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욱 교수
신성욱 교수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아는 지식이라 말할 수 있다. 성경은 각 개인을 위한 영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누구든 최고로 관심을 가지고 성경을 대해야 한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마 11:12)라는 말이 있다. 내 개인 경험상 천국뿐 아니라 성경도 침노한 자의 것이더라. 계속해서 침노하고 또 침노해야 한다.

그 침노하는 최고의 방법은 무엇일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오늘날 신앙의 세계에서 진정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은 언제나 ‘깊은 질문’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은 늘 질문하는 자를 통해 새로운 통찰을 열어 주셨고, 질문하지 않는 자에게는 이미 알고 있는 만큼만 머물도록 내버려 두셨다. 따라서 AI 시대일수록,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정보가 아니라 ‘더 깊은 질문을 던지는 능력’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질문을 요구하는 책이다. 예수님의 비유도, 기적도, 구약의 사건들도 단순히 외워두라고 기록된 것이 아니라, “왜 이런 방식일까?”, “이 사건에서 하나님은 무엇을 드러내고자 하셨을까?”라는 질문을 통해 의미가 열리도록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성경 공부의 깊이는 ‘질문의 깊이’에 비례한다. 같은 본문을 읽어도 어떤 사람은 단순한 사실만 이해하는데 그치지만, 다른 사람은 질문을 통해 새로운 차원의 의미를 발견한다.

예를 들어 보자. “예수님께서는 왜 제철도 아닌 무화과나무의 열매가 없다고 저주하셨을까?” 이 질문 없이 본문을 읽으면 버틀란드 러셀처럼 “시장하신 예수님이 주린 배를 채우지 못하셔서 열매의 철도 되지 않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다. 이런 자가 어찌 메시아라 할 수 있나?”라고 비판할 위험이 있다. 그러나 질문을 던지면 관점이 달라진다. 예수님의 초점은 무화과나무의 열매 없음에 있지 않고 ‘잎사귀만 무성함’에 있었다.

예수님께서 열매가 없음에도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처럼 ‘외식으로 가득 찬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적하려 하셨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오랜 질문 끝에 본문이 상징하는 영적 메시지가 보이기 시작함을 몸소 경험하게 되었다.

또 다른 예를 보자. “가나 혼인 잔치에서 왜 예수님은 빈 포도주 통이 아니라 마실 물을 넣는 통이 아닌 결례통에다 물을 채우라고 하셨을까?” 그저 기적을 행하시기 위한 도구라면 포도주 통을 사용하면 되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굳이 ‘유대인의 정결례에 쓰던 돌항아리’를 선택하신 이유가 뭘까?

이 질문을 던지면 그 사건이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낡은 종교 체계에서 새 은혜로 옮겨가는(대체하는) 상징적 선언’임이 드러난다. 결례통은 율법의 정결을 상징하고, 그곳에 부어진 물이 포도주로 변했다는 것은 은혜의 시대가 열리는 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대체’의 의미를 던지기 위해선 떨어진 포도주 통에다 물을 부으라 하실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또한 깊은 사색의 결과로 낳은 질문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드러난 의미였다.

이처럼 차별화된 질문은 성경을 살아 있는 말씀으로 경험하게 만드는 열쇠다. AI로 인해 지식의 양은 폭발적으로 늘어났지만, 지식의 깊이는 여전히 질문하는 자에게만 열린다.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싶은 마음은 결국 이렇게 묻는 데서 시작한다.

성경을 읽다 보면 질문거리들이 너무 많이 생긴다. 출애굽기 2장에는 3개월 숨겨온 아기 모세를 갈대 상자에 담아서 나일강 갈대 사이에 두는 얘기가 나온다. 그 본문에 보면 모세의 어머니와 누이 미리암에 대한 얘기는 나오는데, 아버지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또 사사기 11장에는 입다의 딸이 죽었다는 얘기가 원문에 없는데, 어째서 대부분이 그녀가 번제물로 태워 죽임당했다고들 말하는 것인가?

성경은 단순한 지식의 책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건네신 대화의 책’이다. 때문에 성경을 읽는 우리는 그분과의 대화를 위해서라도 자꾸 물어야 한다. 질문이 없다면 대화는 멈추고, 지식은 늘지 않고, 성장은 정체된다. 그러나 남들과는 차별화되는 깊은 질문을 던지면 성경은 깊이 숨어 있는 진미를 드러내며 우리를 성숙으로 이끈다.

AI 시대에도, 아니 오히려 AI 시대이기 때문에, ‘질문력’은 신앙인의 필수 능력이다. 누구나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여는 질문은 꼼꼼하고 세밀하고 수준 높게 질문하는 자만이 얻는다.

결국 성경을 깊이 이해하고 믿음의 지혜를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많은 해설집이나 강의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진지하게 묻고자 하는 태도, 그리고 말씀 속에서 숨은 뜻을 찾고자 하는 치열한 질문력이다.

질문하는 신앙이야 말로 살아 있는 신앙이며, 질문하는 성도가 결국 깊이 있는 성도로 자라난다.

AI가 지식을 대신 정리해 주는 시대일수록 우리는 하나님께 더 정직하게, 더 열렬하게 물어야 한다. “주님, 이 사건 속에서 무엇을 말씀하시나이까?” 이 질문 능력이야말로 AI 시대에도 결코 대체될 수 없는, 신앙인의 가장 강력한 무기임을 놓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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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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