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노
▲푸른교회 조성노 담임목사

제목만 봐서는 봄의 감성쯤으로 생각하시겠지만 실은 금주에 있을 <총선> 얘깁니다. 이런 고백이 저의 인품 관리에 그리 도움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굳이 밝히자면 저는 아직도 제가 사는 지역 선거구의 현역 국회의원이 누군지도 모릅니다. 저의 무심함과 정치적 냉소주의가 이런 최소한의 민주시민의 양식마저도 등한히 하게 한 주범이라 하겠습니다만 이미 고등학교 시절부터 전국 국회의원들의 지역구까지도 좔좔 외던 제가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정치에 흥미를 잃었는지는 사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지난 회기 4년만 놓고 보더라도 <그래도 국회가 있어야지>하는 국민들보다는 <차라리 국회가 없는 게 백번 낫다>는 국민들이 훨씬 더 많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정치나 국회가 그만큼 우리 국민들의 절망의 대상이었다는 겁니다. 물론 이런 불행한 현실에 대해서는 한국 정치의 구조적인 문제와 더불어 의원 개인의 자질과 소양, 그 양쪽에 다 책임을 물어야겠지만 저와 같이 정치 허무주의에 빠진 유권자들 또한 그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고 보는 게 옳지 않을까 합니다.

지금도 적지 않은 국민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무관심과 기피증을 <그게 더러워서 피하는 것이지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로 자위하며 합리화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섣불리 가세했다가 자칫 더 큰 실망과 좌절을 자초하느니 차라리 적당한 자리로 피신해 정세를 관망하는 쪽이 낫다는 주장도 전술적으로는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그런 태도와 논리에는 하나의 중대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즉 지금보다 판이 더욱 더러워져서 마침내는 더 이상 어디 피할 곳조차 없어지는 최악의 상황이 오면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겁니다. 보십시오. 아무리 꼴 보기 싫은 곳이라 해도 국회에서 제정하는 법률이라는 것이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삶에 얼마나 막강한 권세를 떨칩니까. 요컨대 우리의 생활과 현실이 국회가 생산하는 그 입법의 제약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국민의 모든 삶의 규범이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그들의 의정 단상에서 처리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들이 만들어 놓은 법의 결정을 거부하기라도 해 보십시오. 경찰들이 달려가고, 감옥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매양 그 <더러움>을 피하기보다 의무감을 발동해서라도 애써 투표에 참여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링컨이 <밸럿(투표)이 불릿(탄환)보다 더 무섭다>고 한 것도 다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니겠습니까? 마르크스는 투표를 <피지배자들에게는 수년에 한 번씩 그들을 지배하고 압제하는 인물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허용 된다>는 말로 비웃었지만 그 말도 영 틀린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선거가 정녕 마르크스의 조롱처럼 국민의 새로운 압제자를 뽑는 행사일 수 없다면 모두가 힘껏 이 한 표 행사에 나서야 합니다. 사전에 뽑지 않는 게 나중에 몰아내는 일보다 쉬운 일이라면 기권도 권리라는 말로 회피하기보다 모두가 적극 동참하는 게 옳습니다.

<한 마리의 제비가 왔다고 봄이 오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Ethica Nicomachea)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최초로 도덕적 원리인 <선>(善)을 학문적으로 규명한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한 마리의 제비가 봄을 다 물고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봄은 어차피 한 마리의 제비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부디 금주 수요일, 한 마리 한 마리의 제비가 이 땅에 아름다운 봄, 더욱 밝고 화사한 봄을 가져왔으면 좋겠습니다.

/노나라의 별이 보내는 편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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