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14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16세기 초반, 1517년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기독교 역사의 지각 변동을 가져왔다.
그후 17세기에 들어서는 종교개혁자들간의 진리에 대한 변론과 기존 카톨릭의 반발등으로 인해 종교전쟁을 방불하는 교리 논쟁이 계속되었다.

중세 사회는 진리의 각성없이도 피상적인 평화을 유지해왔다.
그런데 진리의 각성으로 소요가 점증되고, 지나친 교리 논쟁으로 기독교는 기존질서를 위협하는 맹신집단으로 비쳐지게 되었다.

한편 유럽 사회는 18세기에 들어와 과학혁명이 본격화되면서 인간의 이성에 기초한 합리적 사고를 추구하는 지성운동인 계몽주의가 등장하게 되었다.
계몽주의의 사조는 기독교 안에까지 영향을 끼치게 된다.

기독교 진리는 오직 '계시'로만 알 수 있다.
그런데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기독교 진리를 이성으로 제한하였고, 이는 계시의 하나님, 인격의 하나님을 이성의 하나님, 합리적 하나님으로 대체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것으로 이치에 합당한 하나님을 믿는 '이신론'(理神論)이 시작된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 기독교의 과격함과 광포성이 한 몫을 한 것이 사실이지만..

현대 사회는 계몽주의 덕분으로 놀라운 과학의 발전과 함께 풍요한 사회를 누리고 있다.
이와 더불어 현대의 기독교 안에 교묘히 위장된 '이신론' 사상이 팽배해 있다.
신앙생활의 근본은 성육신하신 인격자안에서 살아가는 믿음과 복종의 실제에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신앙고백이라는 이치(이념)에 동의하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다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대다수 신자들이 진리에 대해 동의하지만, 진리를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는다.

오늘 아침, 갈라디아서 말씀을 묵상하며, 내 영혼이 폭풍을 만난듯 요동친다.
나는 진리에 동의하는 자인가, 진리를 행동하는 자인가!
내면의 물음이 내 영혼을 뒤흔들고 있다.

예수님의 수제자요, 초대교회 기둥이며, 복음의 거목인 베드로.
적어도 14년 이상, 바울과 함께 복음의 진리를 이방에 전한 안디옥 교회의 수장 바나바.
그리고 복음을 세계로 확장시킨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들.

이들은 모두 복음의 진리에 동의하지만, 복음의 진리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아.. 진리에 동의하는 것과 진리를 행동하는 것이 이처럼 난제인가!
숨이 멎는듯한 탄식앞에서 내 영혼 적막에 휩싸인다.

안디옥의 회식 자리는 베드로, 바나바, 유대인들, 바울, 그리고 이방인 다수가 함께 하였다(12절).
그런데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회식 자리에 나타난다.
이들은 순회 전도자들로서,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이들이며, 할례를 받아야 구원이 완성된다고 강변하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런데 복음의 진리를 알고 있는 베드로가 이들을 보자 반사적으로 이방인과 함께 한 그 자리를 떠난다.
이는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금지한 유대 관습을 어긴 것을 본 할례자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12절; 베드로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더나 물러가매).

그러자, 남은 유대인들도 자리를 뜨고, 심지어 이방인 중심 교회인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인 바나바마저 거기에 유혹되어 자리를 떠나게 된다.

바울은 베드로나 바나바에 비하면 비교조차 안되는 풋내기 사도이다.
그런데 바울은 베드로가 복음의 진리대로 행동하지 않음을 보고 모든 사람앞에서 책망하기 시작한다.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동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14절).

베드로가 복음의 진리를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는 여기 안디옥에 오기 직전, 예루살렘에서 복음의 진리를 담대히 변호하고 수호하였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행 15:11).

베드로는 복음의 진리에 동의했으나 할례자들이 나타나자, 반사적으로 복음의 진리에 역행하여 행동한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외식, 거짓행동이라고 책망한다.
진리에 동의하지만, 진리대로 행동하지 않는 것, 이것은 거짓 행동이자, 거짓 신앙인 것이다.

이 아침, 어떤 상황에 봉착하면 복음의 진리대로 행동하지 않는 베드로와 바나바가 내 속에 있음을 보게 된다.
복음의 진리를 알고, 전하고, 자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순간, 복음의 진리대로 행동하지 않는 나를 발견한 것이다.

복음의 진리에 동의하는 것과 복음의 진리를 행동하는 것, 실제의 삶에서 그 간격을 목도하며 가슴이 미어지는듯 고뇌스럽다.
나는 복음의 진리대로 행하지 않음, 그 유혹앞에서 성령의 책망을 받아 마땅하다.
"왜 너는 복음의 진리대로 행동하지 않느냐!"

복음의 진리대로 행동하게 하는 것.
동의와 행동의 간격을 메꾸는 것은 복음의 진리를 견고히 하는 것외에 없다.
피상적으로 아는 복음은 동의는 가져올 수 있으나, 행동에 이르게 하지는 못한다.

오늘 바울이 성령의 감동으로 증거하는 복음의 진리는 율법의 행위와 대립된다.
이방인은 자타가 공인하는 죄인이다. 그런데 유대인은 스스로 죄인임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을 믿고 있으며, 하나님이 부여하신 종교행위들을 준수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의롭게되기 위해 그리스도께 나왔더니, 죄인인 것이 밝히 드러난 것이다.
"우리 유대인응 의롭다 함을 얻으려고 그리스도께 나왔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이 밝히 드러났습니다"(17절, 쉬운성경).

유대인들은 지금까지 죄인이면서, 그 사실을 모르고 거룩한 율법을 지키려고 한 것이다.
거룩한 존재만이 거룩한 율법을 지킬 수 있다.
유대인들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것은 죄인이 거룩하게 되려는 것과 같은 것으로 스스로 속는 것이며, 하나님앞에서 가당치 않은 일이다.

율법은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밝히 드러낸다(롬 3:20).
그리고 율법이 내리는 판결은 '죽음'이다(롬 1:32, 5:12, 6:23).
그러므로 율법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죽어야 하고, 그 모든 사람안에 내가 있다.
바울은 율법이 내리는 죽음의 판결을 분명히 알았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대신하여 율법에 의해 죽었음을 계시로 깨닫게 되었고, 이 복음의 진리를 행동으로 옮기며 산 것이다.

"나는 율법에 의해 죽었습니다.
내가 율법을 향해 죽은 것은 하나님을 향해 살기 위함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내 몸 안에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구하시려고 자기 몸을 바치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 2:19-20, 쉬운성경).

그렇다.
모든 사람은 율법이 내리는 심판,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내가 당해야 할 율법에 의한 죽음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담당하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다.
죽은 내가 사는 것, 그것은 오직 나를 사랑하셔서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얼마나 분명한 복음의 진리인가!
예수 믿는 것은 먼저 죄인임이 밝히 드러나는 것이다.
율법이 재판한 죽음과 저주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저주와 죽음을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대신하셨다.
이 은혜를 믿는 자는 율법에 의하여 죽은 자이다.
더이상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닌,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도록 하는 것,
이것이 복음의 진리대로 사는 것이다.

베드로와 바나바가 '복음의 진리대로' 행하지 않은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자기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사시도록 하는 믿음으로 산 것이 아닌,
옛 사람인 유대인으로 반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진리에 동의했을지언정, 진리대로 행하지 않는 것이다.

진리대로 행하는 길은 오직 하나이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도록 하는 것이다.
내 기준대로 살지 못해 나를 자책하고, 옳고 그름을 따지고 하는 옛 사람은 율법에 의해 십자가에서 죽었다.

죽은 나를 끌어내서 살지 말고, 오직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사는 것, 이것이 내게 주신 은혜를 헛되이 하지 않는 일이다.

나를 보면 절망한다, 세상을 보면 절망한다.
그러나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는 절망하지 않으신다.
그 분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시기까지 하셨다.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로 인해 절망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내가 오늘을 사는 근거이며, 복음의 진리대로 행하는 것이다.

이 아침, 다시한번 영으로 깨닫는 복음의 진리 앞에 서 있다.
말씀의 빛은 언제나 나의 존재의 실체를 드러낸다.
베드로와 바나바, 그들이 바로 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율법의 의해 이미 죽었다.
이는 하나님을 향해 살도록 하기 위함이다.

내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
진리를 동의하는 자가 아닌, 진리를 행동하는 자로 이끄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한다.

♦묵상 기도

아버지..
나는 복음의 진리를 잘 알고 있습니다.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옛 사람은 복음의 진리를 행동으로 드러내는데 올무가 되고 있습니다.
나의 옛 사람안에 복음의 진리대로 행하지 않는 베드로와 바나바가 있나이다.

혼돈과 충격앞에서 영으로 다시한번 복음의 진리를 깨닫습니다.
십자가에 죽기에만 합당한 죄인인 것도 모르고,
지킬 수 없는 규율을 정하고, 나의 기준을 정해놓고,
그대로 되지 않으면 좌절하고 낙심하고..
종을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저는 율법의 의해 죽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오직 하나님을 위해 사는 자가 되었습니다.

성도들이 복음의 진리앞에 무너져, 오직 그리스도로 사는,
하나님의 존재를 향유하는 이들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서형섭 목사는...

서 목사는 하나님의 검증을 마친 영적지도자다. 한국외대에서 경영학(B.A.)와 연세대 경영대학원 경영학(MBA)를 졸업하고, 서울신대 신학대학원 목회학(M. Div.)을 공부했다. 논문 '말씀묵상을 통한 영적 훈련'(Spriritual Training through Meditiatioin on the Word)으로 풀러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D. Min.) 학위를 받았다.

그는 지난 2000년 반석교회를 개척하고, 치유상담연구원에서 6년간 수학 후 겸임교수를 지내며 동시에 한국제자훈련원에서 8년간 사역총무를 역임했다.

현재 서형섭 목사는 말씀묵상선교회 대표로 섬기며 특히 '복음과 생명', '말씀묵상과 기독교 영성'에 깊은 관심을 갖고 저술과 세미나 사역에 집중하고 있다.

저서로는 <말씀묵상이란 무엇인가>(갈릴리, 2011년)와 최근 출간된 <복음에서 생명으로>(이레서원, 2013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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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말씀묵상선교회 #서형섭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