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우 목사
이희우 목사

1981년의 미국 영화 『레이더스』(Raiders)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세계 영화계를 신선한 충격에 빠뜨린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 감독의 인디아나 존스(Indiana Jones) 시리즈 중 첫 작품이다. 영화제목 ‘레이더스’는 원래 ‘침략자들’이라는 뜻이지만, 영화 포스터의 ‘잃어버린 언약궤를 찾아서’(Raiders of the Lost Ark)라는 제목처럼 언약궤를 찾아 나선 모험 판타지였다. 해리슨 포드라는 최고의 명배우가 주연을 맡았고, 이 영화는 우리나라 TV에서도 여러 번 방영된 바 있다.

지성소에 있던 언약궤(Ark of the Covenant)는 바벨론에 망할 때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고, 고고학 교수인 인디아나 존스 박사가 그 언약궤를 찾아 나선 것인데,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언약궤를 추적하던 독일군이 법궤를 열었을 때 그 안에는 모래뿐이고, 거기서 무서운 천사들이 쏟아져 나와 이 신성한 궤를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을 죽이는 장면이다.

이 영화에서 천사들이 궤를 지키듯이 본문에도 언약궤의 움직임에 따라 ‘하나님의 손’이 나타난다. 그 손이 노획(鹵獲)한 언약궤를 갖다둔 블레셋의 도시마다 재앙이 임한다는 말씀이 사무엘상 5장, 이 장의 중심 단어는 ‘여호와의 궤’, 즉 ‘언약궤’다. 12절밖에 안 되는 짧은 장에 12번이나 나오는 이 단어는 4장부터 6장까지 세 장의 중심 단어이기도 하다. 이 언약궤와 관련한 블레셋의 입장을 살펴보며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면 좋겠다.

언약궤를 노획하다

두 번의 전쟁에서 일방적 승리를 거두며 언약궤까지 노획한 블레셋은 해양 민족으로서 일찍부터 철기로 만든 무기로 무장한 강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삼상 13:20, 21, 17:5-7). 이스라엘은 그들에게 엄청난 인명피해를 당하고 언약궤를 노획물로 빼앗겼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긴 이스라엘의 영적인 타락, 은혜 상실이 원인이었지만 블레셋은 자신들의 강한 군사력과 다곤 신 때문에 승리한 것으로 착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언약궤를 그들의 수도인 아스돗 다곤 신전, 그것도 이스라엘의 신을 굴복시켰다는 승자의식(勝者儀式)으로 다곤 신상 바로 곁에 둔다. 마치 언약궤를 다곤 신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희생물로 드린 모양새, 하나님을 포로로 결박하고 조롱하는 꼴이다. 물론 언약궤를 다곤 신상 곁에 둔 것은 신(神)은 많을수록 좋다는 생각이었을 수도 있지만 이건 뻘짓이었다.

여하튼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범신론자(pantheist)들, 하나님을 그저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만 여긴다. 흔히 사람들은 모르고 한 행동은 ‘실수’라고 여기지만 아니다. 언약궤를 노획하고 조롱한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부르는 큰 죄악이었다.

그리고 그 대가는 끔찍했다. 다곤 신상이 무너져 파괴된다. “아스돗 사람들이 이튿날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3절). 얼굴이 땅에 닿은 것은 복종의 자세, 다곤이 하나님께 굴복한 모양새다.

블레셋 사람들은 ‘우연한 사고’로 여겼다. 그래서 다곤을 다시 일으켜 그 자리에 세운다. 하지만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또다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뚱이만 남았더라”(4절), 이번에는 머리와 두 손목도 끊어졌다. 박살 난 셈이다. 신상의 머리가 잘렸다는 것은 생각이 없는 신이라는 뜻이고, 두 손이 잘렸다는 것은 다곤이 무기력한 우상일 뿐이라는 뜻이다.

블레셋의 오판을 보며 우리를 돌아본다. 우리도 오판하고 함부로 행동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또 죄를 범하고도 실수로 여기고, 누구나 그럴 수 있다며 가볍게 여기는 경우도 많다. 조심해야 한다. 블레셋처럼 혹독한 대가를 치룬 후에 뒤늦게 후회하지 말고 정신을 차려야 한다. 뻘짓에는 은혜가 없기 때문이다. 뻘짓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사고 뒤늦게 후회한 블레셋을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

여호와의 손이 때렸다

사무엘상 5장의 또 하나의 중심 단어는 ‘여호와의 손’이다. 4번 나오는데 그 손이 ‘엄중하다’고 했다. 그래서 그 손이 언약궤를 따라가며 언약궤를 두는 지역마다 초토화시킨다.

여호와의 손이 언약궤 옆의 다곤 신상을 친 것은 물론 아스돗 전역을 독종(emerods)으로 쳤다. “여호와의 손이 아스돗 사람에게 엄중히 더하사 독한 종기의 재앙으로 아스돗과 그 지역을 쳐서 망하게 하니”(6절), 다곤 신상을 섬기는 지역의 주민들까지 다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었다는 뜻이다. 성경은 여호와의 손이 ‘때렸다’(smote)고 했다. 징벌하셨다는 말씀이다.

당황한 블레셋 사람들은 긴급 대책회의를 소집해 언약궤를 아스돗에서 가드로 옮기기로 결의한다. 가드에는 다곤 신당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결의했지만 그 또한 뻘짓이었다. 이스라엘의 신이 다곤 신상으로 인해 진노한 것으로만 여긴 것은 아직도 자기들이 뭘 잘못했는지를 모르는 어리석음이며, 언약궤를 노획물로 삼아 승리를 즐기고 싶어 하는 미련일 뿐이다.

여호와의 손은 가드에서도 움직인다. “그것을 옮겨간 후에 여호와의 손이 심히 큰 환난을 그 성읍에 더하사 성읍 사람들의 작은 자와 큰 자를 다 쳐서 독한 종기가 나게 하신지라”(9절). 언약궤를 아스돗에서 가드로 옮겨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자 했던 블레셋 방백들의 노력은 오히려 더 큰 재앙을 불러오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재앙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모면하고 해결해 보려는 시도는 그저 어리석고 무모한 짓이라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난 셈이다.

블레셋 방백들은 이번에는 언약궤를 에그론으로 보내기로 결정한다. 언약궤가 에그론으로 옮겨지자 에그론도 쑥대밭이 되었다. 그때 에그론 사람들의 반응이다. “에그론 사람들이 부르짖어 이르되 그들이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와 우리 백성을 죽이려 한다 하고”(10절), 사람들이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는 것이다.

그렇다. 인간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주관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우상을 섬기는 자들과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조롱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게 된다. 블레셋 사람들을 보라. 뻘짓하다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남은 자들은 죽음의 공포를 느낀다. 그만큼 하나님의 진노는 무서운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뻘짓에는 은혜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뻘짓이 아니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최우선으로 여기며 살아야 한다. 블레셋 도처에 비상이 걸렸듯이 지구촌은 지금 비상 상황이다. 몇 년 전 코로나19로 힘들었던 지구촌은 지금 곳곳에서 기후 재앙(氣候災殃)으로 말미암아 죽음의 공포를 느낀다. 지구학자들은 코로나19가 두려운 수준이었다면 기후변화(氣候變化)는 인류 멸절 수준이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단순한 경고가 아니다. 물 폭탄과 폭설, 그리고 폭염 등 역대급 기상이변이 속출하고, 지진도 끔찍한 수준으로 계속되며 지구의 심술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기후학자들은 앞으로의 세계는 기후변화로 인해 지금이 그리울 것이라고 한다. 마지막 때가 임박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은혜로 재무장해야 한다.

돌려보내기로 하다

사무엘상 5장의 또 하나의 중심 단어는 ‘보낸다’는 것이다. 다곤 신이 박살 나고 지역에 독종 재앙이 임하자 블레셋은 언약궤를 아스돗에서 가드로 보내고, 가드에서도 독종이 돌자 언약궤를 가드에서 에그론으로 보냈는데 에그론마저 난리가 나자 블레셋 방백들은 급기야 언약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기로 결의한다. “이에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 모든 방백을 모으고 이르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어 그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와 우리 백성이 죽임당함을 면하게 하자 하니”(11절).

10절의 “우리와 우리 백성을 죽이려 한다 하고”라는 말씀과 11절 뒷부분의 “온 성읍이 사망의 환난을 당함이라”고 한 말씀, 그리고 12절의 “죽지 아니한 사람들은 독한 종기로 치심을 당해 성읍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더라”라고 한 말씀을 볼 때 언약궤를 노획한 그들의 뻘짓은 죽음을 부른 끔찍한 죄악이었다.

돌이켜보면 언약궤가 옮겨질 때마다 그곳에 내려지는 심판은 더 강해졌었다. 아스돗과 가드에서는 사람들이 독종 재앙으로 인해 고통만 당했던 것에 비해 에그론에서는 독종으로 사망자가 속출하기까지 했다. 언약궤를 블레셋으로 가져온 것이 화근이지만 어찌하든 노획물로 즐겨보려고 언약궤를 가드로 옮기고 에그론으로 또 옮긴 그 고집이 두고두고 후회할만한 뻘짓이 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게 블레셋만의 문제일까? 아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어리석기가 다 도긴개긴이다. 블레셋처럼 당해야 정신을 차릴 것인가? 안 된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이미 늦은 것, 회개만이 살길이다. 그리고 회개는 빠를수록 좋다. 뻘짓에는 은혜가 없음을 기억하고, 회개하고 은혜 가운데 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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