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세상의 의미

최더함 박사
최더함 박사

그렇다면 다시 한번 ‘무엇이 세상인가?’하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는 ‘세상’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는가? 여기서 매우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정의할 때 단순히 ‘눈에 보이는 그 무엇’을 해석하는 것에 함몰되어 그것의 진짜 의미를 놓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세상’은 사람들의 행위나 취향, 혹은 즐거운 놀이 등에 국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술을 먹고, 춤을 추고, 도박을 하고, 쾌락을 찾아다니는 행위들은 단지 세상이 외형적으로 드러난 것뿐이다.

진짜 세상은 ‘우리 안’에 있다. 우리 안에 있는 ‘세상의 영’이 유혹하고 조종하는 모든 것이 ‘세상’이다. 성경이 말하는 ‘세상’은 ‘거듭나지 못한 인간의 본성’을 말한다. 이 본성이 살아 있는 한 그것이 어떤 장소, 어떤 때, 어떤 행위로 나타나든 그것은 중요한 사실이 아니다. 타락한 인간 본성에서 나오는 것들 자체가 ‘세상’이요, 그런 세상을 추구하는 가치관이 바로 세속주의다.

이러한 의미로 살펴볼 때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세상은 동거인이다. 서로 적이면서 동거해야 하는 운명공동체다. 우리 안에 있는 세상을 누구도 등지거나 버리고 살 수 없다. 그래서 세상이 무서운 존재다. 버리고 싶어도 평생 같이 지내면서 서로 싸우고 원수처럼 서로를 괴롭혀야 하기 때문에 참으로 두렵고 무서운 존재이다. 바울은 이것 때문에 괴로운 심정을 토로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롬 7:5)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1~24)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서 ‘세상’이라 함은 곧 ‘육신의 일’을 가리킨다. 그래서 바울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긴다”(롬 7:25)고 했고,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5~6)고 했다. 나아가 바울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8:7)이며,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으며”(8:8),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8:9)고 선언했다.

한편으로 세상은 어두움으로 표현된다. 주님은 이 어두운 세상에 참 빛을 비추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으며, 당신의 제자들을 어두움 가운데서 빛으로 나타내는 주님의 대리자로 임명하셨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마 5:14)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2:15~16)

아무튼 성경은 세상에 대해 양면성을 보인다. 하나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사랑받는 존재로서의 세상이다.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매우 흡족하셨다. 창세기 1장에만 하나님의 자족하시는 심경을 표현한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토브’가 무려 7차례나 반복되었다(창 1:4, 10, 12, 18, 21, 25, 31). 특히 모든 창조를 마치신 다음엔 얼마나 자신이 창조한 세계가 마음에 흡족했는지 “심히 좋았다”(טוב םאך, 토브 메오드)라는 말씀으로 심경을 피력하셨다.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성경 곳곳에 표현되어 있다. 구약의 저자들은 이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산물이요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무대라고 말하고 있다. 먼저 시편 기자의 노래를 보자.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시 8: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시 19:1)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 24:1)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시 29:3)

“전능하신 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시 50:1)

예레미야 선지자도 이렇게 노래했다.

“여호와께서 그의 권능으로 땅을 지으셨고 그의 지혜로 세계를 세우셨고 그의 명철로 펴셨으며”(렘 10:12)

사도 요한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의 그 아름답고 순전한 모습, 죄악에 물들지 않았던 그 순수한 상태에 대한 소중한 기록임과 동시에 타락하여 죄악에 물들고 만 세상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으신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독생자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세상으로 보내셨다는 것은 그만큼 세상을 사랑하는 반증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요 3;16)

반면에 세상은 온갖 악으로 가득 찬 죄악 된 곳으로 하나님이 극히 미워하시는 대상이기도 하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며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니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골 2:20)

그렇다면 문제는 세상을 사랑함과 미워함을 어떻게 구별하며 그 기준선을 어떻게 정하고 살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세상은 타락한 곳이므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셨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아니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만 읽어 보아도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고 반박한다. 이렇게 분명히 우리 가운데 세상을 두고 상반된 두 입장이 실제로 존재한다.

전자의 경우엔 세상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며 세상을 매우 경계하는 입장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에게 “TV나 인터넷이나 영화나 오락게임 등을 아예 차단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냐” 물으면 이들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세상적인 것들을 차단하고 사는 것이 성경의 정신에 합당하다”고 대답한다. 이들은 세상적인 것들을 즐기는 것 자체가 세속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들 중 극단적인 부류는 아예 산속이나 인근 마을과 세상 사람들에게서 격리된 곳을 찾아 세상과 절연하고 수도 생활에 가까운 삶을 지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요일 2;15)고한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으로부터 수도원적인 고립을 기하며 살라고 주장한 것이 아니다. 요일 2:15의 ‘세상’은 ‘하나님을 심히 대적하고 하나님을 떠난 인간 문명사회나 그 조직체계’이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단호히 거부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상 그 자체’이다.

반면에 후자의 입장은 “어차피 세상에 함께 사는 곳이라면 세상에 깊숙이 침투하여 세상과 평화롭게 지내며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세상과 단절하고 사는 것을 극히 반대한다. 이들은 세상과 적극적으로 어울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때로 이들은 복음주의자가 아니라 세상과 혼합되고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전도된 낙오자들로 보일 때가 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성경의 말씀이 자신들의 입장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구실 아래 해당 구절을 아예 삭제한 경우도 있다.

이렇게 세상에 대한 이 상반된 입장이 우리 모두에게 존재하고 매일 일상의 삶 가운데서 직접적으로 경험되어진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실제의 경험들을 어떻게 신학적으로, 교리적으로 잘 분별하고 적용하는 가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 대한 두 가지 입장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 두 입장에 대해 극단적인 접근방식이 아니라 상호 조화적인 방법을 찾아 지혜롭게 대처하고 적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지혜는 이미 성경 안에 잘 계시되어 있다. 먼저, ‘세상’은 타락한 곳이며 사단이 지배하는 죄악된 곳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와 함께 복음으로 거듭나야 할 대상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세상은 복음전파의 대상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어진 이 땅에서 일평생 오직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하는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을 받은 존재이다. 둘째,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 세계로서 정성을 다해 보살피고 돌보고 섬기며 나아가 다스리고 정복해야 할 할 대상으로서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졌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식같이 아끼고 보호해야 할 귀한 존재이다. 셋째, ‘세상’은 다가올 새롭고 영원한 세계의 도래를 위한 하나의 발판이자 전제로 생존하는 일시적인 존재이므로 이것을 사랑하며 마음을 빼앗기고 살아선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것을 향하지 않는다.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에 사랑은 의미를 두지 않는다. 하나님은 영원한 것을 사랑하신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잠시 있다가 사라질 세상에 미련을 두거나 사랑의 마음을 빼앗기는 우를 범하지 말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요일 2:15의 말씀이 바로 그런 의미이다. <계속>

최더함(Th.D/역사신학,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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