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현모 교수
류현모 교수

최근 영아살해가 사회적 이슈로 대두되고 있다. 출산 기록은 있지만 출생신고가 안되어 현재 경찰이 수사 중인 사라진 아기는 1천 명에 육박하고 있다. 감사원 조사에 따르면 태어나서 바로 예방접종은 했는데 출생신고가 안된 아기들이 이천 명을 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 조사 시스템이 2015년에 만들어졌으니 그전의 형편은 가늠할 수 없다. 언론은 영아살해에 가담한 부모들을 비난하고, 국회 법사위는 법률에 있는 <영아살해죄 및 영아유기죄>의 형량이 너무 낮으니 이를 폐지하고, 형량이 더 높은 일반 살인죄 및 유기죄 처벌 규정을 적용받도록 하는 형법 개정안을 만들어 본회의에서 일사천리로 통과시켰다.

반면 2019년 헌법재판소는 낙태를 불법으로 판단하고 낙태를 시도한 여성 및 이를 도운 의사를 처벌하는 이전의 법률이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라는 헌법적 권리를 침해하기 때문에 2020년 말까지 이를 대체할 새로운 법률을 제정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국회가 이와 관련된 입법을 미루고 있는 동안 임신 14주까지는 전면적으로, 24주까지는 조건부 낙태를 허용하는 입법들이 제안된 적이 있고, 심지어 태어나기 전까지 무제한 낙태를 허용해야 한다는 법률안도 발의된 바 있으나 아직 입법을 미루면서 법적 공백 상태에 있다.

영아살해와 낙태에 대한 사법부, 입법부, 행정부와 언론의 상반된 태도를 보면서 과연 생명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영아살해에 대해서는 더 엄중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태아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어떤 이유든지 낙태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모태 밖으로 나와야 생명인가? 임신 9개월이 지나 태어날 날이 임박한 아이는 생명이 아닌가? 그러면 자궁 밖으로 반쯤 나온 아이는 생명인가? 낙태를 합법화한 나라들에서 임신 14주, 22주, 24주 등 기준이 있으나 임의적인 설명일 뿐이다.

성경은 태아를 발생의 초기 단계에 있는 완전한 인간 개체이며 태어나서 성인이 성취할 수 있는 모든 잠재력이 있다고 간주한다. 시편 139편의 기자는 수태된 자신의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부터 주의 눈이 보살피고 있음을 강조한다. 욥, 다윗, 세례 요한, 사도 바울도 태 속에서부터 우리 인격을 부여하신 창조주를 찬양하고 있다. 성경은 수태의 순간부터 생명임을 확정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에 인간의 생명은 동물과는 다른 가치를 지닌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로 모든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실 만큼 태아를 포함한 모든 인간의 생명은 소중하고 그 생명권은 지켜져야 한다.

과학도 성경과 같은 결론을 제시한다. 한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모든 유전적 특성의 정보는 아버지의 정자와 어머니의 난자가 결합하는 수정의 순간에 결정되고 그 후에는 변하지 않는다. 의학적으로 수정부터 태어날 때까지의 기간 중 어디까지 비생명이고, 어디부터는 생명이라고 나눌 수 있는 불연속 구간이 없다. 하나의 수정란에서 시작하여 끊임없는 세포의 증식을 거쳐 똑같은 유전정보를 가진 세포들로 형성된 태아로 발달한다. 수정 순간부터 한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이 부여되기에 태아에게도 인권이 부여되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 민법도 이 점을 인정하여 유복자에게도 상속의 권리를 부여하고 있다.

성 혁명을 추진하는 진영이 우리 자녀들의 교과서 속에 널리 흩뿌려 놓았던 ‘성적자기결정권’이라는 용어는 청소년을 포함한 모든 개개인이 자기의 성별정체성 선택, 성관계의 상대 선택, 낙태의 선택, 성전환의 선택에 포괄적 권리를 가진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2022년 국교위의 의미 수정고시는 강제적인 성관계에 대한 방어의 의미로 성적자기결정권을 국한했다. 이것은 남녀 모두에게 성관계하겠다는 결정에는 반드시 생명의 잉태와 양육에 대한 책임이 뒤따름을 학교와 가정에서 분명히 가르쳐야 함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후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명령하셨다. 시편 127편은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라고 축복하셨다. 우리가 당면한 저출산 문제는 성-생명-결혼-가정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서 멀리 벗어난 것에 대한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다.

성적 순결과 결혼의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면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대행하는 청지기의 역할을 버리고, 성에서 감각적인 쾌락만을 추구하면서 그 결과인 생명에 대해서는 무책임하게 만들어 버리는 성 혁명적 교육이 낮은 결혼율과 저출산의 주된 원인으로 보인다. 성 윤리의 기준이 무너진 이 시대에 성경의 기준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앞에서 했던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라는 선언이 오늘 우리의 선택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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