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훈 교수
김정훈 교수

‘빠던’(Bbaddun)이 인기다. 표준어도 아닌 이 한국 단어가, 유튜브 뿐 아니라 ESPN, CBS 등의 뉴스를 통해 미국 전역에 소개되는 장면이 반갑고도 낯설다. 이미 트위터 상에서도 한국말 '빠던'을 영어식으로 표기하여 'bbaddun'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미국인도 적지 않다. 팬데믹 일상 중에 아시안인 나를 바라보는 일부 미국인들의 불편한 시선들과 심지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지나가는 무례함에도 더는 마음 상하지 않을 만큼 익숙해졌다. 이런 상황 중에 '빠던'에 대한 미국인들의 뜨거운 반응이 무척 신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현상은 지난 5일 열린 한국 프로야구 개막식에서 한 선수가 평소처럼 배트를 던진, 아주 일상적인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ESPN은 무관중으로 시즌을 시작한 한국 프로야구(KBO)의 중계권을 사서 개막 첫 경기를 중계했는데, 생소한 한국의 야구 문화가 미국인들에게 소개된 것이다. 현재 많은 미국의 야구팬들은 '빠던'을 비롯하여 '치맥', '피자 대형 광고판' 등 낯선 한국의 야구 문화를 즐기느라 기꺼이 늦은 밤까지 시차를 감수하고 있다. 낯설고 다른 한국의 문화가 그들에게 불편이 아니라 즐거움이 되고 있다.

'빠던'은 일명 '빠따(배트) 던지기'의 줄임말이다. 타자가 홈런이나 장타를 친 후 배트를 던지는 것을 의미하는데, 야구의 본고장인 메이저리그에도 '배트 플립(bat-flip)'이라는 정식 용어가 엄연히 있다. 미국에서는 배트 플립을 '상대 투수를 위협하는 비신사적인 행위'로 이해하고 이를 몹시 불쾌하게 받아들인다. 상대 투수를 도발하려 일부러 배트 플립을 하는 타자들도 있는데, 그럴 경우 다음 타석에서 투수의 위협구(beanball)를 각오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 야구는 정반대이다. 어떤 투수도 상대의 빠던을 불쾌하게 여기지 않으며, 관중들은 이 세레머니를 그 타자의 시그니처(signature)로 여겨 환호하고 즐긴다.

평소 아시아권 문화에 대해 상대적인 우월감을 보여 왔으며, 특별히 코로나로 인해 아시안에 대한 적대감을 감추지 않던 미국이다. 그런 미국이 자신들과 전혀 다른 한국의 야구 문화를 받아들일 뿐 아니라 '빠던(bbaddun)'이라는 용어까지 즐기는 것은 왜일까? 미국 내 한류 확산에 대한 분석이 본 글의 취지가 아니기에 자세한 내용을 다루지는 않겠으나, 그 배경에 대해 몇 가지만 언급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영화 '기생충'이나 'BTS'로 대표되는 한국 콘텐츠의 재미와 품질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팬데믹으로 인한 배송 지연을 감안하더라도 다른 라면과 달리 짜장라면만 두 달 가까이 마트에서 보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완판되는 것을 보면, 영화에 등장한 '짜파구리'의 파급력과 미국의 반응을 짐작할 수 있다.

둘째, 팬데믹으로 메이저리그 개막이 연기되면서 수많은 야구팬의 관심이 자연 한국 프로야구로 집중되었다. 메이저리그 대신 소비 대체재 정도로 여겼던 한국 프로야구가, 정작 야구라는 본연의 콘텐츠보다도 야구 파생 문화로 인해 더욱 상품성을 갖게 된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미국의 문화적 장벽이 높은 것이 현실이지만, 위 두 가지 조건이 맞물리면서 한국이라는 이문화(different culture)에 대한 적응 단계(문화 차이에 대한 부정, 방어, 최소화 단계)가 순식간에 생략되었다. 그 결과 미국인들은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문화 수용의 과정에 진입함으로써, 한국의 야구 문화를 받아들일 뿐 아니라 즐기고 있다.

이처럼 관점의 차이는 국가나 지역뿐 아니라 개개인에게 모두 존재하는, 매우 미묘하고도 단단한 부분이기에 쉽게 바뀌지 않는다. 사도 바울의 눈에서 비늘이 벗어지듯 새로운 사고의 방향을 수용하고 습득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또한, 시간과 노력이 모두 필요한 공동의 과정이며 특정한 환경과 상황 속에서 형성된다. 라인홀트 니부어가 "인생의 의미는 찾았다 싶으면 또다시 바뀐다"라고 말한 것은, 한 인간이 불변하는 절대적 관점을 가질 수도 없으며, 또 불변한다 여기더라도 실상 계속 바뀐다는 사실을 간결하게 정리해준다. 이런 관점에서 필자는, 펜데믹이라는 낯설고 불안한 시대를 수용하고 누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유익한 몇 가지 관점의 변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익숙함을 넘어 새로움을 즐기는 태도를 가져보자. 물론 이 부분은 타고나는 기질과 많은 상관이 있는 부분이지만, 개인의 노력에 따라 충분히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많은 경우 자신의 익숙함 뒤에 숨거나, 새로운 것 혹은 낯선 불편을 피하려 하는데 이것은 누구에게나 무척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하지만 이 자연스러움을 벗어내고 새로운 상황이 주는 긍정적인 면들을 낙관적으로 즐기려는 관점의 변화가 필요하다.

코로나로 인한 홈 오더(stay at home order) 기간 동안 거의 모든 대화의 화두는 '코로나'였고, 절대적으로 많은 경우 현실과 다가올 미래에 대한 비관의 내용들이었다. 그래서인지 '빨리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등 과거 지향적인 말을 통해, 현재의 낯선 상황과 불안한 미래를 피하고 과거라는 익숙함에 속하고 싶은 상대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확신할 수 없는 미래는 현재의 불안이 되고 이는 곧 과거의 익숙함을 그리워하게 한다. 때론 그 과거가 마냥 행복하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이처럼 익숙함에 안주하려 할 경우 현재의 즐거움을 찾는 일에는 마음을 쓸 여력이 없다.

코로나 초기에 '가계 수입이 줄거나 중단되었지만,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갖게 되어 귀하다'는 말들을 많이들 했다. 모두 진실이었을게다. 하지만 재택기간이 길어지자 가족 간에도 이 상황을 누리기는커녕 '지겨움'에 익숙해졌나보다. '코로나 이혼'이라는 신조어가 생길 만큼 가정 위기가 확대된 것을 통계로 확인할 수 있다. 온종일 집에서 좌불안석 어찌할 바 모르면서도 삼시 세끼 밥을 축내는 가장이 원수처럼 보인다는 아내의 말, 이 분위기를 아이들이 모를 리 있을까? '가족과의 시간'이라는 소중한 선물이 폭탄으로 변질된 것은, 공통적으로 변화된 상황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누릴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즐겨 보던 '쿵푸팬더'에서 "네가 익숙한 것만 하고자 한다면, 너는 결코 더 나아질 수 없다"고 말하는 우그웨이 대사부의 조언이 떠오르는 요즘이다.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이 지혜가 아니니라"고 교훈하는 전도자의 지혜를 받아들이자(전 7:4).

안타깝게도 현실은 '뉴 노멀(New Normal)'로 수렴되는, 경제와 사회 뿐 아니라 삶의 많은 영역에서 예전과 다른 국면을 맞고 있다. 예전과 똑같은 과거로는 돌아갈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니 받아들이자. 대신 이 상황에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즐기려는 태도를 가져보자.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신중함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철학자들이 본령으로 삼는 '새로운 관점의 채택과 해석'의 심오한 사고를 하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당금의 코로나와 같이 우리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의 변화 속에서는, 익숙함을 내려놓고 낯선 불편 속에서도 가치와 즐거움을 누리려는 적극적인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당장 가족과 함께 집 밖으로 나가 산책하며 대화하는 즐거움에서부터 시작해볼 것을 권한다.

이 즐거움을 누리는 데 필요한 것이 바로 오늘에 만족하는 삶의 지혜이다. 다른 말로 '오늘이라는 시간을 가치 있게 누리는 지혜'이다. 전도서 11장 9-10절이 말하는 바가 바로 이 Carpe Diem ("현재를 살아라")이 아니겠는가? 바로 사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누리기는 쉽지 않은 것을 볼 때, 이 교훈을 뻔한 명제라 무시하는 것은 교만이다(사는 것조차 쉽지 않다 여기시는 분들은 너그러이 맥락으로 이해해주시라). 이 지혜는 삶에 대한 관점의 변화가 그 핵심이다.

'팬데믹', '코로나 재난' 등의 무서운 말들이 당금의 키워드이다. 분명한 위기 상황이며 수많은 이들이 고통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사회가 그렇다 해서 나도 함께 두려워하기만 하며, 휴지와 고기 사재기에만 집착한다면 그것은 지혜로운 삶은 아닐 것이다. 랠프 월드 에머슨은 이런 삶의 모습을 두고 "우리는 언제나 살아갈 준비만 할 뿐, 정작 삶을 살지 않는다"라며 일침을 날린다. 당신이 미래를 위해 열심히 휴지를 구입하느라 흘려버린 오늘의 시간이, 정작 미래의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자는 재택근무를 시작할 때 '집에서 일하면서 가족과도 함께 할 수 있다'라는 큰 기대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언제까지일지 모를 이 기간에 몇 권의 책을 읽고 몇 개의 강의 녹화까지 마치겠다는 구체적인 목표와 일정을 수립해 놓았다. 하지만 사무실로 복귀하는 이 시점에 돌이켜보니, 계획에 대한 성취보다는 그 과정에서 받은 스트레스와 또 이를 가족에게 풀어낸 못난 내 모습이 마냥 아쉽기만 하다. 미래 일정 시점을 재단하여 목표를 수립하고 이루어 가는 과정 자체를 옳다 또는 그르다 판단할 수 없지만, '그 과정을 어떻게 살고 있는가'는 결과를 떠나 삶의 가치와 직결된 중요한 주제임이 분명하다.

"언제 이 상황이 진정되고 경기가 회복될까요?", 이 질문에는 미국의 대통령을 포함하여 그 누구도 확답할 수 없다. 확정할 수 없는 미래이기에 우리의 불안감은 명분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알 수 없는 미래를 위해 오늘을 불안하게 소모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일이다. '사는데 정답이 어딨어'의 저자 대니얼 클라인은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조금 모자라도 지금 있는 그대로를 즐기는 편이 낫다"고 말한다. 미래를 외면한 채 욜로(YOLO, you only live once)가 되라는 것이 아니다. 오늘을 가치 있게 보내야 한다는 지적을 수용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익숙한 우그웨이 대사부의 조언에 다시 한번 귀를 기울여보자

"Yesterday is history, tomorrow is a mystery, and today is a gift. That's why they call it the present."

이 글을 쓰는 내내 위 층에서 "붐~ 치카 라카 붐~" 하면서 알아듣기 어렵고, 몹시 시끄러운 음악에 맞춰 두 딸이 춤을 추고 있다.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함께 즐겨주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내 귀는 이 소음을 전혀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 아이들은 너무 좋아하는 이 음악이 내게는 작지 않은 고통이지만,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끝내 잘 참고 있다. 귀에 들리는 음악에 대한 선호도조차 바꾸기 힘든데, 가치와 사고의 관점을 달리 한다는 것은 얼마나 더 어려울까?

결론은 내 노력만으론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현실이 바뀌기를 바라는 미신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위기 상황이라는 현실을 사는 우리 곁에, 하나님이라는 절대자가 진정 함께 하고 계심을 믿는 믿음이 바로 우리의 희망이다. 게하시는 아람 군대라는 위기 상황을 현실적으로 직시했고 이로 인해 두려워했다. 하지만 엘리사는 믿음으로 게하시를 위해 기도했고, 하나님께서는 게하시의 눈을 열어 더 많고 강력한 하나님의 군대라는 실상을 보게 하셨다(왕하 6:15~17). 위기를 이기는 것, 두려움을 떨치는 것은 정신 승리가 아니라 믿음으로 실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에서 시작한다.

유례 없는 팬데믹의 낯설고 불안한 위기 가운데서도, 위기라는 현상이 아닌 하나님이 이 땅의 주인이라는 실상이 우리로 엘리사처럼 두려워하지 않을 눈을 갖게 한다(히 11:1). 그 눈은 일상이 바라보는 현상들이 아니라 험곡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신 일들을 기대하고 바라보게 하는 지혜의 눈이다. 긴 글에 피로한 여러분의 눈과 함께, 이 시대를 가치 있게 살며 하나님의 위로와 방향을 제시하는 지혜의 눈을 우리 주님께서 활짝 열어 주실 것이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8)"

아직 코로나는 끝나지 않았고 상황도 딱히 나아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 번쯤 밤잠을 포기하고라도 한국 프로야구를, 미국 방송으로 봐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야구가 아니라, 야구를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나를 더 행복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빠던'을 즐길 준비가 되었는가?

김정훈 교수(미드웨스턴 실천신학)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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