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13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14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15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16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17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18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9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21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22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23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24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25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

모든 시대 기독교 복음은 토속종교의 토양 위에 심겨지고 발아된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복음이 들어간 나라와 종족의 종교성과 결합된 혼합신앙의 양상을 보이게 된다.
이것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나 불가피한 기독교 신앙의 현실이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여 세운 고린도교회도 역시 혼합신앙을 피할 수 없었다.
특히 고린도교회에 문제된 것은 영적 은사였고 그 중에서도 방언의 은사였다.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비밀스런 언어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은사이다.
그런데 방언은 초자연적인 특성으로 인해 외견상 이방종교에서 경험하는 신들린 현상이나 황홀경의 체험과 비슷한 것이었다.

방언의 초자연적인 기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나, 그것만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방언의 은사가 지닌 중대한 결함은 그 은사가 예수는 주라는 복음을 '명확하게' 표현해내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따라서 방언은 복음전파의 수단으로서는 매우 부적절한 것이다.

예언의 은사는 방언의 은사보다 상대적으로 우월하다.
영적은사를 사모하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예언의 은사가 풍성하기를 구할 것이다(12절).
신약성경이 확정되지 않은 당시 상황에서 '예언'은 그리스도에 대한 직접증거로서 그가 성취한 구원의 말씀이며, 그에 대한 가르침이다(4,6절).

그러므로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구할 것이다(13절).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사람의 영이 기도하는 것이나 그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14절).
여기서 '마음'은 적절하지 못한 번역이며 '이성' 또는 '생각'(헬-누스. 영-mind, understanding)으로 번역함이 타당하다.
헬라어로 마음은 '카르디아'이며 영어표현은 '하트'(heart)이다.
"만일 내가 방언으로 기도하면 내 영은 기도할지라도 '내 이성'은 이해하지 못합니다"(두란노 우리말성경).

바울은 영으로 기도하고 이성으로 기도고 영으로 찬송하고 또 이성으로 찬송한다(15절).
그렇지 않고 영으로만 감사(축복)하며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는 자가 어찌 아멘할 것인가?(16절).
영으로 감사하는 자는 자기에게 덕을 세울지 모르나 다른 사람에게는 덕을 세우지 못한다(17절).
바울은 다른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많이 하여 하나님께 감사한다(18절).
하지만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 일만 마디라도 알아듣는 다섯 마디 말보다 더 못하다(19절).

바울은 '형제들아'라고 하며 애정을 갖고 간곡히 부탁한다.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될 것이다.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될 것이다.
헬라어에서 '지혜'는 '소피아'를 사용한다.
그런데 여기서 '지혜'로 번역된 헬라어는 신약성경 전체에서 본 절에서만 2번 나오는 단어로서 '페렌'(φρεν)이다.
그 뜻은 '인식하고 분별하는 기능'(the faculty of perceiving and judging)을 말한다.
곧 '페렌'은 생각하는 기능으로서 '이성'(understanding, mind, thinking)에 있어 장성한 자가 되라고 충고한다.

바울은 신들린 현상이나 황홀경의 체험을 좋아하는 성도들에게 애정으로 권면한다.
그들이 진리에 대하여, 복음에 대하여 인식하고 분별하는 이성적 능력을 갖추라고 말한다.
그렇지 않은 신앙은 끝까지 유아기 수준에 머물기 때문이다.
"형제들이여, 생각하는 데는 어린아이가 되지 마십시오. 악한 일에는 어린아이가 되고 생각하는 데는 어른이 되십시오"(20절, 우리말성경).

계속해서 바울은 방언의 또 다른 한계점을 설명한다.
율법에 기록된 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를 위하는 표적이다(21-22절).
바울이 인용한 율법은 '이사야 28장 11절'이하이다.
원래 율법은 구약성경만을 지칭했는데, 랍비들은 선지자들을 모세 율법의 해석자로 보았다.
그래서 선지자들의 말도 '율법'이라고 하고, 가끔 구약전체를 율법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이런 언어관행에 따라 바울은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율법'이라고 칭한다.

방언이 불신자에 대한 표적인 것은 그들이 방언하는 자를 보고 '미쳤다'고 하기 때문이다.
온 교회가 모여 방언만 하면 방언을 하지 못하는 자나 불신자는 이것을 보고 '너희가 미쳤다'고 한다는 것이다(23절).
그러나 교회가 모여서 다 예언을 하면 불신자나 방언을 하지 못하는 자들도 양심의 책망을 받는다.
그로 인해 심판에 이르고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므로 엎드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고 외칠 것이다(25절).

바울은 크게 두 가지 면에서 예언의 은사가 방언의 은사보다 낫다고 말한다.
첫째, 방언의 은사는 개인에게 덕을 세우나 예언의 은사는 교회에 덕을 세우기 때문이다(4절).
둘째, 방언의 은사는 불신자를 믿음으로 이끌지 못하나 예언의 은사는 불신자를 믿음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예언의 은사가 믿는 자에게 표적이 되는 것은 죄를 깨닫고 회개케 하여 믿음으로 이끌 수 있는 힘을 가져 사람들(불신자를 포함)로 하여금 믿는 자가 되게 하기 때문이다.
예언의 은사가 방언의 은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두 번째 이유 때문이다.

오늘 말씀에서 예언의 본질이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그것은 은사로서 예언이 개인사를 말하거나 장래 일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예언은 그 마음의 숨은 이들을 다 드러내어 죄를 깨닫게 하고 심판에 이르게 하는 말씀이다.
이는 히브리서 4장 12-13절에서 언표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자신의 현존이며(살았고), 심판을 집행하는 말씀이다(운동력 있으며).
이 말씀은 좌우에 날선 검보다 예리하며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
곧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우리 마음의 생각과 뜻까지 드러내어 심판한다.
하지만 대제사장 되신 그리스도는 말씀 앞에서 두려워하며 떠는 자, 심령이 상한 자를 동정하시며 함께 느끼신다.
나아가 그를 용서하시고 은혜의 보좌, 지성소에 계신 아버지께로 이끄신다(히 4:16; 히 10:19-22).
그러므로 숨은 죄를 드러내어 심판에 이르게 하는 예언의 말씀은 심판하시기 위해 현존하시는 하나님 자신으로서 말씀인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말씀을 깨닫고 분별하는 지성(이성)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형제로 부르면서 이 점에서 성숙한 자가 되라고 촉구하고 있다.

성도 개인의 성숙은 교회의 성숙과 직결된다.
교회는 진리에 무지한 대중의 상태에 묶여 있지 않으며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각성을 통해 성숙의 자리로 나아간다.
그것은 감정의 기능이 아니라 이성의 기능에서 발현된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실 때 그들의 이성을 열어주셨다.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눅 24:45).
"Then he opened their minds so they could understand the Scriptures"(NIV).
마음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누스'이며 깨닫고 분별하는 이성을 말한다.

이제 우리에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 진리의 영이 성경을 깨닫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되, 이성(헬 디아누스, '누스'(이성)의 파생어)의 눈을 열어 주시는 것이다(엡 1:17-18).
우리 성경에는 '마음의 눈'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원문의 직역은 '이성의 눈'(the eyes of your understanding)이다(KJV).

그리할 때 죄를 깨닫고 십자가로 나아가며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간다.
그 결과 창세전 하나님이 주신 약속, 소망으로서 영생의 부요함을 누리며, 죽음에서 살리신 부활의 권능을 힘입어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엡 1:18-19).

바울이 애정을 다하여 외치는 말씀은 오늘 한국교회를 향한 외침이다.
거대한 양적성장에도 불구하고 토속적 종교성과 감정적 은사, 나아가 신비적 체험에 몰입하는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마땅히 깨어날 때가 되었다.
이제는 진리를 깨닫고 분별하는 지성에 있어 성숙한 자가 되지 않으면 안되는 때가 된 것이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은 진리를 깨닫고 분별하는 지성을 일부 목사들까지도 등 돌린다는 것이다.
목사들 안에 진리에 대한 반지성주의가 팽배하고 기독교 신앙을 이성과 상반되는 감정적 신비적인 것으로 표현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그런 목사들은 평신도들로 하여금 자신의 설교만으로, 자신의 가르침에 매달리게 한다.
평신도들이 성경의 진리를 알고 나아가 신학에 관심을 가지면 위험한 것으로 치부한다.

그 명분은 '교회에 덕이 안 된다' '교회를 혼란하게 한다'이지만, 내심으로는 '골치 아프다' '목회하기 힘들다' '설교 못하겠다'등으로 이유를 댄다.
깊이 있는 묵상을 하려고 하면 위험하다고 하며 원시적인 Q.T만 하게 한다.
성경도 역사성도 진리성도 무시한 채 문자적으로 주~욱 읽어서 '은혜'(?)받도록 가르친다.
그러다보니 많은 성도들이 성경과 신학에 있어서, 기독교 가치관과 세계관에 있어서 무지 속에 갇혀 있다.
설령 고등교육을 받은 신자들까지도 복음의 핵심진리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겉도는 신앙생활을 하며 유아기적 신앙상태에 고착되어 있다.

진리에 대해 알지 못하는 신앙의 반지성주의 필경 신앙의 미신화를 조장한다.
그리고 편파적인 지도자를 절대의존하게 만드는 교주주의 신앙을 낳는다.
무지에서건 두려움에서건 편파적인 교회 지도자들은 '목회 효율성을 통한 양적성장'이 절대가치이다.
그들은 신자들이 주일출석 잘하고 십일조 잘하고 교회봉사 잘하고 전도에 힘쓰게 하는 등 통속적인 경건의 습속들에게만 매달리게 한다.
그리고 그런 신자를 가리켜 최고라고 하며 본받으라고 말한다.

이것은 개신교의 기본적인 원칙을 저버리는 처사이다.
곧 성도 각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새 언약 백성의 본분을 저버리게 하는 몰각한 행태인 것이다.
그러다보니 성도들은 계속 미숙한 상태에 머물고 위기의 홍수가 범람하면 교회 전체가 소용돌이친다.
무엇보다 진리 안에서 즐거워하는 신앙의 절대적 가치를 망실한 채 세상의 재미에 목을 축이며 갈수록 비참한 상태로 전락하고 만다.

그렇다고 희망은 없지 않다.
곳곳에 숨은 진실한 종들, 목회자들이 포진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성도를 주님의 양으로 알고,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한다.
이들의 관심은 더 이상 양적성장이 아니라 성도들이 복음을 바로 알고 합당한 삶을 살도록 하는데 있다.
세상의 재미가 아닌 말씀을 즐거워하며 말씀을 양식 삼는 성도되기를 사모한다.

교회 역사에서 볼 때 아무리 캄캄한 흑암의 시대에도 하나님은 일하셨다.
지극히 소수라도 진리를 알고 분별하고 행하는 남은 자를 두셨다.
하나님 나라의 새 언약 백성은 생명의 말씀으로 오늘도 창조된다.

♦묵상 기도

아버지여...
진리를 알고 분별하는 데 심히 어린아이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목사라고 하고 목회를 한다고 떠들어했는지요!
아, 저 자신이 수치스럽고 경멸스러울 따름입니다.
어찌하여 그리도 오래 참으셨나이까?
무지 속에 갇혀 광란의 질주를 하던 자, 어찌하여 십 수 년을 참으셨나이까?
참으로 몰라서 그랬나이다! 주를 사랑하여 주께 바친 인생일진데 몰라서 그러했나이다.

아버지...
심판의 자리에서 깨닫게 하신 은혜가 기이합니다.
이미 말씀하셨으나 황폐한 자리에서 비로소 깨달았나이다.
이는 당신의 고의가 아니라 나의 완고함이 하늘을 찔렀기 때문입니다.
죽기에만 합당한 자, 아들의 무덤을 예비하셨나이다.
그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알고 살게 하셨나이다.

아버지여...
이 땅을 돌아보소서. 당신의 교회와 당신의 백성들을 돌아보소서.
저들의 이성을 깨우소서. 진리를 알고 분별하는 생각을 깨우소서.
통속적인 신앙습속에 물들어 있는 수많은 백성들을 깨워주소서.
여전히 토속적 신앙에 매몰되어 있는 이들을 일으켜 세우소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보내사 생각의 눈, 이해의 눈을 여소서.
주여, 종을 불쌍히 여기심같이 저들도 불쌍히 여기소서.
특별히 알지 못해서 행하는 당신의 종들을 깨워주소서.
주께서 원하시면 그리하소서. 주여, 원컨대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서형섭 목사는...

서 목사는 하나님의 검증을 마친 영적지도자다. 한국외대에서 경영학(B.A.)와 연세대 경영대학원 경영학(MBA)를 졸업하고, 서울신대 신학대학원 목회학(M. Div.)을 공부했다. 논문 '말씀묵상을 통한 영적 훈련'(Spriritual Training through Meditiatioin on the Word)으로 풀러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D. Min.) 학위를 받았다.

그는 지난 2000년 반석교회를 개척하고, 치유상담연구원에서 6년간 수학 후 겸임교수를 지내며 동시에 한국제자훈련원에서 8년간 사역총무를 역임했다.

현재 서형섭 목사는 말씀묵상선교회 대표로 섬기며 특히 '복음과 생명', '말씀묵상과 기독교 영성'에 깊은 관심을 갖고 저술과 세미나 사역에 집중하고 있다.

저서로는 <말씀묵상이란 무엇인가>(갈릴리, 2011년)와 최근 출간된 <복음에서 생명으로>(이레서원, 2013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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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말씀묵상선교회 #서형섭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