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영 목사   ©기장총회

1. 시작하는 말

오늘날의 시대적 흐름은 화해와 평화를 지향하고 있지만, 오늘의 현실은 아직도 분열과 투쟁의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개인간의 문제만이 아니라, 나라와 나라가 전쟁을 하고, 민족과 민족이 대립하고, 시기와 질투, 원수 됨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이든 민족이든 필요한 것은 진정한 평화요 용서와 화해의 실현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역사에서 많은 과오를 저지르고 교회는 오늘도 많은 약점들을 안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계 20억의 그리스도인들은 아직도 신봉하고 따르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에서 하늘과 땅, 인간과 인간 그리고 자연과의 모든 용서와 화해를 배우며 실현하는 사랑의 힘을 찾고 있습니다. 오늘은 '평화는 용서와 화해의 실현이다' 는 말씀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중심이고 산상수훈의 한 축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운동도 사랑이 중심이 되는데 곧 용서와 화해가 실현되는 평화운동입니다.

2. 예수의 용서와 화해의 가르침

산상수훈(마6장)에서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하는 제자들의 요청에 '주기도문'을 가르치신 예수는 중요한 몇 가지를 기도제목으로 제시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삶에 필요한 일용할 양식 다음으로 용서를 가르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일용할 양식이 없으면 우리가 살 수 없듯이, 이웃과 함께 살면서 피차 용서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가장 작은 단위인 부부나 가족에서부터 교회와 사회생활에서 용서 없이는 결코 평화롭게 살거나 그 유지나어떤 발전도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약점과 실수를 범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예수는 이런 인간의 본질과 삶의 실상을 바로 알았기에 용서를 교회공동체와 사회의 제1의 기본원리로 삼았습니다. 주기도문의 희랍어 원전을 살피면 더 놀랍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한번에 다 용서해 주셨으며 우리가 형제자매의 잘못에 대해서는 계속 용서하도록 가르칩니다. 그토록 인간은 누구나 잘못과 실수를 범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주기도문에서 이렇게 용서를 강조하고도 예수는 하나님의 용서에 '단서'를 붙이며 인간이 이 땅에서 함께 평화롭게 사는 원리로서 우리 삶에서 용서란 필수적임을 역설합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 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4-15) 용서 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도 내게 잘못한 그 누구의 허물도 용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용서의 중요성을 위해 예수는 아주 엄하게 경고합니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의 과오를 용서치 않는다면 하나님도 우리의 용서를 거절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자문할 일은 '나는 내게 잘못한 그 누구라도 용서했는가?' 입니다.

베드로가 내 형제의 잘못에 대해 몇 번까지 용서해야 합니까? 7번까지면 될까요? 유대인의 법도를 알고 있을 베드로는, 이웃의 용서는 세 번이면 된다는 랍비의 가르침을 생각하며, 사실 그는 예수에게서 상당한 칭찬을 기대하며 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뜻밖에 예수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18:22)고 했습니다. 이는 용서에는 끝이 없다는 뜻이고, 뉘우치거든 언제나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용서와 화해의 소중함을 가르치던 예수는 제단에 봉헌할 때에라도 형제자매에게 아직도 거리낌이 있다면, 그 예물을 거기 둔 채 먼저 되돌아가 그와 화해하고 다시 오라고까지 가르쳤습니다. 함께 여행하듯 가는 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화해할 길이 없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날 부끄러울까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3. 그리스도인의 참된 친교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로마서 15:1-13참조)

특별히 강한 형제의 약한 형제에 대한 책임을 친교와 사귐, 화해의 면에 있어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귐은 서로를 생각하는 것으로 특징지어 집니다. 항상 다른 사람의 선과 그의 신앙건설을 위해 계획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조화로 특징지어져야 합니다. 화려하고 그 예배와 음악이 완전하고 연보가 자발적으로 드려진다 해도 조화를 갖추는 것이 그리스도인 교제의 본질적인 것입니다.성도의 바른 사귐을 통하여 제반 인생의 문제를 공동으로 해결해 나갑니다. 따라서 역사현장의 문제 역시 함께 공동으로 대처하고 참여해 나갑니다. 그리스도인 사귐의 핵심은 그 양식과 모범과 영감과 능력을 그리스도에게서 얻는다는데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당신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짊어진다고 했을 때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짊어지신다는 단어와 같은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영광의 주가 자신을 기쁘시게 하는 것보다 남을 봉사하는 길을 택했을 때, 바울은 그의 추종자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누구나 받아 들여야만 하는 본을 세워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가야 합니다. 로마서 본문이 우리에게 강조하여 가르치려는 바는 '덕'을 세우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인데, 믿음에 플러스해서 덕이 함께 하지 않으면 그 믿음은 바로 설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종교적 관계로서 하나님과 나와의 종적 관계이나, 이것이 덕으로 이어져서 윤리적 관계로 바로 되어야만 합니다. 덕이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나와 이웃과의 관계가 조화를 이룰 때 평안하고 올바르게 온전한 덕을 이루게 됩니다.

4.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는 용서하는 공동체

우리의 삶의 정황은 수많은 문제에 직면하여 내적 전투를 하고 있습니다. 재산과 명예, 권력 때문에 이웃과 다투고, 남의 지배나 억압으로 적대심과 복수심이 생깁니다. 그래서 우리가운데는 미움과 증오가 있고 경원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용서하기 힘든 우리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도 로마제국의 지배를 당하면서 선민의식이나 자존심은 물론 생존마저 위협 당했을 때 그들을 원수로 여겼던 것은 당연 했던 것입니다. 그들을 이해하고 받아준다는 것은 양심이 허락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에게는 종교적 용서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합니다. 더욱이 한(恨)에 맺혀있고, 6.25전쟁을 경험한 세대에게는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용서는 윤리적인 차원이라기 보다는 종교적 차원에 속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용서하기 위해서 자신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현실적 행위인 것이고 용서를 통해서 화해가 이룩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교회공동체는 원수 같음의 공동체가 아니라 '용서하는 공동체'입니다. 교회의 선교는 성도들의 순교의 피 터전 위에 세워졌습니다. 용서의 선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용서받은 자만이 해방된 자가 아니라 용서한자 역시도 해방된 자입니다. 왜냐하면 용서하지 않으면 둘이 모두 과거에 얽매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용서는 미래지향적입니다. 이런 점에서 회개와 용서는 동시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수많은 '너희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진정 용서함을 받는 것이고 자유 함을 받습니다.

용서는 용서를 가져오지만, 징벌은 징벌을 동반합니다. 때로 용서를 유보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그 유보는 사랑에 근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유보는 용서를 의미합니다. 용서는 수리적 개념이 아닙니다.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한다는 것은 490번 용서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용서는 숫자로 셀 것이 아니요, 사랑이 물량적 개념일수 없는 한, 용서도 물량적 개념이 아닙니다. 우리가 용서할 대상은 누구든지 다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용서하는 공동체'로써 세상 모두를 다 품어 안아야 합니다. 그래야 희망적이고 미래적 신앙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1백세 이상을 산 노인들의 삶을 연구한 심리학자 브리클리 박사 (Dr. Michael Brickley)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과거의 '감정적 찌꺼기'(emotional baggage)를 잘 털어 버린 자들입니다. 그들에게도 과거의 슬픔, 배신, 상처, 완성하지 못한 일, 해결 안 된 관계나 후회스러운 일들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같이 건강하고 적극적인 방법으로 이런 찌꺼기들을 깨끗이 털어 버렸습니다. 주어진 오늘의 하루하루를 기쁘고 즐겁게 감사하며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1백세까지 사는 장수의 비결은 몸 관리를 잘하며 운동을 열심히 하는 자들이기 보다는 저들의 마음과 심혼을 더 잘 지키고 다스리는 자들이라는 보고가 있습니다.

5. 용서와 화해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에서 우리가 배우며 고백해야 할 비밀

용서와 화해의 참 면모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나타난 비밀입니다. 예수가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로마 정치인과 군병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혀 운명하던 순간 그의 최후의 7마디의 말 중에 "하나님이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다 자기들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조차 알지 못합니다.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조롱하며 침 밷고 주먹질하던 저들을 용서해 달라며 측은히 여기던 예수! 그 십자가의 현장과 목소리를 진정 듣고 깨닫는 다면 이 세상 그 누구든 용서 못할 일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억울하고 분할지라도 예수의 십자가를 보고 그의 음성을 듣고 생각할 때면, 오히려 송구하고 감격스러울 뿐입니다. 그 무엇에도 분노보다는 용서와 화해, 차라리 감사함으로 변하는 위력은 예수의 십자가의 숨겨진 비밀 때문입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의 삶에서 이런 용서와 화해는 몇 번이고 체험되는 사건들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용서의 극치요 모든 평화와 화해는 이 십자가에 달려 있고 또한 용서의 힘도 거기서 나옵니다.

여순반란사건 때 손양원목사는 자기 두 아들을 죽이고 체포된 빨치산 청년을 용서할 뿐 아니라 자기의 양자로 삼았습니다. 인간세상의 상식과 법과 윤리도덕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것이나,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십자가, 성령의 강한 역사가 이런 기적 같은 용서와 사랑을 실현한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행보와 진리성은 예수의 때나 오늘이나 동일한 위력을 가집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참 용서와 구원의 사랑을 체험한 자들만이 지금도 여전히 이러한 용서와 사랑을 원수들에게까지 베풀고 있습니다.

미국 민권운동가 루터 킹 목사가 흑인들을 향해 백인들을 미워하지 말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의 하나님 사죄의 사랑을 체험하여 한 말입니다. 흑인이 백인을 미워하면 백인들의 흑인 증오를 탓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동시에 백인들에게 흑인 민권운동은 결코 흑인만 위한 것이 아니라 백인의 자유를 위해서라며 누구를 미워하는 동안 그 죄의 포로가 되기에 참된 해방을 위해 백인들은 흑인 차별을 중단하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한민족이 걸어온 분단도 용서와 화해로만이 새로운 평화통일을 이룩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어떤 아프고 쓰라린 일이든, 우리 각자에게 손해를 입히고 용서할 수 없을 만큼 괴롭혔다 해도, 우리의 죽을 수 밖에 없는 큰 죄를 용서해 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용서하며 화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죄 은총으로 용서받고 의인으로 인정받아 하나님 자녀 된 우리는 나아가 세계 어느 종족이나 종교인, 심지어 그 어떤 원수라도 용서하며 세계평화와 세계를 위해 함께 손잡고 다시 새로운 하늘과 땅을 꿈꾸어 보아야 합니다. 이는 참 생명의 길이요 평화의 길입니다.

6. 용서와 화해 실현의 평화를 온 누리에 임하게 하자

용서와 화해정신이 온갖 전쟁과 테러, 종족이나 종교간의 분쟁에서도 그 해결의 실마리가 되는 것을 역사적 세계의 현실에서 찾아보려 합니다. 그 구체적 역사의 한 사례를 2차 대전 뒤 자유와 공산진영으로 양분된 채 냉전이 계속되며, 핵무기 경쟁으로 전멸의 위기에 떨던 세계가 어떻게 이를 극복하게 되었는가를 소련과 동구공산권이 와해되던 사례를 살펴보려 합니다.

1983년 아직 철의 장막이 다 걷히기 전, 교황 존 폴2세가 폴란드를 방문하여 야외미사를 인도하던 때입니다. 구름 떼 같은 인파가 교구 별로 질서 있게 포니아토스 다리를 건너 광장으로 행진해 갔습니다. 다리정면에의 길은 공산당본부빌딩 앞을 지나게 되어 있었습니다. 떼 지어 행진하는 군중들은 그 앞을 지날 때마다 한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을 용서한다. 우리는 당신을 용서한다'(We forgive You) 또 그 외에도 억압과 박해를 받을 때마다 '우리는 당신을 용서한다 우리는 당신을 용서한다'는 피켓을 들고 행진하였습니다. 결국 폴란드 공산정권은 바로 이 '용서한다'는 하나님의 은혜의 정신에 의해 붕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용서의 몸부림은 소련과 동구 모든 나라들에 확산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철의 장벽의 동구들을 해방시킨 것입니다.

공산권의 종주국이요 동구제국을 장악하던 소비에트가 무너지며 발버둥치던 아이러니한 역사의 최후 단면을 유념해 보겠습니다. 1991년 10월, 고르바초프가 명목상의 대통령이 되고 실권은 엘친이 장악하기 시작되던 무렵입니다. 러시아 지도자들이 그 나라의 도덕성 회복을 도와달라고 미국 그리스도인들에게 요청하여 일단의 미국 기독교인들이 모스코바를 방문했을 때입니다. 여기 동행한 필립 얀시(Philip Yancey)는 그때의 일들을 소상하게 그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What's so Amazing About Grace)에서 기록했습니다. 고르바초프나 정부고위 관리들은 따뜻하게 환영했고 그 무서운 소비에트의 정보부 KGB를 방문했을 때에도 의심스러울 만큼 그 환대는 놀라웠습니다. 스탈린 시대, KGB는 38만 사제들 중 대부분의 사제들을 살해하고 축출하여 겨우 1백 명만 생존케 한 장본인들입니다.

그리고 '아불라제의 회개'(Repentence by Tengiz Abuladze's film)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사실 이 영화는 KGB의 잔인성, 특히 종교를 반대하고 수십만의 사제들을 살해한 무서운 범행과 허위탄핵, 강제투옥, 교회방화 등을 생생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수도원 1천 개, 신학교 60개가 문을 닫고 정교회98%가 문을 닫을 정도였습니다. 이 영화 작품은 남편을 노역장에 보낸 아낙네들이 강물에 떠내려 온 통나무 속에 남편들의 소식이 숨겨 있을까 하며 애타게 찾는 장면과 한 시골 아낙이 교회로 가는 길을 묻는 것으로 끝납니다. 길을 잘못 들었다고 말하자 도대체 교회로 인도되지 않는 길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며 막을 내립니다.

그런데 KGB의 부 책임자 장군은 이상과 같이 미국 기독교 대표들에게 소비에트의 정교회에 대한 그 동안의 박해의 사실들을 다 보여주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울었습니다. 그 부 책임자 장군은 '저는 평생 꼭 두 번 울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 가셨을 때, 그리고 바로 오늘밤입니다.'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그 날밤 돌아오는 버스의 미국 대표단은 약속의 땅을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확실히 이는 현대판 출애굽사건입니다. 땅의 탄성을 듣고 노예 같던 히브리 인들을 구원한 하나님이, 공산치하에서 수천만 명이 박해와 고문을 당하고 수백만 명이 무고하게 죽어가며 탄식하던 소리를 오늘에 다시 듣고 역사한 것임을 어찌 부인하겠습니까? 이런 출애굽을 역사하고 위력과 은총을 보인 바로 그 하나님을 모세는 잊지 말라고 신명기 8장에서 명했습니다.

우리는 또한 독일통일에서도 그러한 놀라운 역사적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엔 수백이 수천으로, 다음 삼만, 오만, 마침내는 오십만으로, 라이프지(Leipzig)인구의 거의 반에 도달했습니다. 성 니콜라이 교회에서 기도회를 가진 후 평화행렬은 어두운 거리를 찬송하며 계속 됐습니다. 경찰과 군대들은 그 모든 무기들을 가지고도 이런 행렬의 위력에 무력 했습니다. 마침내 동베르린에서 비슷한 평화행렬은 1백만에 이르렀고 증오의 베르린 장벽은 한 방의 총성도 없이 무너졌습니다. 대형 피켓이 라이프지 길거리에 나부꼈습니다. '우리는 당신, 교회에 감사한다.'(Wir danken Dir, Kirche)

세차게 부는 바람이 더러운 오염 물을 몰아내듯, 지구촌의 평화혁명의 바람이 소비에트와 동구에 분 것입니다. 1989년 한 해에만 총인구 5억에 달하는 10개 국가- 폴란드. 동독.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볼가리아. 루마니아. 알바니아. 유고슬라비아. 몽골. 소련에서 비폭력의 평화혁명이 이루어 졌습니다. 이 많은 역사들은 그 속의 소수 그리스도인들(Christian Minority)이 그 결정적 역할(a crucial role)을 담당했습니다. 마침내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제2의 출애굽사건을 일으켜 출애굽보다 10배, 100배 더 큰 소련과 동구나라들을 공산권의 구속에서 해방하였고, 또 해방의 역사를 하려 합니다. 신하자 폴 틸릭히(Paul Tillich)이 지적하듯이 용서와 구원의 원칙은 나라들이나 개인들에게 똑같이 적용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 그 능력은 국가나 개인에 상관없이 다같이 적용되기에 나라든 개인이든 하나님의 위력과 용서의 은혜를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7. 마감하는 말- 용서 화해하는 일이 평화

화해는 나와 너와의 관계회복을 의미합니다. 즉 관계정상화를 의미합니다. 계층간의 갈등, 이데올로기적 갈등, 신앙유형의 갈등, 남북분단에서 오는 갈등, 이 갈등에서 오는 민족사적 비극, 반평화적 세력의 공격에서 오는 갈등의 사회에서 교회는 화해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화해의 역사에의 동참인 것입니다. 이 화해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은 바람과 같아서 어디로부터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형태도 없습니다. 성령은 물과 같아서 네모난 그릇에 담으면 네모가 되고, 둥근 그릇에 담으면 둥근 원이 됩니다. 화해는 성령을 닮아야 가능한 것입니다. 바나바는 성령을 닮았던 화해 자였다고 사도행전은 증언합니다. 화해가 선포되는 데에 변화가 나타납니다. 증오가 사랑으로, 싸움이 평화로, 원수가 친구로 바뀌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화목과 평화를 바라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평화 위해 애쓰며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평화 위해서 얼마나 투쟁했고 평화 위해서 얼마나 희생을 당했는가 점검해 봐야 합니다. 오히려 '평화유지'라는 미명하에 전쟁준비, 전쟁연습하고 있는 지금 세계는 하나의 거대한 화약고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한번 전쟁이 일어나면 지구는 불덩이가 되고 인류의 생존은 어려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화해의 본체이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주님의 화해정신으로 신앙의 진실성을 나타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화해의 직무를 주셨다고 바울은 말씀합니다(고후 5:18). 증오와 분쟁이 많고 위기에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화해자가 되고 그리스도의 평화를 삶으로 증언하는 자이어야 합니다. 화해가 이루어지는 그때 사랑과 평화, 진정한 생명이 넘칠 것입니다. 진정한 화해의 마당이 우리 한반도 한민족에게 이뤄질 때 우리는 서로 만나 하나됨의 기쁨과 하나님의 정의. 평화. 생명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작은 일에서부터 가까운 이웃과 화해의 마당을 마련하는 일에 동참합시다. 우리 모두에게 용서와 화해 실현, 평화가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글ㅣ이기영 목사(기장 총회)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제공>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이기영 #목회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