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의 말대로 마침내 온 땅에 극심한 흉년이 들었다.
흉년은 애굽뿐 아니라 여러 나라에 미쳤고, 가나안에 거주하던 야곱의 집도 양식을 구하지 못해 곤궁에 처했다. 창세기 42장 2절의 “그리하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통해 당시 상황이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야곱은 아들들에게 애굽으로 내려가 양식을 사 오라고 했지만, 막내 베냐민만큼은 보내지 않았다.
그렇게 요셉은 20여 년 만에 형들을 다시 만나게 됐다. 요셉은 형들을 알아보았지만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다. 요셉은 형들의 마음을 시험하기 시작했다.
그는 형들을 향해 애굽을 엿보러 온 정탐꾼이라고 몰아세웠다. 형들은 결국 사흘 동안 갇혀 있어야 했다. 이후 요셉은 그들에게 막내아우 베냐민을 데리고 와야 진실을 인정하겠다고 말했다.
형들은 살기 위해 양식을 구하러 왔지만 정탐꾼으로 몰렸고, 감옥에서 사흘을 보낸 데다 베냐민까지 데려와야 하는 위기에 놓였다.
이러한 시련 앞에서 형들의 마음에는 변화가 찾아왔다. 창세기 42장 21절을 보면 그들은 갑자기 자신들이 과거에 저질렀던 잘못을 떠올리고 뉘우치기 시작했다.
형들은 애굽에서 겪는 시련을 통해 자신들의 과거를 돌아봤다. 그리고 동생 요셉에게 저지른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었는지를 깨달으며, 지금 자신들이 겪고 있는 고통이 그때의 잘못과 관련돼 있다고 생각했다.
진실로 회개하는 사람은 시련 속에서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는 사람이다. 은혜를 받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의 음성을 들으려는 사람이다.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속에서도 창조주의 숨결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첫째, 감춘 눈물
본문에서 야곱의 절규를 보게 된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창 42:36)
야곱은 이미 요셉을 잃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여기에 시므온까지 애굽에 남게 됐고, 이제는 베냐민마저 잃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그는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라고 탄식했다.
야곱의 아들들이 동생 요셉을 애굽의 노예로 판 지 20여 년이 흘렀다. 애굽의 양식을 관리하는 총리가 된 요셉은 형들을 즉시 알아보았지만 형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요셉은 형들을 시험하기 위해 시므온을 남겨두고, 그들의 자루에는 곡식값으로 받은 돈을 다시 넣어 보냈다. 형제들은 두려움과 당황스러움에 빠졌다. 이런 상황에서 야곱이 모든 일이 자신을 해롭게 한다고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야곱의 생각은 결과적으로 옳지 않았다.
그에게 닥친 일들은 모든 이야기의 끝이 아니라 과정이었다. 시므온은 다시 야곱에게 돌아오게 될 것이며, 20여 년 동안 죽었다고 생각했던 요셉과도 다시 만나게 될 것이었다.
우리 역시 살아가다 보면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라고 소리치고 싶은 순간을 만난다.
그러나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롬 8:28)는 말씀 안에서 우리의 믿음을 더욱 굳게 해야 한다.
요셉은 형들을 만난 뒤 숨어서 울었다. 20여 년 전 자신이 아무리 애원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자신을 팔아버렸던 형들이었다. 요셉은 낯선 이국땅에서 홀로 살아가며 부모와 형제들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형들을 향한 원망과 분노도 있었을 것이다.
이제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팔려왔던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됐고, 자신을 팔았던 형들은 곡식을 구하기 위해 그의 앞에 엎드려 있었다.
복수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용서해야 한다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그 사이에서 요셉의 마음에는 수많은 감정이 교차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형들을 피해 숨어서 울 수밖에 없었다.
살다 보면 사람들 앞에서 울 수 없어 눈물을 감추고 살아야 할 때가 있다. 때로는 베개를 적시며 밤새 울고 싶은 날도 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 눈물을 삼키며 홀로 울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신앙인의 삶에서도 그런 순간이 있다. 용서해야 하지만 마음이 아프고, 사랑해야 하지만 쉽게 품어지지 않을 때가 있다. 그 갈등을 하나님 앞에서 홀로 품고 눈물 흘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자크 티보(Thibaud)의 독주회가 열리던 어느 날, 입장료가 없어 공연장에 들어가지 못한 한 청년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음악회가 끝난 뒤 나오는 관객들을 붙잡고 “공연이 어땠습니까?”라고 물으며 간접적으로 음악회를 경험했고, 남몰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그 청년은 세계적인 음악가가 돼 자크 티보와 함께 무대에 서는 감격을 누렸다고 한다. 그 청년이 바로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이었다고 전해진다.
둘째, 드러낸 눈물
창세기 45장에서 요셉은 마침내 형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그리고 더 이상 정을 억제하지 못해 큰 소리로 울었다. 그동안 감추었던 눈물을 마침내 드러낸 것이다.
요셉은 시종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낸 뒤 형들 앞에서 울었다. 그 울음소리가 애굽 사람들에게 들리고 바로의 궁중에까지 전해질 정도였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그 눈물 속에서 형들의 불의와 요셉의 억울함이 만났다. 형들의 근심과 동생의 용서도 한자리에서 만났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러한 눈물이 필요하다. 남과 북이 서로 만나 함께 울 수 있기를 소망한다. 너와 나 사이에 세워진 담을 허물고, 용서와 화해를 통해 하나 되는 눈물이 있기를 바란다.
완고한 마음에는 눈물이 없다. 그러나 마음이 깨어지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내는 눈물이 있다.
우리도 그동안 감추어 두었던 눈물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그 눈물을 통해 사랑과 용서를 배우며 깨어진 관계를 회복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아들의 눈물
요셉은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도 눈물을 흘렸다 “요셉이 그의 아버지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 맞추고.”(창 50:1)
요셉은 분명 눈물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시신을 보존하도록 했고(창 50:2), 아버지의 죽음을 크게 슬퍼했다. 또한 아버지를 위해 7일 동안 애곡했다.
요셉은 늙은 부모의 말을 가볍게 여기거나, 장례를 치르기도 전에 자신의 이해관계를 앞세우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버지를 향한 사랑과 존경을 마지막까지 지켰다.
요셉의 모습은 부모와 자녀 사이의 관계가 점점 메말라가는 오늘의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넷째, 섭섭한 눈물
요셉은 울고 또 울었다. 아버지의 장례를 마친 뒤 형들은 요셉이 자신들에게 복수할까 두려워했다. 이미 요셉이 그들을 용서했고 17년 동안 함께 살아왔음에도 형들은 여전히 요셉의 마음을 온전히 믿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요셉은 다시 울었다. 자신은 이미 모든 것을 용서했는데도 형들이 여전히 두려워하는 모습이 안타깝고 섭섭했을 것이다.
우리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용서했는데 상대방이 우리의 진심을 알아주지 못하면 낙심할 때가 있다. 때로는 사랑을 포기하고 돌아서고 싶은 마음까지 생긴다.
잠언 28장 1절은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한다”고 말씀한다. 죄책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형들의 모습도 이와 같았다.
그때 요셉은 형들에게 말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자신이 감히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형들에게 복수할 수 없다는 고백이었다.
요셉이 흘린 눈물은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두려움을 거두게 하는 눈물이었고, 절망한 이들에게 다시 소망을 주는 눈물이었다.
우리의 삶에도 이러한 눈물이 있기를 바란다. 상처와 원망을 넘어 용서하게 하는 눈물, 깨어진 관계를 다시 이어주는 눈물, 두려움 속에 있는 사람에게 소망을 주는 눈물이 있기를 소원한다.
또한 한 동족이면서 서로 마주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남과 북이 언젠가 함께 만나 눈물로 화해하고, 하나 됨을 기뻐하는 날이 오기를 소망하며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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