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프 파운틴
제프 파운틴 작가. ©기독일보 DB

미국 크리스천데일리인터내셔널(CDI)은 제프 파운틴 작가의 기고글인 ‘"아름다운 경기"로 하나 되는 우리의 세계 가족’(Our global family at play with the beatiful game) 7월 1일(현지시각) 게재했다.

제프 파운틴 작가는 슈만 유럽 연구 센터(Schuman Centre for European Studies)의 창립자이며 1990년부터 YWAM 유럽의 이사로 재직하며, 공산주의의 붕괴 이후 변화된 정치 환경에서 활동해왔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4년마다 수십억 명의 사람들이 다 함께 월드컵을 시청한다. 정치 문제로는 좀처럼 의견을 모으지 못하던 가족들이 함께 모여 환호한다. 전력 공급조차 불안정한 외딴 마을의 아이들이 휴대전화로 경기 점수를 확인한다. 외교 무대에서 으르렁거리던 국가들이 킥오프 전에는 서로 악수를 나눈다.

우리 중 축구 팬이 아닌 사람들은 텔레비전 뉴스가 바다 건너 저 멀리 떨어진 경기장에서 공을 쫓아다니는 22명의 남자 이야기로 도배되는 것에 불만을 품을지도 모른다. 신문 1면은 짜증 나는 경기 결과로 가득 찬다. 사무실에서의 대화는 (놓쳐버린) 골, 선수, 심판, 승부 예측을 중심으로 돌아가며, 관심 없는 사람들을 철저히 소외시킨다. 베네수엘라 지진과 같은 끔찍한 비극이 변두리 뉴스로 밀려나는 상황에서, 도대체 왜 그렇게 많은 방송 시간이 축구에 할애되어야 하는지 묻는 것은 지극히 타당하다.

오락거리가 인간의 고통을 가려버리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리는 깊은 불편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언론 기관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 특히 죽음, 난민 문제, 불의와 관련된 사건들을 보도할 책임이 있다.

우리의 연민이 TV 시청률에 의해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 축구에 대한 열광이 이웃을 향한 관심을 밀어내고 있다면, 우리의 우선순위는 심각하게 왜곡된 것이다. 우크라이나와 중동의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난민들은 더 나은 미래를 찾아 견딜 수 없는 고국의 현실을 피해 끊임없이 탈출하고 있다. 자연재해는 월드컵 결승전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미디어의 우선순위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가 숙고해 보아야 할 가치 있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바로 이 분열된 세상에서 문화와 민족 사이의 다리를 놓아주는 '축구'라는 스포츠 특유의 힘이다.

모든 A매치(국가대표팀 간의 경기) 직전에 일어나는 일을 생각해 보라. 서로 다른 역사, 언어, 종교, 정치 체제를 대표하는 선수들이 나란히 줄을 선다. 국가가 연주된다. 서로 악수를 나눈다. 경기가 시작되지만, 그것은 철저히 합의된 규칙 안에서 이루어진다. 승리는 축하받고, 이상적이게도 패배는 품위 있게 수용된다. 전쟁 없는 라이벌 관계가 성립하는 것이다.

물론 축구가 항상 이러한 이상을 온전히 실현하는 것은 아니다. 훌리건주의, 인종차별, 부패, 과도한 민족주의가 너무나도 만연해 있다. 상업적인 이익이 스포츠의 본질적 가치를 압도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경기는 경쟁뿐만 아니라 화해의 기회를 끊임없이 제공한다.

스포츠가 없는 세상?

조직화된 스포츠가 없는 세상을 잠시 상상해 보라. 아마도 갱단, 정치적 극단주의, 분노와 원한으로 뭉친 온라인 커뮤니티, 길거리 폭력, 파괴적인 형태의 스릴 추구가 난무하는 세상일 것이다. 역사적으로 사회는 젊은 남성들이 가진 끓어오르는 신체적 에너지, 경쟁심, 위험 감수 성향, 그리고 지위 상승에 대한 욕구를 건전하게 분출할 통로를 항상 필요로 해왔다.

스포츠는 인류가 만들어낸 이른바 주요 '문명화 제도(civilizing institutions)' 중 하나다. 단순한 오락을 넘어, 스포츠는 특히 젊은 남성들에게 여러 가지 사회적 기능을 수행한다. 팀 스포츠는 권위(코치 및 심판)를 받아들이는 법, 팀을 위해 개인의 영광을 기꺼이 희생하는 법, 굴욕감 없이 패배를 인정하는 법, 증오 없이 경쟁하는 법, 그리고 상대를 존중하는 법을 가르친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소속감, 도전, 인정, 신체적 표현, 서사의 공유, 영웅, 그리고 의식을 필요로 한다. 스포츠는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방법 중 하나가 되었다.

근대적인 조직적 축구를 창시한 사람 중 상당수는 19세기 영국의 기독교 개혁가들이었다. 특히 전국적인 주일학교 운동의 지도자들은 스포츠가 어떻게 인격을 형성하는지 주목했다.

그들은 젊은이들에게 단순한 지식과 규칙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에게는 미덕이 실제로 연습되고 실천되는 '공동체'가 필요했다. 이는 육체적 건강, 도덕적 진실성, 그리고 영적 성숙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 이른바 '근육질의 기독교(muscular Christianity)'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축구장은 일종의 또 다른 교실이 된 셈이다.

기독교적 뿌리

예를 들어, 애스턴 빌라(Aston Villa)는 1874년 버밍엄의 빌라 크로스 웨슬리안 예배당 교인들에 의해 창단되었다. 울버햄튼 원더러스(Wolverhampton Wanderers F.C.)는 1877년 성 루카 교회와 연계되어 시작되었다. 에버턴(Everton)은 1878년 리버풀의 성 도밍고 감리교회에서 출발했다.

1880년, 맨체스터의 공업 지대에 있던 성 마가 교회는 맨체스터 시티(Manchester City)를 세웠다. 토트넘 홋스퍼(Tottenham Hotspur F.C)는 1882년 토트넘의 올 할로우 교회의 성경 공부반과 연계되어 시작되었다. 사우샘프턴(Southampton)은 1885년 사우샘프턴의 성 마리아 교회와 연결되어 출범했다.

축구가 영국 노동자 계층 공동체에 그토록 깊이 뿌리내릴 수 있었던 이유는, 전문적인 프로 클럽이나 거대한 경기장, 거액의 TV 중계권 계약이 존재하기 훨씬 이전부터 그곳에 예배당과 주일학교, 교구 모임방이 있었고, 어딘가에 소속되기를 갈망하는 청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명확했던 기독교적 뿌리는 대중의 기억 속에서 점차 희미해졌다. 축구는 상업화되고, 세계화되었으며, 갈수록 세속화되었다.

하지만 그 기저에 깔린 핵심 이념만큼은 놀랍도록 온전히 남아 있다.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동일한 규칙 아래 모여, 같은 심판에게 복종하고, 서로 원수가 되지 않으면서도 맹렬하게 경쟁할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이것은 결코 작지 않은 위대한 성취다.

우리는 모두 어딘가에 속하기를 갈망한다. 가족, 도시, 국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인류 그 자체처럼 우리 자신보다 더 큰 정체성을 찾는다. 국제 스포츠는 우리가 '인류 가족'이라는 공동의 울타리에 속해 있음을 인식하게 해주는 동시에, 각자의 고유성을 마음껏 축하할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수십억 명의 사람들이 기꺼이 같은 시간, 같은 이야기에 집중하는 지구상에 몇 안 되는 범세계적 이벤트 중 하나다.

그리고 이 사실은, 우리가 결국 '하나의 인류 가족'에 속해 있다는 위대한 진리를 우리에게 다시금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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