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규 목사
▲이선규 목사ㅣ금천교회

[기독일보 이선규 목사] 요즘 전직 대통령을 위시해서 00기념사업회 00기념회도 많이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얼마 못가서 시들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 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기념 할만 하다의 말씀에 대하여 신학적인 측면에서 세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 다 같이 배워야 할 말씀이요
둘째: 다 같이 본 받아야 할 말씀이요.
셋째: 다 같이 실천해야 할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사건을 둘러싸고 예수님과 제자들의 견해 차이로 논란도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의 견해는 아주 어리석은 행동이고 낭비하는 것 값진 보배를 낭비하는 것으로 보고 비난도 하고 책망도 하였으나 예수님의 견해는 아주 잘한 것이요. 그가 힘을 다하여 주님의 장사를 예비한 것이라고 선언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름도 알 수 없는 여성도의 신앙은 영원히 기념할 만한 믿음 이라는 사실 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 여인이 부운 향유는 조금 부은 것이 아니라 전부를 부어 드렸다는 점이고 가짜가 아니라 진짜 향유라는 것입니다.

이 광경을 보신 주님께서는 이 여인의 봉사야 말로 가장 아름답고 완전한 선행이라고 칭찬 하셨습니다.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나의 장사를 미리 준비 하였느니라”

다른 말로 말하면 이 여인에게는 허위의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라든가 남에게 칭찬을 듣기 위해서 하는 허위의식이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행위‘는 사람의 눈을 의식해서 예수의 머리에 부어 드리는 것이라면 진짜 향유가 아닌 가짜를 드릴수도 있습니다. 또한 향유가 가득 들어있는 옥합을 완전히 깨어 받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부어 드린 향유는 순전한 향유 옥합 채 깨뜨려 드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진실을 보시고 말씀 하시기를 저를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여기 ‘좋은 일’이란 단순히 선한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영원히 기념 할 만 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가장 어려운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하나씩 예수님을 떠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주위에는 무서운 전율이 감돌고 있을 때였습니다. 아무도 예수님께 가까이 하는 것을 꺼리는 때였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정승이 죽으면 문상객이 없어도 정승집의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성시를 이룬다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계산에 능해서 이해가 없는 듯싶으면 냉정하게 된다는 말인 줄 압니다. 위기에 처해있는 주님에게 값비싼 향유를 바친다는 것은 예수님께 대한 철저한 사랑과 헌신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진실한 마음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 중심을 보신 것입니다.

“저희가 힘을 다하여” 이 말씀은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다했다는 뜻입니다. 이 여인은 생활이 그렇게 부유한 것은 아닌 것 갔습니다.

죽음의 위기에 처해있는 주님의 모습을 감지했을 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드리겠다고 다짐하고 고이 모아 두었던 향유를 꺼내 가지고 나와 부어 들인 것입니다.

누가 말하기를 사랑은 낭비라고 하였지요? 낭비를 꺼려하는 사람은 사랑 할 자격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은 낭비를 낭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아깝기만 하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신앙이 무엇이고 주님을 사랑하는 일을 모르고 있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여인은 대단히 실패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대단한 낭비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주님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인간이 해 드릴 수 있는 큰 봉사가 되어 진 것입니다.

영원히 기념할 만한 믿음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에 드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의 믿음에 대해 꼭 마음에 들었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들었다는 말씀은 합격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인정을 받았을 뿐 아니라 칭찬도 받았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칭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특별히 칭찬하신 경우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집에 가신다고 하니 내 집에 오심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다만 “말씀만 하옵소서. 내 하인이 낳겠나이다.” 확신했던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고 나다나엘의 순수하고 진실했던 행위에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칭찬 하셨습니다. 그리고 본문의 이 여인의 신앙을 칭찬 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사람들에게 칭찬 받기에 앞서 하나님께 인정받고 칭찬받는 여러분들의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신앙이었기에 인정을 받았습니까? 예수님에게 무엇이나 드리려는 신앙 이었습니다. 내가 예수님께 받고자 하는 믿음이 아니라 주님과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무엇이든지, 심지어는 어떤 것이라도 드리려는 믿음이었고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어떤 핍박도 감수하겠다’고 하는 신앙이었습니다.

영원히 기념할 믿음의 본질은 무엇이 입니까? 예수님은 자기 소유 중 제일 귀하다는 신앙 고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 여인에게 삼백 데나리온의 향유는 가장 값진 보배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소유 중 가장 보배로운 것이라고 해도 ‘예수님만큼은 귀하지 아니 하다’는 신앙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사용되는 것을 제일 귀하게 여긴 신앙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여기 무명의 여신도가 생각하기를 예수님을 위해 사용되는 것은 가장 값진 것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주님을 위해 드릴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구속 사업을 제일 귀하게 여긴 신앙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여러 가지 많은 일중에 예수님의 구속 사업 오늘 교회가 전개해 나가는 선교 사업 구령 사업 전도하는 일보다 더 귀중한 일은 없습니다.

[엡1:7]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로 말미암아 구속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였고, [롬 3:24]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왜 우리를 구속하여 주셨습니까? [갈 4:4~5]에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 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이러한 귀중한 가치가 있기에 그는 귀중한 향유를 부를 부어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 여인에게 주님이 지상에서 주실 수 있는 가장 큰 상을 주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 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 하리라 하시니라.”

오늘의 세상은 죽은 시신을 위해 많은 재물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아무리 찬란해도 그것은 가치가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살아 계신 예수님을 위해 행한 것은 기념비적인 일이기에 온 세상을 향기로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이 여자의 행한 일도 기념하리라” 그 만큼 영원과 통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값비싼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 하십니까? 값이 많이 나가는 것일 것입니다.

아무리 비싸도 상품화 할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 생명은 어느 것 하고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부나 마찬 가지입니다.

참 신앙은 상품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전부입니다.

‘너는 나를 따르는데 어느 정도의 것으로 환산하고 있느냐’고 주님께서 묻고 계십니다.

주님을 따르는데 비용이 어느 정도인가를 성경을 살펴봅시다.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바쳤고 모세는 자기 민족과 고난 받는 것을 애급의 모든 보화보다 더 귀하게 여겼으며 다니엘은 사자 굴에 들어가면 잡혀 죽을 줄 알면서도 우상에게 절하는 것을 거부 하였으며 스데반은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까지 하였으며 본문의 여인은 삼백 데나리온의 값진 향유를 아낌없이 부어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하늘나라가 이런 자들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바친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하겠다고 하시며 믿음의 후손을 기업으로 얻는 복의 근원이 되는 복을 받았으며 시돈 땅의 사렙다(히브리어 ‘사르밧’) 과부는 흉년이 극심할 때 마지막으로 남은 것을 주의 종에게 주었을 때 극심한 흉년에서 사는 길이 열려 졌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는 자녀를 위해서라면 물질도 시간도 마음도 빼앗겨도 기쁘게 여깁니다. 사랑하는 자가 있다면 무엇인가 빼앗기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연인이나 사랑하는 딸에게는 무엇인가를 빼앗기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 가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빼앗겨도 즐겁게 생각합니다.

이 여인은 정성을 거룩하게 낭비 하였습니다. 이 여인이 바친 것은 향유도 귀한 것이었고 시간도 귀한 것이었지만 무엇보다 귀중한 것은 그녀가 예수님께 바친 정성 이었습니다.

사실 정성이 없다 향유도 바칠 수 없었고 또한 정성 없이 바치진 것 이었다면 그것을 절대로 값진 것이 될 수 없었습니다.

토마스 아켐피스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아주 조그마한 이익을 위해서는 한 걸음도 옮기기를 싫어하고 있다.’

맞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가정을 위해 자기를 위해서만 쏟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는 조금도 바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바친 정성 이야말로 예수님께 영원히 기억되고 끝내 풍성한 은혜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베다니의 여인은 예수님께 값진 향유를 바쳤고 귀한 시간을 바쳤으며 뜨거운 정성을 바쳤습니다.

겉만 보면 그것은 쓸데없는 낭비로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바쳐진 헌신이 낭비가 아니라 거룩한 낭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귀하게 보셨던지 이 여인의 행위를 기념하게 될 것이라고 만족해 하셨습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이 여인의 선한 봉사도 기념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보상에 비하면 이 여인의 행위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마리아의 선한 행위는 당신의 생애 최후에 있는 값진 행위로 생각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삶도 일생(一生)이라고 합니다.

한번 밖에 없는 생애를 복음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값진 생 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값있게 쓰임 받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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