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고린도교회 안에는 영적 은사가 부족함이 없이 넘쳐났다(1:7).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영적은사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였다(12:1).
그래서 바울은 그들이 영적 은사에 무지하지 않기를 소원하며 이에 대해 가르친다.

영적인 은사는 성령이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다(12:11)>
이것은 몸과 지체로 유비되는데, 여러 지체가 한 몸을 이루듯 각양의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한다.
몸을 구성하는 지체들은 다른 지체들을 통해 온전하게 되듯, 하나의 은사는 다른 은사들을 통해 몸을 구성하며 온전하게 된다.
아무리 탁월한 은사라도 그것만으로는 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도리어 부족해 보이는 은사가 더 존귀하며 하나님이 그 은사를 아름다운 것으로 채우신다.
그래서 어떤 은사라도 다른 은사와 비교될 수 없으며, 자랑할 수도 없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방언보다) 더 큰 은사인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예언의 은사를 논하기 전 여러 가지 은사를 유효하게 하는 길로 '사랑'을 제시한다.
특히 그는 '내가...'라고 하며 자신의 이름을 빌어 고린도교회 안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네 가지 은사를 예시하고 있다.
곧 방언의 은사, 예언의 은사, 믿음의 은사, 구제의 은사가 아무리 탁월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사랑이 없는 은사는 '무'(nothing)로 돌아가며 무효케 된다.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된다(1절).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는 당시 헬라의 신비종교에서 광란의 의식 때 쓰이는 도구들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체험을 상기시키며, 사랑이 없는 방언은 그들의 과거 이방종교 의식에서 행한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한다.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2절).
예언의 은사는 성령의 감동으로 전하는 메시지이다.
그것이 비밀로 표현된 것은 복음을 통해 알려진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이다(2:7).
여기서 지식은 복음의 계시로부터 이끌어낸 도덕적 의미들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신앙생활에서 알아야 할 것을 다 알아도 사랑이 없으면 무효가 된다고 강조한다.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2절).
여기서 믿음은 구원 얻는 믿음이 아니라, 은사적 믿음으로써 능력을 행하는 믿음을 말한다.
'산을 옮긴다' '뿌리 채 뽑다'라는 표현은 격언적 표현으로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런 믿음이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효력이 없다.

또한 모든 소유를 다 내어주되 그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3절).
자기희생적 섬김이 정상에 이르러도 사랑이 없으면 무익한 것이다.
따라서 모든 영적 은사는 사랑으로 행할 때 효력을 발휘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6).

그러면 모든 은사를 효력 있게 하는 '사랑'이 무엇인가?
바울은 '사랑'을 주어로 하여 열다섯 개의 동사들로 사랑이 무엇인지 기술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온유하며 시기하지 않으며 자랑하지 않으며 교만하지 아니한다(4절).
오래 참음은 해를 끼치는 자에게 복수하지 않고 견디어냄을 의미한다.
친절함은 해를 끼치는 자에게 선을 베푸는 것을 말한다.
시기, 자랑, 교만을 금하는 것은 겸손의 덕과 연관된다.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으며 자기 목적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내지 않으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5절).
'무례히 행하다'(헬, 아스케모네이)는 어떤 남자가 처녀의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나서 그녀와 결혼하기를 거부하는 경우에 쓰이는 말이다(7:36).
이와 같은 경우처럼 다른 사람에게 부당한 대우를 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자기목적을 구하지 않는 것은 단지 자신에게 속한 것을 구하지 않는 것뿐 아니라, 자기가 마땅히 취해야 할 것조차 다른 이들을 위해서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는 것을 뜻한다.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남을 악평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자신에게 악을 저지른 자를 용서함으로써 그 악을 나에 대한 그의 빚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상대방이 나에게 저지른 악행을 계산해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에 대하여 기뻐한다(6절).
불의를 기뻐하는 것은 남을 흠잡거나 그로 인한 우월감에서 즐거워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들추어내고 지적해서 그 자체를 구별하려고 하지 않는다.
대신 진리에 '대하여'(진리와 '함께'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즐거워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지탱하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다.
사랑은 세상을 지탱하는 힘이다(모든 것을 지탱하며- 헬, 판타 스테게이).
유대인 격언집에는 세상을 지탱하는 세 가지 기둥이 율법, 성전, 선행이라고 보았다(Pirqe Aboth 1:2).
유대교에 열심이 있었던 바울은 그 같은 기둥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완성되었다고 보았다.

사랑은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믿음과 소망을 잃지 않는 것이다.
비록 곤경이나 거절의 상황이라도 견디는 힘이 사랑이다.
여기 나오는 열다섯 개의 사랑의 속성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간주된다.
이 사랑은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다.

예언도 방언도 지식도 있다가 사라지나 사랑은 영원하다(8절).
이는 우리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지만 완전한 것이 오면 그것들이 사라지기 때문이다(9-10절).
위에 언급한 세 가지 은사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특히 좋아한 은사들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종말의 때에 모두 사라지며 오직 사랑만이 영원하다.

바울은 말하는 것, 깨닫는 것,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았으나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그 같은 일들을 다 버렸다고 말한다(11절).
사랑 없이 은사만을 추구하는 미성숙한 자이다. 성숙한 자는 그 같은 일을 버린다.
바울은 사람 지도자를 따르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이미 어린아이로 대하였다(3:1).
그런데 은사에 대해서도 그들이 방언을 과대평가하고 사랑을 배제하였기에 어린아이로 대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다(12절).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 때에는 주께서 나(우리)를 아는 것 같이 우리도 온전히 알 것이다(12절).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다(13절).

당시 거울은 청동으로 되어 있어 희미하였다.
지금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희미하고 불완전하다.
특히 종말론적 시점에서 우리가 갖게 될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비하면 그러하다.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지식은 종말의 때에 주어지며 그전까지 아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결국 부분적이다.

그리고 믿음, 소망, 사랑은 현세대에서뿐만 아니라 오는 세대에서도 지속된다.
믿음, 소망, 사랑은 종말이후에도 계속 남아 있을 것이다.
한편 칼빈은 믿음, 소망은 종말의 때에 없어진다고 해석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믿음, 소망,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것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며 하늘에 속한 것으로 영원하다(골 1:4-5; 살전 1:3; 5:8; 벧전 1:3-9).
곧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며, 소망은 영생을 주신 산 소망이며, 사랑은 우리를 그 안에 존재하게 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이다.

영원한 믿음, 소망, 사랑은 기독교의 중심적이고 본질적이고 완전한 요소들이다.
이것들은 모두 영원한 중요성을 띠고 있으나 그 중에서 제일은 사랑이다.
사랑은 만물에 속하지 않으며 인간에게 속하지 않으며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 자신의 본질적 활동이다.
우리가 사랑으로 은사를 행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행하시는 활동을 행하는 것이다.
그 사랑만이 영원하며 그 사랑만이 믿음을 표현하는 증거이다(갈 5:6).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은사에 적용하고 있다.
주석가들은 4-7절(사랑의 15가지 내용)은 이미 다른 계제에 지어 쓰다가 이 서신에서 은사들과 관련하여 새롭게 이용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여기서 '사랑'(헬, 아가페)은 헬라문서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개념으로 별로 특색이 없는 단어이다.

그런데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70인역).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행동을 지칭하는 것(신 7:6-11),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하나님과 이웃에게 마땅히 해야 할 행동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었다(신 6:5; 레 19:18).

헬라인들에게 '사랑'은 주로 '에로스'로 표현되었다.
'에로스'는 '가치에의 끌림'이라는 뜻으로 아가페와 달리 매우 특색 있는 단어였다.
플라톤은 보이지 않으나 궁극적인 세계(이데아)에 대한 열정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보통은 어떤 가치를 가진 대상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행동으로 사용하였다.
주로 지식을 사랑하는 것, 아름다운 여인을 사랑하는 것, 권력을 사랑하는 것 등으로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주장적 사랑의 행위를 표현하였다.

이렇게 에로스는 '자기를 내어주는 하나님의 사랑'과 정반대의 개념이기 때문에 성경에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불교에서 사용하는 '극락'을 '천국'의 개념으로 사용할 수 없는 것과 같았다.
그리하여 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가들은 당시 드물게 쓰이며 특색이 없는 '아가페'라는 단어를 채택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신약성경은 이 전통을 이어받아 죄인들을 위해 자기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행위를 이 말로 표현하게 되었다(요 3:16; 롬 5:8).
이런 배경으로 아가페는 성경적 용어가 되었고 하나님께 속한 신적인 사랑으로서 '자기를 내어주는 희생적 사랑'의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김세윤, 고린도전서 강해).
본래 헬라어에서 아가페는 '내어주는 사랑'의 뜻을 지닌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성경의 언어 사용에서 그런 뜻으로 형성된 것이다.

모든 영적 은사는 자기를 내어주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은사는 아무리 탁월하고 강렬해도 무익하며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은사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그의 사랑 안에 충만히 거하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묵상 기도

아버지여...
이 새벽, 무의 회한만이 가득 밀려옵니다.
무엇을 위해 그리도 달려왔는지요? 사랑 없이 행한 수고, 무가 되었습니다.
아무 것도 아니며, 아무 유익도 없게 되었나이다.
주여, 엎드려 자비를 구하오니 불쌍히 여겨주소서.

아버지...
어찌 황폐한 땅에 이르러야 깨닫는 자 되옵니까?
이는 나의 본성이 심히 완고하고 교만하고 자고하기 때문이옵니다.
사람들의 부당한 처신 앞에서 다시 본성으로 가려는 자를 불쌍히 여기소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기까지 자신을 내어주신 그 사랑을 부어주소서.
내게는 전혀 없는, 상상할 수도 없는 그 사랑을 부어주소서.

아버지여...
이제는 은사보다 사랑을 구합니다.
이제는 사역보다 사랑을 구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리이까?
아들 안에서 당신만이 하실 수 있는 그 사랑을 알기 원합니다.
잠잠하여 그 사랑으로 감당하기 원합니다.
사람도, 사역도, 세상도 그러하기 원합니다. 주여, 나를 도와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서형섭 목사는...

서 목사는 하나님의 검증을 마친 영적지도자다. 한국외대에서 경영학(B.A.)와 연세대 경영대학원 경영학(MBA)를 졸업하고, 서울신대 신학대학원 목회학(M. Div.)을 공부했다. 논문 '말씀묵상을 통한 영적 훈련'(Spriritual Training through Meditiatioin on the Word)으로 풀러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D. Min.) 학위를 받았다.

그는 지난 2000년 반석교회를 개척하고, 치유상담연구원에서 6년간 수학 후 겸임교수를 지내며 동시에 한국제자훈련원에서 8년간 사역총무를 역임했다.

현재 서형섭 목사는 말씀묵상선교회 대표로 섬기며 특히 '복음과 생명', '말씀묵상과 기독교 영성'에 깊은 관심을 갖고 저술과 세미나 사역에 집중하고 있다.

저서로는 <말씀묵상이란 무엇인가>(갈릴리, 2011년)와 최근 출간된 <복음에서 생명으로>(이레서원, 2013년) 등이 있다.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말씀묵상선교회 #서형섭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