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호 교수   ©인하대

[기독일보 오상아 기자] 지난 6일 오후 개최된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제330회 학술발표회에서 '동학과 개신교, 그 갈등과 소통의 이야기'를 주제로 발제한 인하대학교 이영호 교수는 1893-1894년 동학의 무력봉기부터 1919년 3.1운동까지 동학(천도교)과 개신교의 갈등과 소통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그는 상극-소통-월경-경쟁-연대의 사건들을 소개, '소통'의 사건은 맥켄지 선교사와 황해도 동학농민군의 조우를 꼽았다.

그는 "동학과 개신교의 직접적 대면은 캐나다 출신 맥켄지(W.J.McKenzie) 선교사가 1894년 10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황해도 장연의 소래마을에서 한글을 배우면서 선교하고 있을 때 이루어졌다. 소래마을은 만주에서 일찍이 개종한 서상륜, 서경조 형제가 정착한 기독교 마을이었다"며 "맥켄지 선교사가 소래마을에 도착한 직후 황해도 일원에는 동학농민의 봉기가 일어났다"고 했다.

이어 "맥켄지는 처음에는 청일전쟁에서 우세를 점한 일본군이 동학군을 진입할 것으로 예상하며 피신하지 않고 굳건한 선교의 자세를 유지했다. 그러나 동학군이 맥켄지가 소지한 기독교 서적과 성서를 불태우며 위협하자 생명의 위기를 느꼈다. 예배에 참석한 신자들이 오후에는 봉기현장에 나갈 정도로 주민들의 마음도 흔들렸다"며 "그러나 비타협의 강인한 성품을 지닌 맥켄지는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하면서 상황을 이겨나갔다"고 했다.

그는 "때론 소래마을 출신의 동학군의 보호를 받기도 했다. 동학지도자의 보호를 받게 된 맥켄지는 소래마을에 기독교를 상징하는 성 조지 깃발을 내걸고 적극적인 선교에 나섰다"며 또한 "수백명의 동학군이 그 깃발을 보고 소래마을을 방문하면 맥켄지는 두려움 없이 그들의 방문을 받아들였다. 상황이 반전되어 맥켄지와 소래교회가 동학군의 피신처가 될 정도였다"고 말했다.

또 "일본군의 진압으로 수세에 몰린 동학의 지도자는 서경조를 통해 상호 협조할 것을 제안하고, 맥켄지가 동학군의 주둔지를 돌면서 부상당한 동학군을 치료해 주면서 상호간에 신뢰가 형성되었다"며 "맥켄지는 이러한 상황을 선교의 기회로 삼고 교회건물을 새로 짓기 시작했다. 동학군 가운데 기독교로 개종하는 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상당수의 동학군이 맥켄지의 예배에 참석했다. 소래마을은 안전과 행복의 중심지가 되어갔고 맥켄지는 동학군과 장연부사 사이의 중재자 역할도 감당했다"고 했다.

그는 "동학군이 신약성경을 가지고 다니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맥켄지는 깜짝 놀랐다. 그는 동학이 기독교에서 파생된 무슬림과 유사한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며 "그래서 맥켄지는 동학경전을 입수하여 동학의 교리를 탐구했다"고 했다.

덧붙여 "'부활, 천당, 지옥을 믿을 수 있지만 오후 늦게 포도밭에서 일한 일꾼에게 하루종일 일한 일꾼과 똑같은 노임을 주었다는 성경이야기는 믿지 못하겠다'는 동학 교도의 질문을 받고 토론을 하기도 했다"고 소개했다.

또한 "맥켄지 선교사를 돕던, 후에 언더우드 선교사를 이어 새문안교회 2대 목사가 된 서경조는 동학접주 김원삼을 만나 교리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김원삼이 '동경대전'의 '아양숙기'(兒養淑氣)라는 구절을 '갓난 아이의 맑은 기운을 그대로 기르라'로 해석하니, 서경조는 '사람의 맑은 기운을 갓난 아이 보양하듯 하라'는 뜻이라고 해석하며 반박하였다"며 "동학의 경전을 서경조가 논리적으로 해석하니 김원삼은 서경조를 동학의 개념을 빌려 '천도(天道)하는 대선생'이라고 칭찬했다. 이런 식으로 두 종교 간에 내면적 소통이 시작된 것은 아닐까?"라고 말했다.

앞서 1893년 2월 18일 동학교도들이 당시 임시로 배재학당을 관리하던 감리교 선교사 존스(H.J.Jones)의 집에 선교사들의 학교설립과 선교행위를 조약위반이라고 비판하고 부모공경과 조상제사를 소홀히 하는 기독교 풍습을 격렬하게 비난하는 내용을 붙였다"며 "조선의 역사와 사회에 관심이 많던 존스 선교사는 동학 세력이 자기 집에 격문을 붙이자 동학이 어떤 종교인지 연구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이어 "그는 조선의 전통종교와 기독교의 소통 가능성을 찾았다. 그는 '조선인은 사회에 있을 때는 유교인이 되고 철학적으로는 불교인이 되며 문제가 생기면 주술적 신앙의 대상인 가지가지의 신들에게 구원을 부르짖는다'고 평가했다"며 "민속종교의 정령에 대한 신앙은 신의 신령한 성격을 이해할 수 있게 하고, 유교의 도덕관념은 기독교 윤리를 수용하게 하고, 자발적이고 지극정성의 우상숭배는 신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헌신으로 변화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고 보았다. 민속종교, 불교, 유교(조상숭배) 등 조선의 전통종교는 상호 관용과 공존의 특성을 지니고 있어 기독교 신앙의 수용도 원만했다고 본 것이다"고 소개했다.

덧붙여 "또한 존스는 전통종교의 '하나님'(Hananim) 개념이 기독교의 '신'(God)개념으로 전이됨으로써 그러한 일신론적 신관의 소통에 의해 소통의 가능성이 확장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동학에도 바로 '천주(한울님)'라는 유일신이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동학의 한울님이 조선의 지고신인 '하나님' 개념과 동일시되고 개신교의 신을 바로 그 '하나님'으로 번역함으로써 동학과 개신교는 신관에서 연결된다는 것이다"며 "소래마을 동학군 두목이 기독교와 동학교도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말한 것도 이러한 신관의 표출이었다"고 했다.

그는 "동학과 개신교 상호 간에 소통의 폭이 넓어지면서 다양한 교섭이 일어나고 경계가 붕괴되는 양상도 나타났다"며 동학농민운동 이후 또 다른 봉기를 계획한 일부의 동학농민군이 별도로 조직한 영학당은 개신교를 활용해 조직했다고 소개했다.

또 3대 교주 손병희가 동학의 정치조직으로 1904년 진보회를 결성해 전국 11만여명의 회원 중 평안도 지방에 7만여명을 포진시키고, 1906년 근대적 교단체제로 전환하고자 천도교를 창립하면서도 서양종교의 교단조직 방식을 수용했다.

1906-07년에 평안도에서의 개신교와 천도교는 '경쟁'의 대상이기도 했다. 이 교수는 "조선에 처음 들어온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이 평안도 선교에 성공하여 10여년만인 1906-07년경에는 평안도의 개신교인이 대략 27,000여명으로 늘어났다"며 "평안도 진보회원 7만명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개신교인들도 평안도 지역민의 주류의 한축으로 정착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또한 "의주에서는 진보회원과 개신교도가 각각 만 명이 되고 나머지는 주저 관망이라는 실정이라는 보도가 나왔다"며 "동학교, 개신교도, 일반평민이 성인 인구를 삼분하는 실정이었다"고 했다.

그는 "평안도를 중심으로 개신교와 천도교는 교세확장을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동학농민봉기 및 청일전쟁 이후 비슷한 시기에 두 교단이 평안도지방에 대한 포교를 시작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동학은 진보회와 같은 운동조직을 만들어 각군집회를 통해 교세를 확장해간 반면 개신교는 사경회와 평양대부흥회를 통해 교세를 확장했다"며 "두 교단은 교세확장에 경쟁적인 관계에 있었으나 신기한 것은 상호충돌한 흔적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개신교인은 도회지와 철도주변에 많이 분포하고, 진보회원은 정부의 탄압을 피해 농촌, 산악지대에 대한 포교에 주력하여 충돌을 피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소개했다.

마지막으로 이 교수는 3.1운동에서의 개신교와 천도교의 협력을 소개했다. 그는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은 종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민족 대표 33인은 천도교 15인, 개신교 15인, 불교 2인, 기타 1인으로 종교인들이 주축을 이루었다"며 "천도교인과 개신교인이 숫자를 양분해 연대한 점이 주목된다"고 말했다.

또한 지방의 경우에도 천도교, 개신교 조직과 서울에서 내려간 학생들에 의해 지도됐다며 "천도교와 개신교의 교세가 강한 평안도 지역에서 일찍부터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평양의 경우 세 부류가 시내에서 합류하여 만세운동이 크게 확산되었다. 3월 1일 장대현교회의 장로교인들과 남산현교회의 감리교인들, 그리고 설암리 천도교당의 천도교인들이 오후 1시경 각각 대형태극기를 게양하고 광무황제 봉도식과 조선독립 선포식을 개최한 뒤 수백여명이 시내로 행진하여 연합 만세시위를 벌였다"고 했다.

그는 "동학과 개신교는 상극에서 시작해 소통과 경쟁을 넘어 3.1운동에서 연대함으로써 관계가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후 사회적 공통의제를 중심으로 협력 연대한 전통을 잘 계승되지 못했다"며 "오늘날 한국사회의 여러 종단은 시공간을 초월한 종교내적 논리로 무장하여 상호 타자화함으로써 적대적 병립의 상황에 놓여 있다고 보는 것이 현실에 가까운 진단일 것이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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