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영삼
▲백석대 채영삼 교수

주보에 헌금을 한 성도들의 명단이 오르는 교회들이 많다. 매주 올라온다. 항목도 다양하다. 십일조, 감사헌금, 선교헌금, 절기헌금, 건축헌금, 등등.

낸 사람과 내지 않은 사람이 항상 갈린다. 주보를 보았을 때, 거기부터 확인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낸 사람들일 것이다. 당당하지 않을까. 하나님 앞에 당당할까, 목사님이나 다른 성도들 앞에 당당할까.

내지 않은 사람들도 볼까. 내지 않은 사람들은 어떨까. '나는 이류신자야.' 그렇게 느끼지 않을까. 그 리스트를 확인한 다른 성도들은, 그 리스트에 없는 그 성도를 어찌 볼까. 성도의 교제가 될까.

왜, '각자 믿음을 따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풍성하고, 기쁘게 하라'는 그 헌금을, 이토록 '의의 기준'으로 변질시켰을까. 언제부터일까. 성경적일까. 교회전통에 맞을까.

어떤 교회들은, 헌금자 명단을 헌금 기도 전에 읽어주기도 한다. 아마, 오래 전 절에서 그리했을 것이다. 아마, 공을 빌어주던 무당집에서 해오던 전통일 것이다. 성경적 교회에 그런 전통이 있었는가.

현실을 모른다 할지 모른다. 안 써주면 안낸다고 말이다. 그러면, 그것이 성도의 '의'를 자극하는 외식적 신앙을 키우지 않을까. 성도끼리 '의의 자랑과 경쟁'을 부추켜서 실은 참된 교제를 방해하지 않을까. 오히려, 공동체성을 깨뜨리지 않을까.

다른 방법은 없을까. 꼭 주보로 확인시켜주어야 할까. 믿음의 분량대로 하게하고, 확인은 다른 식으로 하는 방법이 없을까. 총액만을 기록하고, 부족한대로, 더 낼 수 있는 사람들이 더 내도록 공동체성을 강조하는 방식은 없을까.

성도들에게 '믿음을 따라, 자원하는대로, 힘써, 기쁘게 하라'고 하면, 성도들은 정말 헌금하지 않을까. 참으로 말씀이 정직하고, 은혜와 공의가 넘치고, 깨끗하고 긍휼이 충만한 교회라면, 그렇게 바르게 가르치고 배울수록, 점점 더 열린 마음으로 힘써 내지 않을까.

항상 체크해야하고, 율법적으로 견제해야 하면, 어린아이라면 몰라도, 그 신앙이 정말 장성한, 진실한 신앙으로 성장할까.

원래 성경적 전통대로라면, 수입의 20% 이상을 하나님 백성과 그의 일 그리고 가난한 이웃을 위하여 흘려보내는 것이 기준이다. 그렇게 살도록 가르치면 되지 않을까. 하나님의 긍휼을 깨닫고 성장하는 대로, 더욱 힘써 더 많은 것을 이웃에게 흘려보내도록 성장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닌가.

참된 사랑은 진실함에 기초한다. 진실함에는 자랑이 필요치 않다. 인정도 필요 없다. 신앙이 진실할 수 있다는 전제를, 교회가 갖고 있는 것일까. 교회는 하나님의 진실하신 사랑, 성도의 진실한 사랑을 믿고 있는가.

교회는 헌금에 관련해서, 성도를 믿는가. 말씀대로 믿는가. 모험 없는 사랑, 신뢰 없는 사랑은 없다. 그런 사랑은 있다 해도 의미가 적다. 참된 성장은 진실한 사랑에서 오지 않는가. 그래서 주께 드리는 일을 '믿음으로 하라'고 하신 것이 아닌가. 믿음이 있는가.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마 6:3-4).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채영삼 #채영삼칼럼 #채영삼목사 #채영삼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