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중반의 여자 목사는 혼자였다. 교인 한 명 없는 개척 교회에서 그는 매일 새벽 3시부터 대여섯 시간을 기도했다. “한 영혼이라도 살릴 수 있다면…” 혈혈단신(孑孑單身)이었고, 의지할 데는 하나님밖에 없었다. 구하리교회(경기도 용인) 김인아 목사는 “’이대로 포기할까’ 하는 마음도 들었다”고 했다. 전에 섬기던 교회에서는 몇만 명을 전도했던 ‘아줌마 전도왕’도, ‘개척’이라는 높은 벽 앞에서는 좌절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개인’이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표현대로 ‘죽어라’ 전도한지 1년. 출석 교인 한 명 없었던 구하리교회는 현재 주일예배 150명이 출석하는 교회로 ‘기적’처럼 성장했다. ‘요즘 교회 개척하면 열에 아홉은 문을 닫는다’는 현실 속에서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1년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김인아 목사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아줌마 전도왕’으로 유명한 김인아 목사는 지난 2010년 12월 경기도 용인에 300평 부지를 매입하여 구하리교회를 신축하고 개척을 시작했다. 혼자서 시작했던 교회는 1년이 지나 출석 교인 150명이 됐다. 그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며 감사해했다. ⓒ오유진 기자
-‘아줌마 전도왕’이란 타이틀을 버리고 장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개척을 시작했습니다. 어떤 마음이었나요?

“사실 하면 될 줄 알았죠. (웃음) 처음엔 개척이 이렇게 힘들 줄 모르고 시작했어요. 그래도 개척하는 방향을 잘 잡아서 이 정도까지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동네 주민들에게 교회를 알리는 데 힘썼어요. ‘무엇을 알릴 것이냐?’가 중요했죠. 그 때 떠오른 게 문화센터였어요. 노량진교회에서 했던 문화센터를 나도 한번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죠. 구하리교회 내부에 문화센터를 두고, 수학, 영어, 탁구, 클라리넷, 요가, 바이올린, 중국어, 일본어, 미용, 통기타 등을 가르치고 있어요. 모두 무료로 가르쳐요.”

-문화센터가 선교에 긍정적인 효과를 끼쳤나요?

“처음엔 수학과 영어를 가르쳐서 아이들을 많이 오게 했어요. 아이들이 오면 공부시키고, 교회에서 밥도 먹이고, 편하게 놀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줬어요. 그랬더니 어머니들이 정말 좋아하시고, 감사하다는 말을 많이 해줬어요. 그래서 구하리교회에 대한 좋은 소문이 많이 퍼졌구요. 그러다보니 소문을 듣고 자연스럽게 아이들과 어머니들이 교회에 오게 됐죠.”

-교회 건립 당시부터 주민들의 반대가 심했다고 들었습니다.

“2010년 5월에 교회 건축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 때부터 주민들의 반발이 심했죠. 교회 주변에 ‘교회 신축 반대’ 플래카드가 나붙었어요. 교회 건축 막으려고 주민들이 공사 차량까지 막는 일도 있었구요. 반대 서명 운동이 일어나서 구청까지 민원이 들어갔어요. 그 때 노량진교회 강신원 목사님이 교회 기공예배를 드리러 오셨는데 반대 플랫카드를 보고 굉장히 걱정하실 정도였죠.”

김 목사는 경기도 용인 마북동 중심가에 300평 규모의 부지를 매입하고, 2010년 5월부터 교회 건축을 시작했다. 당시 주민들의 반대가 심해 김 목사가 직접 마을회관에 모인 주민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화를 누그러뜨리고, 설득해야 했다. 그런 어려움을 거쳐 드디어 2010년 12월 무사히 교회 건축을 마무리짓고, 봉헌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그 때 교회 건축 반대하시던 분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반대하시던 분들 중 몇몇은 지금 저희 교회 출석 중이세요. ‘문화센터’를 통해 무료로 교육을 하니까. ‘정말 좋은 교회다’ 이런 인식이 생긴 거죠. 지금은 어머니들이 특히나 좋아하세요. 지역 주민들도 그 때 건축 반대했던 일에 대해서 미안한 마음이 있는 것 같아요.”

그는 14년 5개월간 노량진교회와 과천교회에서 집사와 전도사 직분으로 섬기면서 전도왕 타이틀을 얻었다. 12년간 과천교회를 섬기며 전도대를 이끌었고, 하루도 쉬지 않고 전도한 결과 지난 2007년 과천교회는 2만 성도 출석 감사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신학 공부을 시작한 계기는 노량진교회 강신원 목사의 권유였다. 서울장신대와 장신대 신대원을 졸업한 후 2004년 목사 안수를 받았고, 장신대 목회전문대학원에서 목회상담학을 전공했다. 김 목사가 노량진교회 평신도 시절부터 전도왕으로 인정받아 전국 각지로 간증 집회를 다닐 정도로 유명세를 타고 있을 때였다.

지난 2001년에는 ‘아줌마 전도왕’(베드로서원)이란 제목으로 책을 냈다. 인기를 끌어 25쇄까지 나왔다. 후속작도 이어졌다. 2010년에 ‘아줌마 전도왕 그리고…’가 출간됐다.

-전도를 어느 정도까지 해봤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정말 죽기까지 했어요. 수저 하나 들 수 없을 정도로요. 6~7년 전에 전도를 하다가 쓰러져 생사를 오간 적도 있었어요. 병원에선 다시 회복될 가망이 없다고까지 했었죠. 교인들이 그런 저를 보고 그러더라고요. ‘일어나시면 또 전도하실 거에요?’ 전 당연히 그렇다고 했죠. 하나님께 감사하니까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내가 만약에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으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몰라요. 삶이 허무하고 공허했으니까요.”

-목사님께 전도란 무엇인가요?

“그냥 생활이고 삶이죠. 그건 꼭 해야 하는 것이니까요. 힘들죠. 울지 않은 때가 없었어요. 감사해서 울고, 힘들어서 울어요. 쉽지 않아요. 제가 교인들한테는 안 보여주지만 혼자 울 때가 많아요. 내 힘으로 할 수 없어서 하나님께 계속 기도하게 되구요.”

-전도를 그만 두고 싶을 때도 있을 것 같습니다.

“있죠. 없다면 거짓말이죠.”

▲수저 하나 들 수 없을 정도로 전도해봤다는 김인아 목사는, 죽음의 위기에서도 절대 영혼을 구원하는 전도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고 했다. 전도 이야기를 하던 중 힘들었던 때가 떠올랐는지 그의 눈시울은 붉어졌다. ⓒ 오유진 기자

-그럴 때마다 어떻게 하나요?

“하나님께 기도해요. 이기게 해달라고. 처음 개척 당시 빈자리가 너무 많으니까. 굉장히 낙심되더라고요. 그럴 때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셔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기도했어요. 이건 제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죠.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요. 그리고 교회에 와서 기도해요. 2층 예배당에 올라가보면 제가 무릎 꿇고 기도하는 자리가 있어요. 하루에 6~7시간은 기도하는 것 같아요. 교회에 불이 꺼진 걸 보기가 그렇게 싫을 수 없어요.”

-구하리교회는 교인 한 명 없이 혼자서 개척해서 지금은 150명이 출석하고 있습니다. 비결이 뭡니까?

“비결이요? (웃음) 없어요. 그냥 죽어라 한 거에요. 지난 1년은 너무 힘들어서 잠을 못 잘 때가 많았어요. 아마 이게 제 일이었다면 쉽게 포기했을 거에요. 하지만 하나님의 일이니까. 어떻게든 자립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개척하는 목사님들께 용기를 주고 싶었어요.”

-요즘에도 전도합니까?

“네, 목회 때문에 매일은 못하지만 시간 날 때마다 교회 전도대원들과 전도를 하고 있어요.”

-구하리교회 전도대원은 몇 명이나 있나요?

“지금 전도대원은 10~12명 정도가 있어요. 화, 목, 금 이렇게 전도를 해요. 오늘처럼 날씨가 추워도 나가요. 주변 아파트를 최고 3~4동까지 돌아요. 그러다 보면 3시간은 훌쩍 지나 있죠. 그렇다고 열매를 다 맺느냐? 그렇지도 않아요. 등록이 안 될 때는 굉장히 힘들어요. 그럴 때는 오늘 이 뿌림이 다른 쪽으로라도 열매를 맺을 것이라 생각하고 위안을 삼아요. 오늘 수고로움이 결코 헛되지 않을 거라고요.”

-교회 개척 1년, 어땠습니까.

“굉장히 많은 것을 느꼈어요. 사람들에게 교회에 와서 예배만 드리라고 하는 것은 좋지 않은 것 같아요. 이제는 전도 방법이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고 봐요. 교회가 문턱을 낮춰야 해요. 누구나 교회에 들어와서 안식할 수 있게 해야 해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교회는 늘 문이 열려 있어야 해요. 저희 교회는 절에 다니고, 성당 다니는 사람들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어요. 아이들도 와서 자연스럽게 공부하다 가고, 모이면 서로 어울리며 놀아요. 이런 게 전혀 서먹하지 않아요. 문화센터에서 아이들은 영어, 수학을 공부하고, 어른들은 요가수업을 받아요. 저희 교회 출입하는 분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은데요. 그들에게 교회 행사가 있을 때마다 오라고 하면 거리낌 없이 오세요. 전혀 어렵지 않아요. 믿지 않는 사람이 교회 다니려면 그 과정이 무척 어려운데 구하리교회는 그런 것이 없어졌어요.”

-문턱을 낮춰야 한다고 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준다면요?

“처음에 새 가족들이 교회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잘 안 되요. 왜냐하면 기존에 있던 교인들의 텃세가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새 가족들이 교회에서 뭔가 하나 하려고 해도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한국교회가 이런 점들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봐요.”

-또 한국교회에 바라는 점이 있습니까?

“개인적인 욕심을 버렸으면 좋겠어요. 이건 내 거니까, 내가 개척한 교회니까. 하는 마음이 있으면 목회가 힘들어지는 것 같아요.”

-언제까지 목회할 생각이신가요?

“오래할 것 같진 않아요. 때가 되면 내려 놔야죠. 개척하면서 하나님께 서원한 것이 있어요. 1천명이 되면 분립 개척하겠다고 했어요. 구하리교회는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욕심을 다 버리기로 했어요. 욕심이 개입하면 목회를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그렇게 결정했어요. 그리고 우리 교인들에게도 이 사실(분립 개척)을 다 공표했어요. 너무 교회를 크게 만들어서 교인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것은 불행한 것 같아서요.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시면 2~3번 분립 개척을 하고 싶어요. 목회를 오래할 생각은 없어요.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요.”

-은퇴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은퇴하면 다시 평신도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작은 시골로 내려가서 남편과 같이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그 동안 저 때문에 수고한 가족들에게 제일 미안하고, 마음에 걸려요. 그리고 감사하고요. 담임목사직에서 물러나면 가족들과 함께 남은 인생을 보내고 싶네요.”

■ 에필로그

점심 식사를 하면서 이런 저런 추가 질문을 했다. 겉보기에도 평범한 검은색 파카가 눈에 들어와 물었다. “아, 이거요. 얼마 전에 남편이 사다 준 거에요. 20년 동안 같은 파카만 입어서 제가 안돼 보였나 봐요.” 가방에서 꺼낸 핸드폰은 2000년도 초에나 한참 유행했을 법한 폴더형이었다. “요즘 유행하는 스마트폰은 왜 사용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런 건 잘 모른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시선을 아래로 향해 신고 있던 구두를 보니 소위 ‘전도사 구두’로 불리는 굽 낮은 신발이었다. “오래 못 신어요. 하도 많이 돌아다니니까. 금방 닳더라구요.” 차는 어떤 걸 타느냐고 물었다. “아반떼요. 평생 벤츠나 BMW 탈 운명은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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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