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성경신학회 제35차 정기논문발표회가 요한 낙스와 한국교회를 주제로 개최됐다.   ©오상아 기자

[기독일보 오상아 기자] 한국성경신학회 제35차 정기논문발표회가 '요한 낙스와 한국교회'를 주제로 26일 오후 2시부터 신반포중앙교회(담임목사 김성봉)에서 개최됐다.

이날 김요섭 박사(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역사신학)은 '종교개혁자 요한 낙스의 사명 인식과 그 역사적 배경', 김진국 박사(대신총회신학교/역사신학)는 '요한 낙스를 통해 개혁된 스코틀랜드 교회: 장로교회와 한국교회와의 관계', 이승구 박사(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조직신학)는 '요한 낙스와 제1치리서', 이은선 박사(안양대학교/역사신학)는 '요한 낙스와 정치와 교회의 관계'를 주제로 발제했다.

'종교개혁자 요한 낙스의 사명 인식과 그 역사적 배경'을 주제로 발제하며 김요섭 박사는 "스스로를 하나님께서 부르신 선지자로 생각한 낙스의 사역은 1559년 5월 스코틀랜드에 돌아와 시작한 사역에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며 "섭정 메리에 맞서 다시 한 번 일어난 개신교 귀족들과 함께 한 낙스의 설교는 10년 전과는 다르게 더 분명하고 강력한 종교개혁의 동기를 제공했다. 그 가운데 11월 7일 스털링에서 전한 낙스 시편 80편 설교는 개신교 지도자들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됐다"고 말했다.

김 박사는 "에딘버러에서도 섭정 메리의 사망 이후 1559년 8월 프랑스에서 귀국해 즉위한 메리 스튜어드 여왕과 로마 가톨릭 세력을 향한 낙스의 선지자적 선포는 멈추지 않았다. 낙스의 설교가 자신을 공격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메리의 남편 단리 경(Lord Darnley)이 1565년 8월 19일 세인트 자일스 교회의 예배에 참석했을 때, 낙스는 이사야서 26장 본문을 통해 왕의 권력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할 상대적인 것이라고 선포했다. 그리고 아합과 이세벨의 우상숭배를 거론하며 지금도 하나님께서 우상숭배를 용납하지 않으신다고 담대히 경고했다"고 했다.

그는 또 "낙스는 왕궁에서 미사를 드리던 여왕뿐 아니라 자신들에게 손해가 갈 것을 우려해 미온적으로 종교개혁 정책을 추진하던 스코틀랜드 귀족들을 향해서도 경고의 메시지를 거침없이 선포했다. 한 예로 1571년 1월 10일 낙스는 나봇의 살해에 대한 본문을 인용하여 귀족 커크칼디를 향해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를 했다"고 덧붙였다.

▲김요섭 박사는 "낙스의 선지자로서의 사명은 기록된 성경 말씀에 충실하게 당시 종교의 타락에 맞서 미사를 드리며 또 우상숭배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과 회개하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를 전하는 것에 집중되었다"고 말했다.   ©자료사진

김요섭 박사는 "무엇보다도 낙스가 스코틀랜드에 돌아와 심혈을 기울여 저술한 '역사'는 그의 선지자적 태도를 잘 보여준다. 낙스의 저작 가운데 가장 큰 분량을 차지하는 이 글은 낙스가 경험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객관적 보고라기보다는 그 역사적 상황 속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섭리를 선포하는 일종의 선지자적 해석과 선포로서의 설교였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러나 낙스는 종교개혁 진영의 지도자로서 갖게 된 영향력을 결코 스스로의 출세와 부유함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다만 에딘버러 세인트 자일스 교회의 설교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며 "그러므로 스코틀랜드에서 낙스가 여왕이나 권력자 앞에서도 전혀 굽힘없이 우상숭배의 척결과 하나님 앞에서의 보편적 순종의 의무를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이 사명을 위해 부름 받은 하나님의 선지자라는 사명 의식을 굳게 붙잡았기 때문이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러므로 1547년 시작해 1559년까지 계속된 종교개혁자로서의 낙스의 사상적 발전과 다양한 목회적 경험은 그가 하나님께 부름 받은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확고히 하는 훈련의 과정이었다. 낙스는 선지자적인 사명감을 가지고 이 훈련의 과정 가운데 갈수록 더 강력하게 우상숭배적 미사를 거절하고 바른 예배를 확립하는 사역을 전개했고, 이와 관련해 잘못된 종교 정책으로 백성들을 억압하는 군주에게 저항해야 한다는 정치적 개혁의 메시지를 더 분명히 선포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물론 낙스의 사명 의식에 한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크랜머나 콕스 등 잉글랜드의 개혁자들이 불평했듯이 낙스의 이와 같은 강력한 사명 의식은 때로는 상황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하는 강경하고 분파적인 태도로 오해 받을 수 있었다. 실제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메리 여왕의 로마 가톨릭 종교정책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한 특정 성경 본문의 인용과 여성의 권위 자체를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평가한 그의 입장은 엘리자베스 영왕뿐 아니라 동료였던 칼빈과 베자의 지지도 얻지 못했다. 또 낙스의 '선지자적 사명감'은 구약과 신약에 대한 개혁주의적 이해를 간과하고 구약의 사례를 16세기 종교개혁의 상황에 그대로 적용시키는 성경해석상의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또한 "낙스의 동료들은 낙스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며 "그러나 낙스가 스스로 인식하고 실천하려 했던 선지자로서의 사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거나 특별한 권위를 가지고 성경 본문을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음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의 사명은 다만 기록된 성경 말씀에 충실하게 당시 종교의 타락에 맞서 미사를 드리며 또 강요하는 우상숭배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과 회개하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를 전하는 것에 집중되었다"고 했다.

그는 "임종의 자리에서 낙스는 '하나님의 나팔수'로서의 자신의 사명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며 "하나님께서 나의 입을 통해 말씀하시기를 원하시거니와 나는 사람들에게 명백하고 순수하게 그의 진리를 보여주는데 조금도 비겁하지 않았다... 단지 내게 주신 은혜의 능력 안에서 그의 진리를 공정하게 분담하여 가르치며,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기록하였다. 하나님께서 그의 율법을 통해 밝히 보여주신 바에 따라 거만한 자들의 오만을 꺾고 이를 통해 하나님을 거슬리는 그들의 반란을 폭로하였다. 또 스스로 죄악을 깨달았기에 괴로움을 겪고 있는 이들의 양심을 불러일으키며, 예수 그리스도를 소리 높여 선포하였으니, 믿는 이들의 가슴 속에 그의 죽음의 능력과 그의 부활의 장엄한 역사를 선포하였다"고 소개했다.

김 박사는 "낙스는 이처럼 타협할 줄 모르는 강력한 사명 의식과 갈수록 커져간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말씀의 가르침에 종속시킬 수 있었다. 낙스의 가르침과 사역이 열광주의나 권위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10년간의 핍박과 고난, 그리고 피난 기간의 훈련을 통해 자신의 선지자적 사명 의식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잊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며 "비록 여러가지 약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낙스의 분명한 사명 의식, 그리고 그 사명을 주신 하나님께 순종하는 청지기 의식, 그리고 그 사명을 위해 담대히 말씀을 선포할 줄 알았던 그의 실천은 낙스가 이후 개혁주의 교회에 남겨준 값진 영적 유산이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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