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1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6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7 혹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8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
9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10 이같이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11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외국인이 되리니
12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고린도교회 안에는 영적 은사가 풍성하였다(1:7).
그런데 그들은 영적 은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하였다.
특히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와의 관계에서 은사의 의미를 알지 못하였다.
여러 지체가 모여서 한 몸을 이루듯, 영적 은사 또한 그 자체로는 교회를 구성하지 못하며 다른 은사들과 상호 의존하여 교회를 구성한다.

바울은 여러 가지 은사를 열거하다가 '더 유익한 은사'(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은사를 사용하는 좋은 길로 '사랑'을 제시한다(12:31).
이것은 각종 은사를 받은 자들이 사랑으로 그 은사를 실천할 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뜻한다.

고린도전서 12장 31절은 고린도전서 14장 1절로 이어진다.
영적은사는 사랑으로 실천하되 특별히 예언의 은사를 구할 것이다(1절).
'특별히'(헬, 말론)는 최상급이 아니라 비교급이며, 방언과 예언의 은사를 비교하고 있다.
방언은 하나님이 주신 좋은 은사중의 하나이므로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고 그것을 멸시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교회의 덕을 세우는 면에서 방언의 은사는 예언의 은사보다 더 못하다.

방언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며,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한다(2절).
이와 달리 예언은 사람에게 말하며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위로를 한다(3절).
이로써 방언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운다(4절).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방언하기를 원하나, 그보다는 예언하기를 원한다(5절).
교회에 덕을 세운다는 점에서 예언하는 것이 통역 없이 방언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5절).
그가 만일 고린도교회에 가서 방언만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교훈을 말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6절).
그것은 피리나 거문고가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않은 것과 같고 나팔이 분명치 않은 소리를 내는 것처럼 무익하다(7-8절).

이처럼 알아듣지 못한 방언을 사람에게 하면 허공에 대고 말하는 것과 같다(9절).
세상에 많은 소리가 있으나 뜻 없는 소리는 없는 법이다(10절).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서로에게 낯선 자가 되듯, 교회안의 성도들도 그러하다(11절).
그러므로 영적 은사를 구하는 자는 교회에 덕을 세우는 (예언)의 은사가 풍성하기를 구할 것이다(12절).

바울은 방언의 은사를 예언의 은사와 비교하되 예언의 은사를 우위에 둔다.
이것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비밀스러운 현상으로 보이는 방언의 은사에 깊이 매료되었음을 반영한다.
실제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신들린 현상이나 황홀경의 체험을 동반하기에 충분히 매력적이다.

하지만 영적 은사의 목적은 그 자체에 있지 않으며 교회를 세우는 것에 있다.
이 점에서 방언의 은사는 성찰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예언의 은사보다 결코 앞서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한편 본장에서 말하는 예언의 은사는 개인사를 알려주거나 장래 일을 맞추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예언은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위로하는 메시지(설교)이다(4절).
또한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나 지식이나 교훈이나 성령의 감동으로 전하는 메시지(복음 설교)이다(5절).
그러므로 은사로서 예언은 본질적으로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과 관련되어 있다.

초대교회에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직접증거와 간접증거가 있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간접증거는 그리스도가 선지자들이 예언한 구약성경을 성취하였다는 점에 초점을 맞춘다.
이와 달리 그리스도에 대한 직접증거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한 구원에 대한 것으로 그 목격자된 사도들에 의해 증거되었다(행 1:22).
지혜와 지식의 말씀이 구약성경을 통한 그리스도에 대한 간접증거라면, 예언은 성령의 감동을 통한 그리스도에 대한 직접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직접 증거는 후에 신약성경으로 완성되었다(397년 최종확정).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는 곧 복음이다.
이는 듣는 자를 생명으로 인도함으로써 '성도 개인으로서 교회'를 세운다.
그리고 이들은 '모임으로서 교회'를 세운다.

오늘날 어떤 은사자들은 예언의 은사를 그리스도의 증거와 무관하게 적용한다.
개인사나 개인의 영적상태, 심지어 장래 일을 예측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믿음의 기초가 취약한 채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이들은 여기에 미혹되기도 한다.

방언은 하나님과 비밀스럽게 소통한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유익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은사는 성령의 증거로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다.
듣는 자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하나님과 사귐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다.

묵상 기도

아버지...
돌아보면 부끄럽고 부끄러운 것뿐입니다.
여러 가지 은사를 받았으나 은사에 무지한 자이었습니다.
무지하니 왜곡하면서도 그것이 옳은 줄 알았습니다.
개인사를 위해 방언을 하고 통역하는 것으로 심히 교만한 자였습니다.
그것을 그치게 하셨으나 여전히 무지 속에 갇혔습니다.

아버지...
신들린 현상, 무아지경의 방언보다 예언이 더 큰 은사입니다.
그런데 예언까지도 오해하여 그리스도의 증거와 무관하게 사용하였습니다.
보내신 영혼들을 생명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건물교회로 이끌었습니다.
복음, 언약, 생명, 하나님 나리에 무지하니 패역한 자임을 알지 못했나이다.

아버지여...
오래도록 참으신 하나님은 공의로 심판하셨습니다.
심판의 자리에서 모든 것이 밝혀졌습니다.
말씀 앞에 잠잠히 머물고서야 참과 거짓이 드러났습니다.
은사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망둥이처럼 뛴 자, 죽기에만 합당하며 무덤에 거해야 합당한 자입니다.
오늘도 무지한 자, 말씀으로 깨우시니 은혜이옵니다.
더욱 큰 은사,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은사가 풍성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서형섭 목사는...

서 목사는 하나님의 검증을 마친 영적지도자다. 한국외대에서 경영학(B.A.)와 연세대 경영대학원 경영학(MBA)를 졸업하고, 서울신대 신학대학원 목회학(M. Div.)을 공부했다. 논문 '말씀묵상을 통한 영적 훈련'(Spriritual Training through Meditiatioin on the Word)으로 풀러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D. Min.) 학위를 받았다.

그는 지난 2000년 반석교회를 개척하고, 치유상담연구원에서 6년간 수학 후 겸임교수를 지내며 동시에 한국제자훈련원에서 8년간 사역총무를 역임했다.

현재 서형섭 목사는 말씀묵상선교회 대표로 섬기며 특히 '복음과 생명', '말씀묵상과 기독교 영성'에 깊은 관심을 갖고 저술과 세미나 사역에 집중하고 있다.

저서로는 <말씀묵상이란 무엇인가>(갈릴리, 2011년)와 최근 출간된 <복음에서 생명으로>(이레서원, 2013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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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말씀묵상선교회 #서형섭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