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필 교수
김주필 교수가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학술발표회서 발표를 하고 있다.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줌 영상 캡쳐

한국기독교역사학회(송현강 대표)가 5일 오후 2시 제388회 학술발표회를 비대면 온라인으로 개최했다. 이날 김주필 교수(국민대 교수, 한국어문학부)가 ‘이수정의 초기 성경 번역에 관한 연구: ‘신약전서 마가전 복음서’의 현토를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발표를 했다.

김 교수는 “현토(한문에 토를 다는 일-편집자 주)본을 만든 이수정은, 임오군란(1882) 때 민비를 보호한 데 대한 고종의 후의로 제3차 수신사의 일행으로 일본에 가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며 “1882년 9월 29일 일본에 도착한 이수정은 친구가 주선해 준 일본의 기독교인 농학자 쯔다센[律田仙]을 만나 복음을 듣고 교리를 배우다가 1883년 4월 29일 도쿄의 한 교회에서 세례를 받는다”고 했다.

이어 “이수정이 신약전서를 번역하게 된 시기는 미국 성서공회의 일본 지부 총무였던 루미서를 만난 이후였다”며 “루미스가 미국 성서공회 총무인 길맨에게 보낸 5월 11일자 편지에서 이수정을 처음으로 소개하고, 5월 29일자 편지에서는 ‘이미 ‘마태복음’의 현토 작업을 마치고 ‘마가복음’ 상당 부분을 진행했다’고 한다”고 했다.

그리고 “6월 15일자 편지에서는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을 끝내고 ‘로마서’를 하고 있다고 하였는데, 6월 21일자 편지에서는 ‘한한신약전서’를 매듭짓고 ‘마가복음’을 시험역 하기로 결정했다’고 했다”고 했다”며 “이 내용을 보면, ‘로마서’의 작업이 1주도 걸리지 않았으며, ‘마태복음’을 5월 11일부터 시작하였다고 하더라도 6권 전체 작업에 걸린 시간은 6주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수정은 어떻게 그렇게 짧은 기간에 그렇게 많은 작업을 할 수 있었을까”를 물었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찾아보기 위해 먼저 현토본의 본문을 BC본과 훈점성서의 본문과 대비해 보았다”며 “그 결과 훈점성서를 만들면서 생긴 실수나 오류 부분을 그대로 따른 부분도 있지만 BC본을 따른 것도 적지 않았다. 이것은 현토본을 만들면서 BC본도 보았고 훈점성서도 보았음을 말해준다”고 했다.

그는 “BC본의 본문은 중국어로 되어 있다”며 “중국어는 고전 중국어의 문어 상태를 보여주는 한문과 대비하면 문장을 구성하는 어휘가 다르고, 문법적 특성을 나타내는 형태가 사라지거나 단순화되어 한문에 능숙한 사람도 사전을 보면서 충분히 해독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이수정이 다양한 훈점이 표시되어 있는 훈점성서보다 현토 작업에 가장 필요한 구두점이 본문에 찍혀 있는 BC본을 바탕으로 작업 했을 것으로 추정했다”고 했다.

이어 “이러한 관점에서 ‘마가복음’ 제1장을 대상으로 BC본의 구두점과 현토본의 토를 대비해 본 결과, 양자 사이에는 상당히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먼저 BC본의 구두점 자리에는 현토본에서 3곳을 제외하고 모두 토가 달린 것으로 나타났으며, 토가 달리지 않은 3곳은 동격 관계를 나타내는 자리, 대사를 직접 인용하는 ‘云, 曰’ 뒤였다. 이들 자리에는 조선의 전통적인 한문 현결에서 구결을 달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수정은 현토문을 만들면서 BC본의 구두점 자리에 한문 현결의 방식으로 중국어 문장에 현토를 한 것이라 할 수 있다”고 부연했다.

그러나 “현토본에는 BC본에 구두점이 없는 자리에 토가 달린 것이 16곳에 나타났다”며 “이들 16곳은 모두 분단 구절의 음절 수가 6음절 이상인 경우로서, 부사나 주어 다음에 토를 달아 시각적으로 동사와 분리해 줌으로써 문장 구조를 쉽게 파악하도록 한 것이거나 하나의 분단된 구절에 동사가 두 개일 때 그것을 2개의 구절로 분단하여 독해를 쉽게 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고 했다.

또 “일본의 훈점성서에 표시한 훈점과 현토본의 토 사이에는 일정한 상관관계를 찾을 수 없었다”며 “그 이유는 훈점성서의 훈점은 일종의 석독구결과 같이 주로 분단된 구절의 독해 순서나 내부 구성 요소들의 독법을 표시하기 때문에 문장을 구절 단위로 분단하여 구절들의 논리적 관계를 중시하는 한문 음독의 현결 방식과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고 했다.

더불어 “그렇다고 하여 현토본을 만들면서 이수정이 훈점성서를 보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현토본의 본문은, 훈점성서를 만들면서 생긴 실수나 오류를 그대로 따른 부분이 있기 때문”이라며 “이수정이 현토본을 만들면서 훈점성서를 보았다면 그것은 문장의 구절 분단은 BC본의 구두점에 의해 결정되었기 때문에 그 다음 작업에 해당하는 토의 종류를 결정하는 데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은 있으나 한문 해독에 능숙한 이수정이 일본에 간 지 10개월도 안된 상태에서 일본어의 문장 구조, 일본어 단어의 훈독, 훈점의 사용 방법 등을 중국어 문장의 분단된 구절에 얼마나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을지 의구심이 든다”고 했다.

이어 “훈점성서의 특성을 감안하면 결국 현토본을 만드는 데에는 제한적으로 사용하거나 참고하는 선에서 그치고, 중국어 문장을 분단한 구성 요소들을 우리말로 하나하나 번역하는 우리말 번역본의 작업 과정에 도움을 받지 않았을까 추정된다”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이렇게 보면 한시를 지을 정도로 한문 능력이 있던 이수정은 BC본의 구두점을 바탕으로 훈점성서의 훈점을 참고하면서 현토 작업을 해 나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이 6주 내외의 시간에 6권의 현토 작업을 한 놀라운 성과의 배경에는 성경 번역에 대한 이수정의 열정과 열망이 뒷받침되었겠지만, 이수정의 한문 해독 능력이 십분 발휘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며 “거기에다가 BC본의 구두점에 직접적인 도움을 받고 훈점성서에 간접적으로 도움을 받아 이러한 놀라운 성과를 낼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수정의 업적은 한국 교회의 성경 번역사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훌륭한 업적이 아닐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수정이 수행한 현토 작업은 중국어 문장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의 하나라는 번역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작업 내용에 대한 평가는 현토의 내용으로 평가받아야 할 것”이라며 “말하자면 이수정의 현토 작업에 대한 평가는 궁극적으로 원문의 의미를 얼마나 잘 전달할 수 있도록 달았느냐로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이수정 스스로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는지 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아울러 “가령 우리는 ‘新約全書馬可傳’에 단 토가 우리말 번역본인 ‘신약마가젼복음셔언’에 그대로 반영된 정도를 보면 이수정이 현토본의 토에 대해 어떻게 판단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며 “한국교회의 초창기에 이루어진 성서 번역 과정과 특성을 밝히기 위해서는 이러한 작업에 대한 면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재근 교수
이재근 교수가 두 번째 강연자로 발표를 하고 있다.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줌 영상 캡쳐

두 번째 주제강연으로 이재근 교수(광신대 교수)가 ‘교회로 간 한국전쟁-한국전쟁과 전북 김제지역 개신교’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이 교수는 “한국전쟁은 기본적으로 한반도에서 남북한의 정규군과 비정규군(전투경찰, 민간유격대, 치안대, 학도병 등 민간인 지원군), 남한을 지원한 미군 등 유엔군, 북한을 지원한 중공군(중국 인민해방군)이 벌인 정규군 간의 전쟁이자 국제전이었다”고 했다.

이어 “그러나 한국전쟁기에 발생한 인적 피해는 군인보다 민간인이 더 많았다. 전후 남한 정부 통계와 북한 ‘통일조선신문’에 따르면, 남북한 군인 사망자가 약 44만 명인데 반해, 남북한 민간인 사망자의 합은 약 65만 명으로, 군인보다 민간인 사망자가 21만 명이나 더 많았다. 즉, 이 전쟁은 전방의 전선에서 첨단 무기로 중무장한 군대들이 벌인 대규모 국제전이기도 했다”며 “그러나 동시에 후방에서도 군경 및 우익 세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 인민군 및 좌익세력에 대한 민간인 학살, 같은 마을 사람들 간에 이념과 해묵은 갈등 등으로 온갖 수단을 동원해 대규모 살육을 벌인 내전이자 마을전쟁이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한양대 사학과 박찬승 교수의 ‘마을로 간 한국전쟁: 한국전쟁기 마을에서 벌어진 작은 전쟁들’에서 주장한 복합적인 갈등 구조의 특징에는 ‘신분·계급 간의 갈등’, ‘친족·마을 간의 갈등’, ‘종교·이념 간의 갈등’으로 보았다”고 했다.

그는 “한국전쟁은 국제전과 내전이라는 특징을 동시에 지닌 전쟁이었다. 한국전쟁 발발 후 인민군이 김제를 점령한 7월 20일(만경은 7월 19일)부터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수복으로 인해 인민군 및 지방 좌익 대부분이 철수한 9월 28일까지, 김제에서 ‘적대세력’(인민군, 내무서원, 자위대, 정치보위부, 빨치산, 좌익세력)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 수는 최소 208명이었다”며 “이들 중 기독교인은 만경교회 15명, 금산교회 2명, 대송교회 8명, 대창교회 1명 등, 최소 26명에 이른다”고 했다.

이어 “가해한 적대세력과 피해를 입은 기독교인과의 갈등 구조는 복합적이었다”며 “신분과 계급 갈등, 친족 내 갈등, 종교와 이념의 갈등, 정치적 지향성 갈등이 모두 얽혀 있고 연결되어 있었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유신론적 기독교인 대 무신론적 유물론자, 부르주아 대 프롤레타리아, 지주 대 소작인, 양반 대 천민, 우익 행동대(독촉, 대동청년단, 반공청년단) 대 좌익 행동대(남로당, 조선청년동맹, 민애당), 이승만 대 박헌영(혹은 김일성), 친미 대 친소, 군경 대 빨치산, 인민군 대 국방군. 종교, 계급, 지위, 종교, 이념 등, 평시라면 단순한 인간관계나 정치적 갈등으로 그치고 말 긴장이 상대에 대한 살육으로 이어진 것은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이 만든 인간성 상실의 결과일 것”이라며 “오랜 한민족의 역사 속으로 찾아온 지 겨우 100여년 조금 넘은 두 손님 마마가 김제에서 만나서 배타적 독점을 주장하다가 남긴 아픔과 상처는 그만큼 크고 깊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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