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데이비드 주콜로토 박사의 기고글인 '고난에 대해 말하는 것과 고난 속에 함께하는 것의 차이’(About vs. with: The difference that changes how we suffer)를 7월 1일(현지시각) 게재했다.
주콜로토 박사는 전직 목사이자 임상 심리학자이며 35년 동안 병원, 중독 치료 센터, 외래 진료소 및 개인 진료소에서 근무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정신과 병원에서의 첫날이었다. 간호사는 필자를 휴게실에 앉히고는 세 권의 두꺼운 규정집을 탁자 위에 던지듯 내려놓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오늘은 그냥 이 규칙들이나 읽으세요." 15분 후, 천장 스피커에서 다급한 방송이 울려 퍼졌다. "스트롱 박사님! 스트롱 박사님!" 흰 가운을 입고 수염을 기른 남자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이 결박용 끈들 챙기고, 넥타이는 셔츠 안으로 단단히 집어넣고 당장 날 따라와요. 환자 한 명이 병원에서 도망쳤어요!"
필자는 아직도 그날 오후의 기억을 슬라이드 사진처럼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다. 사슴처럼 내달리며 바람에 거칠게 흩날리던 여자의 머리카락. 주차장을 가로질러 그녀를 뒤쫓아 전력 질주하던 흰 가운 차림의 열 명의 남자들. 창문 하나 없는 좁은 방에서 벌어진 처절한 몸싸움. 공포와 혼란, 슬픔이 아무런 방비 없이 날것 그대로 드러나 있던 그녀의 얼굴. 그리고 모든 상황이 끝난 뒤 벽에 기대앉아 필자가 느꼈던 극도의 피로감과 도무지 이름 붙일 수 없었던 어떤 감정. 그것은 교과서에서는 단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일종의 현기증이었다.
그날 오후 이전까지 필자가 가졌던 것들은 이러했다. 박사 학위, 수년간의 임상 훈련, 그리고 목록조차 다 적을 수 없을 만큼 숱하게 읽어온 심리적 고통에 관한 문헌들. 필자는 정신과적 위기 상황의 신경학적 징후들을 줄줄이 설명할 수 있었다. 심리적 틀과 진단 범주, 다양한 치료 모델들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중 어떤 지식도 필자를 그 순간에 대비할 수 있게 해주지는 못했다. 필자는 더 이상 고통에 '대하여(about)' 읽고 있지 않았다. 필자는 그 끔찍한 고통과 '함께(with)' 있었다.
'대하여(about)' 아는 것과 '함께(with)' 머무는 것. 이 작은 구분은, 사실 인간의 경험에서 가장 중대한 차이를 만들어내는 요소 중 하나다. 이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고통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다른 이들의 고통 곁에 어떻게 머물러야 할지, 나아가 철저히 망가진 세상을 바라보시며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일이 과연 무엇인지 이해하는 방식을 결정짓는다.
삶에 '대하여' 산다는 것은 삶의 바로 바깥쪽에 자리를 잡는다는 뜻이다. 자아는 온전하고 독립된 상태로 한 걸음 물러서서, 안전한 거리를 유지한 채 상황을 묘사하고 분류하며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그것은 나름의 논지를 쥐고 분석의 틀을 통제한다. 사실 이러한 태도는 우리에게 꽤 확실한 위안을 준다. 단지 머리로 분석하는 대상일 뿐인 것은 결코 당신의 내면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어 상처를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의 손에는 고통을 통제할 수 있는 지도가 들려 있는 셈이다.
반면, 삶과 '함께' 산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이는 밖에서 관찰하는 분석가가 아니라 참여자로서 그 끔찍한 경험의 한복판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당신은 눈앞에 펼쳐지는 상황에 무방비로 노출되고, 만져지며, 변화하게 된다. 더 이상 분석 틀을 쥐고 흔드는 주인이 아니라, 그 통제할 수 없는 틀 안에 던져진 연약한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현실을 그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분류하고 측정해야 할 지식의 '대상'으로 취급하는 것과, 당신의 판결 따위는 전혀 기다려주지 않는 압도적인 '실재' 앞에 서서 그것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 사이에는 이토록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대하여'의 입장을 선호한다. 그편이 훨씬 안전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상황 '안'에 매몰되어 있다기보다는 그 상황 '위'에 있다는 우월한 착각을 보존해 준다. 이러한 속성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곳이 바로 '고통'이다. 우리 자신이든 타인이든 고통이 찾아오면, 우리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설명할 논리를 찾는다. 신학적으로 해석하려 들고, 이론을 세운다. 원인을 추적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방어적인 이해의 틀을 짠다. 물론 이것이 진짜 도움이 될 때도 있다. 하지만 때로는, 고통의 생생한 현실로부터 우리가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안전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그토록 설명과 논리에 집착하기도 한다.
그러나 고통은 종종 우리의 그런 알량한 선택권을 가차 없이 빼앗아버리곤 한다. 성경에서 욥의 세 친구만큼 이 사실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인물들도 없을 것이다.
엘리바스, 빌닷, 소발은 꽤 건전하고 탄탄한 신학으로 무장한 채 욥을 찾아왔다. 그들의 교리는 내적 논리가 들어맞았고, 전통에 근거를 두고 있었으며, 일반적인 의미에서 충분히 변호할 만한 것이었다. 그들은 정의의 하나님을 굳게 믿었다. 의인은 보호받고 악인은 결국 멸망한다고 믿었다. 그들의 손에는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완벽하게 그려낸 윤리적 지도가 들려 있었다.
사실 이 이야기 속에는 그들이 가장 빛났던 훌륭한 순간이 존재한다. 입을 열기 전, 그들은 욥의 고통이 너무나 극심함을 보고 칠 일 밤낮을 아무 말 없이 그와 함께 흙바닥에 앉아 있었다(욥기 2:13). 그 침묵의 시간 동안, 그들은 진정으로 욥과 '함께(with)' 있었다. 그들이 욥의 곁을 떠나버린 것은 오직 그들이 입을 열었을 때, 즉 그의 고통을 '설명'하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다.
그들이 입을 열어 쏟아낸 말들의 오류는 신학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관계적인 오류였다. 그들은 욥의 고통에 '대하여' 떠들었을 뿐, 그 고통 속에 그와 '함께' 있지 않았다. 욥의 처절한 고뇌가 자신들의 얄팍한 분석 범주에 들어맞지 않자, 그들은 지도가 실제 영토와 일치하지 않을 때 사람들이 흔히 취하는 행동을 보였다. 바로 '지도'를 맹렬히 방어하는 것이었다. '욥은 분명 숨겨진 죄를 지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상황을 설명할 길이 없다.' 그들은 장장 35장에 걸친 긴 논쟁 내내 그 논리를 들이밀고, 강요하고, 반복한다. 그들은 끝끝내 분석가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필자가 이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숨을 죽이게 되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마지막에 하나님은 그 세 친구를 꾸짖으신다. 그들의 교리가 거짓되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가리켜 말한 것이 욥처럼 정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욥 42:7). 그들의 발언 내용은 대체로 옹호할 만한 것이었다. 문제는 그들의 '태도'가 틀렸다는 데 있었다. 그들은 고통의 바깥에 서서 그것을 해부하고 설명하려 들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정답을 알고 있었지만, 동시에 하나님과는 철저한 타인이었다. 세상의 모든 정답을 다 쥐고 있으면서도, 그분의 '임재' 근처에는 털끝만큼도 닿지 못할 수 있다는 무서운 사실이다.
반면 욥은 친구들이 감히 시도조차 하지 못한 위험을 무릅쓴다. 그는 고통 '안'에 고스란히 머무른다. 그는 하나님과 논쟁한다. 따져 묻고, 격렬히 항변한다. 3,000년 동안 수많은 독자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창조주를 향한 고발도 서슴지 않는다. 귀 기울여 듣다 보면 그의 말은 벼랑 끝으로 내몰린 신앙의 처절한 절규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하여' 거리를 두는 법이 결코 없었다. 그는 안전거리를 거부했다. 조심스럽게 하나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대신, 하나님을 향해 '직접' 분노와 슬픔을 쏟아냈다. 놀랍게도 그의 그 맹렬한 분노조차 하나님과 '함께(with)' 머물기 위한 하나의 거룩한 형태였던 것이다.
시편 73편의 아삽 역시 비슷한 궤적을 그린다.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통받는 현실, 부서져 버린 듯한 도덕적 계산법 앞에서 그는 지적으로 신앙을 잃어버릴 뻔했다. 그러나 이 지독한 혼란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은 더 그럴듯한 논리적 설명에서 오지 않았다. 해답은 그가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 앞에 직접 섰을 때 비로소 찾아왔다. 세상을 해석하는 지적 프레임이 바뀐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욥은 끝끝내 자신의 고난에 대한 명쾌한 설명을 듣지 못했다. 그가 얻은 것은 바로 '하나님 그분 자신'이었다. 그리고 폭풍우가 지나간 뒤, 그는 성경에서 가장 경이로운 고백을 내뱉는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기 42:5).
이것은 어떤 새로운 신학적 지식을 얻었다는 보고서가 아니다. 완전히 변화된 관계의 기록이며, 하나님에 '대하여(about)' 아는 지식에서 하나님과 '함께(with)'하는 직접적인 인격적 만남으로의 거룩한 도약이다. 친구들은 정답의 자리에 머물렀지만, 욥은 하나님의 곁으로 가까이 나아갔다.
바로 이 지점에서 '대하여'에서 '함께'로 넘어가는 과정은 진정 뼈아프게 불편해진다. 우리는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으로 그 길을 선택할 수 있다고 믿고 싶어 한다. 그래서 우리는 더 간절히 기도하고, 더 많이 묵상 일기를 쓰며, 예배당 의자에 앉아 스스로에게 다그친다. "제발 생각과 분석은 그만두고 그냥 이 아픔을 온전히 느껴보자." 하지만 이런 다짐이 결코 성공하지 못하는 명확한 이유가 있다. 당신의 고통을 서술하고, 억누르고, 통제하려는 바로 그 지독한 이성이, 이 모든 영적 선택을 내리고 있는 동일한 주체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갑옷을 벗으려 하면서 또 다른 종교적 갑옷을 무기 삼아 사용하고 있는 꼴이다. 그 갑옷이 찢겨나가야 한다는 것을 진정으로 깨닫기 위해서는, 먼저 그 갑옷이 산산조각 나는 철저한 실패를 경험해야만 한다.
필자는 깊고 오랜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이러한 방어기제를 자주 목격해 왔다. 그들은 놀랍도록 정연한 논리로 무장한 채 상담실을 찾는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주 정확하게 서술하고, 상처의 원인을 추적하며, 피해의 결과들을 목록화하고, 자신의 상실을 하나의 일관되고 매끄러운 이야기로 짜맞춘다. 때로는 그 유창함이 진정한 내적 치유의 증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떨 때는 그것이 누구도 뚫을 수 없는 철옹성 같은 '요새'가 되기도 한다. 그들이 지어낸 이야기가 너무나 치밀하게 구성되고 완벽하게 지도로 그려진 나머지, 그 상실의 실제적이고 끔찍한 경험 속으로는 단 한 발짝도 들어갈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들에게 '설명'은 고통의 실재를 직면하지 않게 해주는 가장 훌륭한 방어벽이 되어버렸다.
우리의 자아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순간이 닥칠 때까지 삶을 통제하고, 설명하고, 이론화한다. 그러다 마침내, 어떤 고상한 결단이 아니라 철저한 '탈진'을 통해 굳게 닫혔던 마음의 빗장이 허물어지고 만다. 단단했던 갑옷이 부서진다. 모든 통제력을 상실한다. 관리하고 설명할 기력조차 바닥났기에 비로소 모든 저항을 멈추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처절하게 텅 빈 공간에, 하나님의 '임재'와 같은 경이로운 무언가가 스며들기 시작한다. 이것은 결코 삶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욥이 잿더미 위에서 경험했던 바로 그것에 가깝다. 모든 것을 완벽히 파악하고 이해해야만 한다는 강박적인 요구가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그 뒤에 찾아오는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낯설고 기이한 '안식' 말이다.
하나님은 욥이 여전히 자신의 정당함을 입증하려 날 선 논리를 세우고 있을 때 폭풍우 가운데 나타나지 않으셨다. 그분이 찾아오신 것은 욥의 모든 항변이 끝나고 힘이 다 빠진 후였다.
기독교는 이 모든 고통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과연 어디에 서 계신가에 대해 매우 경이롭고 충격적인 진리를 선포한다. 그분은 우리 삶의 비극적인 이야기 '위'에 팔짱을 끼고 머물러 계시지 않았다.
인간의 고통에 대해 무한한 지식을 소유하시고, 그것을 한 치의 오차 없이 지도로 그려내실 수 있는 그 하나님께서, 저 멀리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는 초월적인 '분석가'로 남지 않기로 결정하셨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은 친히 이 척박한 고통의 영토 안으로 걸어 들어오셨다. 극심한 배고픔, 사람들의 거절, 비통한 슬픔, 뼈아픈 불의, 믿었던 자의 배신,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까지 낱낱이 겪어내셨다. 창조주께서 연약한 우리와 함께 거니셨다. 머릿속의 완벽했던 지도가 붉은 피를 흘리기 시작한 것이다.
성육신(Incarnation)은 그 가장 깊은 논리에서 볼 때, 고통에 '대하여(about)' 안전하게 머무르기를 거부하신 하나님의 맹렬하고 거룩한 선언이다. 그리고 이것은 기독교인이 고통을 마주하는 태도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동안 단단히 쥐고 있던 이해의 틀 밖으로 쫓겨나, 날것 그대로의 끔찍한 고통 속으로 내동댕이쳐질 때,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저주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히려 주님이 이미 서 계신 바로 그 깊은 곳을 향해 한 걸음 더 가까이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사도 바울은 고통에 관한 더 세련된 신학적 프레임을 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에 직접 '참여'하는 것(빌립보서 3:10)을 열망한다고 고백했을 때 이 진리를 완벽하게 꿰뚫고 있었다.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는 고통에 대한 더 정교하고 훌륭한 신학 책을 집필하는 것이 아니다. 그 고통의 한가운데서 주님과 찢어질 듯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성경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와 '함께' 거니시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인간의 죄는 뼈아픈 분리를 가져왔다. 끝없는 거리감, 에덴에서의 추방,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with)' 친밀하게 하기보다는 멀찍이 거리를 둔 채 그분에 '대하여(about)' 떠들며 살아가는 길고 긴 인생의 건축물이 세워졌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이어지는 구속사의 장대한 서사는, 바로 이 아득한 거리를 좁히기 위해 수천 년에 걸쳐 쉼 없이 일하시는 하나님의 웅장한 사랑의 사역이다.
그리고 성경의 마지막 약속은 이 사역의 결론을 이렇게 선명하게 선언한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요한계시록 21:3).
에덴동산에서 시작해 바벨론의 추방으로, 참혹한 십자가에서 영광의 부활로, 마가다락방의 오순절에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새로운 창조로 이어지는 이 모든 거대한 내러티브는 태초부터 늘 단 하나의 단어를 향해 묵묵히 전진하고 있었다. 바로 '함께(With)'다.
이름 모를 낯선 이들과 흰 가운을 펄럭이며 병원 주차장을 전력 질주하던 그날 오후, 필자는 이전에는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어떤 영적인 문지방을 넘어섰다. 필자는 수년 동안 전문 용어, 분석 틀, 진단 범주라는 이름으로 빽빽하게 적힌 인간의 고통에 대한 광범위한 지도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 끔찍한 고통 안으로 직접 뛰어들어 보기 전까지, 필자가 결코 알지 못했던 것은 그 고통이라는 실제 '영토' 그 자체였다.
필자는 이제 고통이 우리 모두에게 건네는 초대장이 바로 이것이라고 믿는다. 안전한 바깥에 서서 타인의 고통을 그럴듯하게 이해하려 드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의 한복판에 정직하게 거하는 것. 그리고 이 눈물 나는 고통의 영토에 가장 먼저 피 흘리며 발을 들이신 하나님이 지금 이 순간에도 이미 그곳에 나와 함께 계심을 굳게 신뢰하는 것 말이다.
그분은 우리의 고통에 '대하여(about)' 세상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아시는 분이다. 그러나 그분은 차가운 지식으로 남기를 거부하시고, 그 캄캄한 고통 안에서 상처 입은 우리와 기꺼이 '함께(with)' 계시기를 선택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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