권서를 임명하여 전도에 집중하도록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런 노력의 결실로 1908년 8월에 안동교회가 설립될 수 있었다. 그리고 같은 해에 초대 장로로 이여한을 장립했다”며 “양반들을 대상으로 한 북촌 지역 전도와 초대 장로로 백정 출신 영수 박성춘 대신에 이여한을 먼저 장립한 일은 곤당골교회 시기부터 이어져 온 백정교회의 이미지를 어느 정도 벗어나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했다.

아울러 “승동으로 이전한 1905년 이후부터 1908년 사이에 이와 같은 활동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며 “남녀 소학교 개설, 길거리 책방 운영, 1907년 2월에 길선주를 초청하여 개최한 서울지역 도(都)사경회 등과 같이 승동교회가 서울의 ‘중앙교회’로 자리매김하는 데 영향을 끼친 활동이 많이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추후 후속 연구를 기약한다”고 했다.

◆ 서간도·북간도·중국본토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의 역사와 특징

마지막 두 번째로 발제한 정병준 박사는 “세계적으로 이주자가 급증하고 다문화사회가 확대되면서 20세기 후반부터 ‘디아스포라’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문화인류학, 사회학, 정치학, 역사학, 교육학, 문학, 종교영역 등 광범위하게 발전해왔다”며 “기독교 신학에서도 디아스포라에 대한 성서연구와 선교학적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고 했다.

정 박사는 “우리나라의 경우 1980년대 후반부터 외국인노동력이 대량 유입되었고, 1998년부터 탈북민이 입국하면서 한국교회는 이주민에 대한 성경·선교적 관심이 시작되었다”며 “디아스포라로서 국외 한인교회에 대한 학문적 관심은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를 중심으로 21세기에 들어와서 확대되었다”고 했다.

그는 “서간도와 북간도의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를 비교할 때 193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서간도 교회는 축소되었고 북간도 교회는 확장되는 모습을 보였다”며 “서간도 교회 수는 20년이 지나도록 14~59개 사이를 오가며, 교인 숫자도 2,227~5,992명 사이로 큰 성장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했다.

이어 “반면 북간도는 교회 숫자가 87~177개로 그 성장 폭이 무척 넓으며 교인 숫자도 4,749~11,196명으로 큰 증가 폭이 있었다”며 “재정적인 면을 살필 때 서간도 한인교회는 전쟁과 자연재해와 같은 위기가 있을 때 재정의 낙차가 매우 컸고 그 회복의 속도가 오래 걸렸다”고 했다.

그러나 “북간도의 교회는 위기가 있어도 재정적 낙차의 폭이 상대적으로 적으며 회복 속도도 빠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며 “종합해보면 서간도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는 사회 경제적으로 훨씬 위험하고, 어려운 조건 속에 처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정 박사는 “중국 내륙에서 일어나는 전쟁 국공내전, 만주 사태로 인한 타격이 북간도의 한인 교회들보다 훨씬 크게 작용했다. 그리고 중국인 지주와 한인 소작인 사이의 관계도 나쁘며, 일본에 대한 중국 관리의 반감이 한인들에게 더 부정적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컸다”며 “북간도 한인교회는 일본군에 의해 1920년 경신참변의 피해를 크게 받았으나 그 피해를 빠르게 회복하는 탄력이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교회가 그 사회에서 지닌 지도력에 큰 차이가 있었다”며 “북간도의 간민회와 민족운동의 지도자들은 대다수 교회였다. 그리고 국가의 보호가 없기 때문에 한인들 사이 상호부조하는 구심점이 되었으며, 신앙공동체가 경제적 자립을 위한 도움을 제공했다. 교회는 신앙공동체이기 전에 경제적 사회적 생활 공동체가 될 수 있었다”고 했다.

또한 “서간도의 교회들도 어느 정도 이런 역할을 하였지만 한인들의 숫자 규모와 분포 범위로 볼 때 응집력이 훨씬 떨어졌다”며 “한인 교회 지도자들이 지닌 사회적 영향력과 중국 관리들과의 관계성도 교인들이 유입하는 요인이 된다”고 했다.

그는 “한인 디아스포라의 사회적 신분을 보았을 때 서간도의 경우 대부분 생존을 위해 압록강을 넘어 정착한 평안도 유민들이다. 물론 유하현에 독립운동을 위해 찾아오는 지사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소수였다”며 “서간도 한인교회 안에서 국가의 미래를 설계하는 지적인 작업이 발견되지 않는다. 북간도의 경우 생존을 위해 찾아온 사람들이 다수이지만 이상촌을 건설할 목적으로 이주하는 사람, 종교적 이유로 찾아오는 사람,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정착하는 사람 등 다양한 단체들이 있었다”고 했다.

아울러 “북간도 진보적 개신교인들은 민족과 국가의 미래를 구상할 수 있는 신앙·철학적 근거가 있었다. 상해, 남경, 북경의 한인 기독교인들은 대부분이 지식인 계층이었고, YMCA와 선교사를 통해 국제질서에 대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며 “그래서 이들은 상해와 남경의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3.1운동에 대해 구상할 수 있었고 더 나아가 임시 정부를 설립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북경의 고려기독청년회는 처음에는 박용만의 무장항쟁노선을 지지했으나 안창호의 흥사단에 흡수되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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