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역사학회 제421회 학술발표회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제421회 학술발표회가 온라인 줌을 통해 진행되고 있다.

한국기독교역사학회(이재근 회장)가 3일 제421회 학술발표회를 온라인 줌을 통해 진행했다. 이날 정병준 박사(한국기독교역사학회 지역이사, 서울장신대 교수)의 사회로, ▲김원중 박사(연세대 인문사회의학협동과정 박사과정)가 ‘한국에서의 민간 차원의 한센병 관리’ ▲한강희 박사(한신대 겸임교수)가 ‘선린형제단과 국가 만들기; 해방정국 강원용과 기독청년 조직의 건국활동’이라는 주제로 각각 발제했다.

◆ 서양 선교사들, 근대 이후 한국의 민간차원 한센병 관리 시작

먼저, 김원중 박사는 “조선시대까지 한센병은 주로 국가에서 관리하였다. 치료는 대풍자유(大風子油)를 복용하는 것이었지만 한센병을 치료하는 효과가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격리하는 것이 주된 관리였다”며 이들은 신체적 질병도 제대로 치료가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거주 이전의 자유도 제한되었기 때문에 조선 사회에서 가장 낮은 계층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조선 말에 이르러 조선이 국가 기능을 거의 못하게 되자 이들의 삶은 더욱 비참해지면서 거리의 부랑자의 삶을 살게 된 것으로 보인다”며 “이러한 가장 밑바닥의 삶에 다가온 것이 서양의 선교사들이었다. 선교사들은 근대 이후 한국의 민간차원의 한센병 관리를 시작하게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전의 조선의 한센병 관리와는 다른 점이 있었다”며 “의학적으로는 향상된 효과를 가지고 한센병 치료를 하였을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는 격리를 하되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는 방법으로 하였다. 이렇게 다른 점을 보인 이유는 조선과 서양이 다른 사상적 배경을 가지기 때문이다. 서양에서도 한센병은 고대에서부터 사회적 격리의 대상이었다. 그것은 성경을 통해서도 나타났다”고 했다.

김 박사는 “(성경에서) 웃시야가 남유다의 왕이 되어 통치할 때 하나님의 도움으로 다른 나라들을 물리치고 강성하게 되었다”며 “그러자 웃시야의 마음이 교만하여져서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분향을 직접 드리려고 하다가 이마에 한센병이 생겨 격리를 당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어 “구약시대만 해도 한센병 환자의 관리는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예수님이 오신 뒤로 한센병 환자를 치료해 주셨다”며 “누가복음 5장 13절을 보면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나병이 곧 떠나니라’라고 했다. 아마도 한센병 환자가 최초로 치유된 사건일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치유함을 받은 한센병 환자에게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고 레위기 14장에 나온 규례대로 예물을 드려 속죄함을 받았음을 입증하라고 하셨다”며 “즉, 예수님의 치유가 육체적 치유일 뿐 아니라 영적인 치유임을 확인하여 주셨고, 영적인 치유함을 받은 이후에야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 수 있음을 말씀하여주신 것”이라고 덧붙였다.

더불어 “이와 같이 신약시대에는 한센병 환자의 영적, 육체적 치유가 가능해졌는데 이것은 모두 조선시대의 한센병 관리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며 “영적인 측면에서는 기독교 사상을 가진 의료선교를 통해 이루어졌고, 육적인 측면에서는 의학의 발전으로 인한 한센병의 원인인 한센균의 발견으로 치료의 발전을 이루었다”고 했다.

그는 “한국의 민간 차원의 한센병 선교는 영적이고 육적인 측면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한센병 환자들이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며 “그리고 한센병 환자들이 사회복구를 하는데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이 가능하게 했던 것은 종교개혁시대부터 시작된 개신교 신앙이었고 그리고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아 발전한 의학발전의 영향이었다”고 했다.

아울러 “이것으로 인해 한센병 관리는 당시 기독교를 허용한 일제시대에는 체제 유지에 도움을 주었지만, 신사참배 이후 기독교를 억압한 일제시대에는 쇠퇴하여 당시 체제 유지에 어려움을 주었으리라 생각된다”고 했다.

◆ 선린형제단과 강원용의 기독교적 국가건설에 대한 시대적 의의

이어 두 번째로 발제한 한강희 박사는 “한국 해방과 함께 1945년 9월 이북에서 서울로 월남한 강원용은 은진중학교 인물이 결집했던 조선신학교에 편입하며, 남한 사회에 정착하게 된다”며 “그는 북간도에서 새로운 국가건설을 추동했던 기독 사상가들과 운동가들의 기획을 미군정 체제하에 있었던 이남에서 구현하고자 했다”고 했다.

이어 “이는 북간도 지역에서의 극단적 공산주의 체험과 자유민주주의와 반공을 전면에 내세우는 미군정 체제 사이에서 공명하는 하나의 시도였다”며 “청년 강원용은 북간도와 은진중학교에서 체득한 국가적 이상을 더욱 체계적으로 체현하고자 했고, 선린형제단을 조직함으로써 하나의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한 박사는 “이러한 민족 해방의 시대 강원용은 20대 후반 청년의 나이였지만, 이미 대한민국 설계자로서 역할과 임무를 강렬하게 자각하고 있었다”며 “북간도에서의 공산주의 체험은 그가 국가건설에 있어서 반공의 태도를 견지하게 했지만, 그렇다고 감성주의적 이념에 경도된 것은 전혀 아니었다. 그는 체험적 반공주의 경향을 보이곤 했지만, 그렇다고 자본주의에 의존하지 않았고, 가치판단의 기초로서 기독교사상을 토대로 중도 노선이라는 제3의 길을 걸어가고자 했다”고 했다.

이어 “이러한 노선은 해방 정국 그가 조선신학교에서 신학도로서 역할만이 아니라, 새로운 국가를 위한 ‘청년 웅변가’로서의 여정을 촉발했다”며 “강원용은 이 시기 청년 정치에 참여하며 김규식계에서 활동하고 1947년 6월에는 김규식의 추천으로 청년 대표로서 좌우합작위원회 정식 위원으로 정계에 입문하게 된다”고 했다.

특히 “그는 기독교적 토대 위에 세워진 신국가를 체현하는데 몰두했다”며 “강원용은 국가건설을 위한 기초 작업으로 기독 청년 조직 운동을 주목했고, 그 첫 가시적인 모임이 바로 본 연구가 주목하는 선린형제단으로 나타났다”고 했다.

한강희 박사는 “선린형제단과 강원용의 기독교적 국가건설에 대한 시대적 의의는 먼저, 강원용과 선린형제단이 구상하는 기독교적 건국론과 실천은 일제강점기 북간도 명동과 용정에서 시도되었던 이상촌 운동과 독립 의식에서 기원했다”며 “해방 이전 북간도의 공간은 민족주의 의식이 발현하며 기독교 애국계몽운동과 자치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개혁의 장(場)이었다. 김약연을 비롯한 초기 북간도의 개척자들은 기독교사상과 세계관을 수용하고 이를 기초로 사회와 문화를 재건하며 식민지 공동체를 견인하고 독립과 자유의 국가로 향하게 이끌었다”고 했다.

특별히 “용정 은진중학교라는 교육 공간을 통해서 맺어진 진보 지식인들의 결집은 민족과 국가에 대한 새로운 이상을 설계했고, 이는 이상촌 운동을 통해 종교는 물론 정치, 사회, 문화에 이르기까지 대대적인 개혁의 실험을 개진하게 했다”며 “이러한 북간도에서의 이상은 해방
후 강원용이 주도한 선린형제단을 통해 재현되며 신앙에 기초한 국가 만들기의 동력이 되었다”고 했다.

이어 “둘째로 해방 직후 월남 청년들이 결집한 선린형제단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세속 정치와 사회에 접목함으로써, 민주주의 건설과 독립 실현을 목적으로 사회 전반의 재건 운동에 참여했다”며 “「善隣會便覽」에서 명시된 것처럼 선린형제단은 존재 목적과 실천 강령에 있어서 인간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그리스도인의 ‘중생’이 새 국가건설의 토대가 되고 실생활, 교육, 문화 등의 제반 영역에 작용하는 민주주의 제도를 수립할 것을 제시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는 분명 김재준의 「基督敎의 建國理念」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강원용은 사상적으로 김재준의 건국론을 수용하면서도 해방 정국 국가재건을 위한 기독교적 이념을 발전시켜 나갔고 이는 「새 時代의 建設者」라는 저서에서 밝혀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더불어 “강원용은 선린형제단과 기독청년조직운동 그리고 정치 영역에 참여하면서 「새 時代의 建設者」에서 밝힌 인간주의적 문명의 위기를 풀어내고자 했다”며 “죄로부터 해방된 인간과 기독교 자체의 개혁, 그리고 기독교 자유 정신의 국가적 구현 등을 강조함으로써 그리스도 신앙에 입각한 국가론을 발전시켰다”고 했다.

또한 “마지막 셋째로 강원용은 해방 후 좌와 우라는 이념적 대립 상황 속에서 특정 이념을 초월하여 기독교적 평화 문명 건설에 기반해 좌우의 간극을 좁혀 통일된 국가재건을 지향했다”며 “강원용은 한반도에 공산주의와 자유주의라는 이념 대립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찬탁과 반탁이라는 신탁통치를 둘러싼 냉혹한 이념적 갈등을 목격했다. 그 역시 반탁을 지지하고 반공강연을 통해 민주주의 체제를 구상했지만, 열린 사상적 토양 속에서 신탁통치가 가져오는 민족 분단의 문제를 경계했다”고 했다.

그리고 “좌우합작위원회에도 위원으로 활동하며 당대 기독 정치인들과 화해와 연합을 위한 연대를 이어가고 통일민족 국가 형성을 위해 노력했다”며 “좌와 우라는 극단적인 갈림길 속에서 강원용은 이념 문제를 넘어 통일된 민족국가라는 대목표를 현실적으로 구현하고자 했다”고 했다.

이어 “그가 이러한 첨예한 이념을 상대화하고 객관화할 수 있었던 중심에는 바로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하나님 나라 건설과 이 땅의 문제를 일치시켰기 때문에 가능했다”며 “해방 정국 강원용의 기독교사상에 기초한 중도 노선은 이념적으로 양극화되고 때로는 점차 우익화 되는 과정에서 이념을 초월하여 국가의 일치와 화합을 모색하는 주목할 만한 길이었다”고 덧붙였다.

한 박사는 “해방 정국 기독 청년 강원용은 미국과 소련 등 열강의 패권으로 인해 불완전한 해방의 상황 속에서 기독교적 건국이념을 발전시키며 국가재건의 문제에 참여해 왔다”며 “특히 그는 선린형제단이라는 조직을 통해 기독 청년들을 규합하고 기독교 사회참여를 위한 제도와 실천을 진행했다”고 했다.

아울러 “강원용은 정치 영역에서 청년 지도력을 확장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세상 속에 존재해야 하는가를 보여주었다”며 “그가 보여준 신앙은 비역사적인 내세 초월의 종교 관념이 아니라, 신앙과 세상의 역동적인 관계 속에서 이 땅에 구현되어야 할 역사 창조의 힘임을 증거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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