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복음주의협의회(회장 김명혁 목사)는 지난 10일 오전 영락교회(담임 이철신 목사)에서 피터 바이어 하우스(Peter Beyerhaus) 박사(전 튜빙겐대학 교수, 1980년 여의도 세계복음화 대성회 강사)를 초청, "나의 삶을 돌아보며 나누고 싶은 것들"이란 주제로 강연을 들었다. 다음은 그의 강연 전문이다.

피터 바이어 하우스(Peter Beyerhaus) 박사(전 튜빙겐대학 교수, 1980년 여의도 세계복음화 대성회 강사)
피터 바이어 하우스(Peter Beyerhaus) 박사(전 튜빙겐대학 교수, 1980년 여의도 세계복음화 대성회 강사). ©김명혁 목사 홈페이지

1. 십대까지의 경험

저는 1929년에 오더강 동편 동네에서 Siegfried Beyerhaus 목사님 부부의 첫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그 겸허함과 신실한 청지기로서의 삶으로 제게 큰 본보기가 되어주셨습니다. 아버지가 어릴 때부터 가르쳐주신 성경말씀은 제 신앙의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매우 낙관적이고 의지가 강한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저희를 무척 사랑해주셨습니다. 어머니는 우리를 경건하게 키우셨는데, 특별히 저녁에 집에서 예배를 드릴 때 어머니가 경건한 모습으로 "오 당신 예수여 당신의 날개를 나에게 펴주옵소서" 라는 찬양을 부르시면 우리 마음이 감동되었습니다.

훗날 제가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갔을 때 어머니는 제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주셨습니다. 그녀는 2015년 5월에 108세의 나이로 소천하셨습니다.

저는 제 인생에서 독재정권의 위협적 압력을 두 번 경험했습니다.

첫 번째는 1933년에 히틀러가 나타났을 때입니다. 10살이 넘으면 '히틀러 유켄트(나치당이 만든 청소년 단체)'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했습니다.

두 번째로는 교회안의 분쟁을 경험했습니다. 나치정권은 기독교에서 유대인의 요소가 제거되도록 기독교를 개조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이 요구에 대항하여, 그때부터 신앙고백이 있는 교회가 형성되었습니다. 저희 부모님들은 이 고백교회에 참석했습니다.

1938년에 아버지가 베를린에 교회 담임목사로 갔습니다. 아버지는 2차대전 도중에도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인내로 교회를 잘 섬기셨습니다.

1947년 6월에는 Bassewitz 백작부인이 나를 초청하고, 그녀의 막내아들 Bernd과 사귀어 달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 시간이 아주 좋았습니다. 승마를 배우고 호수에서 보트를 타고, 저택의 키 큰 나무에 기어오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개인 가정교사와 간호사로부터 교육과 케어를 받았습니다. Bassewitz 백작부인은 참 경건한 부인이었는데 잠자기 전이면 언제나 침대로 와서 기도해주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우리 가족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1943년 우리는 폭격을 피해 베를린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오더강가의 옛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소련 군대가 그 근처를 침공했을 때 우리는 거의 생명을 잃을 뻔 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동생들을 데리고 함부르크로 피신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Saxony로 갔습니다. 내 베를린 학교 친구들과 함께 엘베강가에 있는 성으로 피신했습니다. 1945년 2월 13일 밤, 우리는 드레스덴을 융단폭격하는 붉은 불빛을 멀리서 보았습니다. 우리 캠프의 리더와 독일어 교사는 나치당의 일원이었습니다. 그는 우리 앞에서 성경을 조롱했습니다. 그는 저녁시간에 제가 성경을 읽는 것을 발견했고, 저는 그와 엄청난 논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논쟁하는 동안 아무도 저의 편에 서지 않았고 저는 혼자서 이 싸움을 감당해야 했지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소련군으로부터 달아나야 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든 베를린의 집으로 가려고 필사적으로 걸었습니다. 폭격으로 폐허가 된 드레스덴을 지나가다가 소련군에 붙잡혀 3일동안 억류되었습니다. 자칫 시베리아로 갈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소련군은 16살밖에 안된 저를 시베리아로 보내지 않고 집으로 돌려보내주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보호였습니다. 그 이후 저는 전 생애동안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2. 신학공부 기간의 경험

고등학교를 졸업한 저는 신학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히브리어 시험에 합격을 했고 독일과 다른 도시에서 9학기동안 신학공부를 하였습니다. 한학기는 스웨덴 웁살라에 방문학생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후일 제 박사학위 지도 교수가 된 BengtSundklerT.D.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분과 성경의 구원론적 구속역사를 나누고 공유했는데 이는 제 신앙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특별히 제 선교신학을 형성하는데 이분의 영향이 컸습니다. 그때 쓴 책이 한국말로도 번역되었습니다.

저는 1955년 1월 15일에 베를린의 주교인 오토 디벨리우스에게 안수를 받고, 1955년 8월 6일에 약혼자의 고향마을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 다음해에는 영어공부를 위해 영국 옥스퍼드에서 한학기를 보냈습니다. 1956년 여름, 스웨덴에 돌아온 후로는 노르셰핑에서 몇 개의 지역교회를 섬겼습니다. 거기서 첫 딸 카롤리나가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웁살라 대학에서 박사학위의 마지막 부분을 공부했습니다. 박사논문의 제목은 "The independence of young churches as a missiological problem" 였습니다.

이 공부는 훗날 남아프리카에서의 선교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1957년 1월 6일에 제 저희 부부는 아프리카선교사로 파송을 받았습니다. 아프리카 선교는 두 개의 아프리카 공용어를 공부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Transvaals의 중심인 Lobethal에서 언어공부와 문화공부를 계속하였습니다. 집주인과 함께 성경과 기도 안에서 영적인 교제도 나누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Transvaal Mission brotherhood"이 조직되었다. 이로부터 이방종교를 지배하는 사탄과의 내적인 전쟁을 감당할 영적인 힘과 양식을 얻게 되었습니다.

1958년에 둘째 요하네스가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몇주 후에 북트란스발의 Blauberg으로 이사하였습니다. 그곳은 짐바브웨 근처인데 이방종교 종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우리 부부는 2년간 선교사역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라탈에 있는 루터신학교 교수로 가게 되었습니다.

3. 선교지에서의 영적인 투쟁

트란스발 북쪽 사람들은 거의 기독교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전통적인 아프리카 종교에 깊이 빠져있었습니다. 우리가 선교하는 교회 교인들도 애니미즘의 영향을 깊이 받고 있었습니다. 교인의 대다수가 몰래 조상숭배와 마술을 숭배했습니다. 나는 동료선교사인 Peter Sandner 와 함께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했습니다.

두 연구 그룹을 만들었는데 한 그룹은 크리스천의 조상숭배에 관한 것을 조사했고, 한 그룹은 미신과 마술 등을 조사했습니다. 우리는 노회에 우리의 연구결과를 보고하였습니다. 이는 큰 분란이 되었습니다. 그분들이 죄의식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교회 내에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후에 줄루지역에 루터교 신학대학에서 강의를 했는데, 그 신학교 학생들도 역시 자기들의 전통적인 미신과 마술을 숭배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계속 강의하고 토론했습니다. 학생들은 미신적인 방법으로 자기들을 보호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때 귀신의 실체가 모호한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존재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4. 튜빙겐 교수시절

1965년 말에 9년 동안의 선교사역이 끝났습니다. 남아프리카는 제게 두 번째 고향과 같았기 때문에 떠날 때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두 가지 마음이 교차했는데, 아프리카를 떠나는 것이 슬프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유명한 튜빙겐 대학의 교수로 초청을 받은 것에 자긍심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교수사역은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교수자리라는 것이 지극히 학문적인 것이라는 것에 좌절감을 느꼈습니다. 독일대학에서 가르치는 신학은 역사적 성경 비판학에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제 확고한 신념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튜빙겐 대학 다른 교수들과의 사이가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스와비아 경건주의자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환영을 받으며 마음의 위로를 얻었습니다.

5. 에큐메니칼과 복음주의의 대치

1968년 8월에 제4차 WCC 총회가 웁살라에서 개최됐습니다. 저는 대회를 위해 준비된 문서들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는데, 에큐메니칼 운동의 방향이 너무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WCC와 갈등하며 제 인생에 또 하나의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특별히 2가지 논란이 되는 문제를 반대했는데, 하나는 '타종교와의 대화'에 관한 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인종차별' 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타종교와의 대화에 있어 WCC는 기독교 외의 종교도 구원의 길을 제시해준다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복음을 전할 이유가 없습니다. 또한 WCC는 인종차별을 없애기 위해 무력투쟁을 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WCC의 이 두 가지 Agenda는 성경과 신학과 교회에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복음과 성경을 지키려는 사람들과 함께 1970년 10월 '선교위기에 대한 프랑크프루트 선언'을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환영했지만, 강력한 반대의사를 표명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Frankfurt's statement(FS)가 불분명한 근거를 가지고 교회를 분열시키려고 한다고 비난하였습니다. 저는 '교회를 분열시키려는 자'로 지목되었습니다.

제네바의 WCC 지도자들은 FS문제로 저를 공개적으로 공격했습니다. 그들은 저를 에큐메니컬 운동의 적이라고 불렀습니다(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그들이 주장하는 것과 다른 종류의 에큐메니즘, 즉 예수님 중심적이고 선교적인 에큐메니즘을 원했을 뿐입니다.

독일에 있는 다른 선교단체의 리더들은 FS를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이 선언은 한국말을 비롯하여 전세계의 언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이렇게 에큐메니컬와 복음주의가 대치하는 양극적 상황에서, 저는 이 문제로 남아프리카에서 같이 동역하던 친구를 잃기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WCC입장에 반대의사를 표명했기 때문에 많은 고통을 당하고, 순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이런 고통을 당한 분의 대표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6. 에큐메니컬 대회에서의 저의 경험들

저는 국제대회나 컨퍼런스, 협의모임에 늘 참석했습니다. 이 국제대회는 에큐메니컬 측에서 조직하기도 하고 복음주의자들이 조직하기도 하였습니다. 인상적인 대회는 1972~1973년에 개최된 방콕대회입니다. 저는 거기서 WCC의 사무총장이었던 Philip A. Potter와 날카롭게 대치하였습니다.

가끔씩 사람들이 '그동안 받은 많은 공격들을 어떻게 견뎌 냈는지' 저에게 묻습니다. 물론 FS를 발표한 일로 인해 거짓말쟁이로 비난받는 것이 쉽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비난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저의 입장을 지지하고 함께 해 주었습니다.

7. 6대륙으로의 여행들

제가 먼 나라들로 여행을 다녔다는 것은, 그만큼 저의 가족에게 아버지의 자리가 비어있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아내가 고생이 많았고 아이들은 아버지와 함께 할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6대주를 다 다녔는데 동쪽으로는 오스트레일리아까지 서쪽으로는 캐나다까지 다녔습니다. r그 중에서 제일 많이 방문한 곳이 한국입니다. 벌써 15번째 방문했습니다. 제가 한국을 좋아하는 이유는 2가지입니다.

첫 번째로, 저는 '어린 교회의 독립성'을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위해 연구하며, 한국을 처음 접했습니다. (한국교회가 스스로를 돌보며 독립적인 사역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자발적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나라였습니다.

제가 한국을 좋아하는 또 한가지 이유는, 제가 튜빙겐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제 밑에서 박사학위를 한 한국학생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저를 여러번 한국에 초청해준 이동주교수가 그 중의 한명입니다. 1982년에 아내와 함께 한국에서 1년을 지냈는데, 그때 많은 한국 친구를 사귀었습니다.

그때 슬프게도 북한은 방문하지 못했습니다. 2015년 가을에 북한에 가려고 계획했었는데 제 의사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북한의 의료시설이 열악한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 북한 방문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순교당하면서도 신앙을 버리지 않는 지하교인들이 북한에 있기 때문입니다.

남한의 기독교인들은 통일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남한 사람들은 1990년 독일의 통일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때 많은 기도를 했습니다.

북한의 수도인 평양은 1906년에 한국교회 부흥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중국에서 평양을 떠났던 많은 선교사들이 지금 북한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습니다. 또 기독교인을 위한 지하대학도 있다고 합니다. 저에게는 '핍박받은 기독교인들과 교회'에 대한 것이 오랜 세월 기도제목이었습니다. 또한 신앙고백이 있는 공동체의 국제대회들도 역시 기독교인들이 받는 핍박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2006년에 신앙고백이 있는 공동체 대회의 메인테마는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당하는 세계공동체" 였습니다. 그때 많은 나라에서 일어나는 순교가 감명깊게 나타났습니다. 당시 발표한 마지막 선언문의 타이틀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을 준비를 하자" 였습니다.

8. 나의 은퇴

저는 지난 30년동안 신앙고백이 있는 공동체를 섬기는데 온 힘을 다했기 때문에 1997년부터는 교수자리에서 물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신앙고백이 있는 공동체 회의의 명예회장으로 계속 섬겨왔는데, 그 투쟁의 마지막은 '젠더 이데올로기'에 대한 것입니다.

1995년 베이징 세계여성대회 이후에 매우 위험스러운 움직임이 생겨났습니다. 그것은 '젠더'라는 모토 아래 형성되었는데, 이는 현대의 유행어가 됩니다. 그 대회 이후 젠더 이데올로기는 하나의 이념이 되었습니다. 이 문제를 주시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대단히 큰 위협입니다. 그래서 2014년 10월에 제가 이 젠더이념에 대해 반대하는 호소문을 작성했습니다. 이 호소문은 곧 여러나라 말로 번역이 되었는데 특별히 한국에서는 중요한 여러개의 기독교 잡지에서 이것을 출판했습니다.

이번 저의 한국방문의 제 가장 중요한 관심사 또한 한국에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젠더이념이 얼마나 위험한지 경고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의 발표를 8개의 항목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어려서부터 성경을 사랑함

2. 부모님께 받은 기독교적 교육

3. 크리스천의 결혼과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

3. 영적인 삶을 유지하는 것의 중요성

4.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에 대한 순종

5. 계속적인 영적 전쟁을 받아들이고 감당함

6. 교회의 에큐메니컬의 깊이를 경험

7. 핍박받은 기독교인들의 고통의 간증에 참여함

디모데후서 4장 1~5절을 읽으면서 마치겠습니다.

1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한국복음주의협의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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