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영삼
▲백석대 채영삼 교수

위안부문제에서 진정 회복되어야 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인간됨’이다. 단순히 보상이나 배상의 문제가 아니다. 잘 사는 문제, 정치 외교 문제도 실은 그것을 위해 있다.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해주는 것이 정치이고 외교 아니겠는가. 한 국가의 시민으로서도, 열방들 앞에서 멸시받지 않고 오히려 세계 시민들에게 이것이 사람답게 사는 나라의 모습이라는 것을 보여주며 또 그런 영향력을 끼치며 살 때에 선진국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더욱, ‘타결’은 회복이 아니다. 타결은 돈으로 끝날 수 있다. 하지만 조선의 딸들, 군수공장 간다고 따라갔다가 청춘을 짓밟히고 또 더럽혀진 여자라고 조선의 남자들에게도 버림받았던 우리 누이, 동생, 어머니들은, 타결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그 존엄성을 되찾고 싶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들의 인간성을 처참하게 짓밟아 짐승의 자리로 떨어진 저들의 인간성도 회복되어야 한다. 그것이 문제의 해결이다.

과연 한국 정치가 인간의 존엄을 제도로 온전히 실현할 만큼 성숙해져 있다고 믿지는 않지만, 그래서 정치가 더욱 성숙해지고 또한 성숙한 정치가들이 등장할 때까지, 이 문제는 타결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돈 백 억을 던져주고 할 일을 다 했다고 믿게 두면, 가해자는 영원히 짐승의 굴레를 벗지 못한다.

아래 사진을 보라. 저 장면은 피해자가 회복되는 장면일 뿐 아니라, 가해자가 참으로 인간의 얼굴을 되찾는 치유와 회복의 장면이다. 거기에는 감동이 있다. 우리가 함께 사는 이 세상이 단지 정글이고 전쟁이지만은 않다는 일말의 희망과 위로, 인간됨의 위대함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정치와 외교란 야합과 힘겨루기, 혹은 이익의 담합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로 인간됨의 강력한 발현이기도 해야 한다. 그럴 때에 비로소 ‘성공적인 외교 업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위안부 문제는 참으로 타결된 것이 아니다. 여전히 피해자의 인간적 존엄성은 짓밟힌 상태이고, 가해자 역시 사람의 마음을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본을 위하여서라도, 이웃을 진정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타결은 미루어져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다. 이웃 사랑도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진정한 타결을 위한 ‘정의’란 피해자뿐 아니라 가해자의 파괴된 인간성도 회복시키는 ‘회복적 정의’여야 한다. 그래서 이번 타결은 타락의 연장이다. 어느 쪽도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일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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