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 <만약에 우리>에 대한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만약에 우리>
영화 <만약에 우리> 포스터. ©배급사: 쇼박스

게임 개발자로 성공하고 싶은 은호와 건축사의 꿈을 품고 있는 정원은 우연한 계기로 만나 연인이 됩니다. 서로의 꿈을 응원하며 여느 청춘들처럼 사랑을 키워가죠. 하지만 가난이 가져다준 팍팍한 현실 앞에 두 사람은 점차 지쳐가고, 조금씩 균열이 가던 사랑은 마침내 무너지고 맙니다. 이별이 각성제라도 되었을까요. 꿈을 위해 정진한 두 사람은 각각 꿈을 이루게 되고, 10년이 지나 우연히 마주한 이들은 밤새워 지나간 사랑을 복기합니다.

◆ 가난, 사랑을 방해하다

보육원 출신 정원에게 은호는 기댈 곳이 되어준 유일한 사람입니다. 은호는 보란 듯이 성공해서 정원의 남자가 되고 싶지만 취업이 뜻대로 되지 않자 예민해지고, 짝사랑하던 여자는 짊어져야 할 짐이 되죠. 학비 지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한 정원에게 건축학과로 편입하라고 격려하지만, 그 말조차 정원에게 생채기만 낼 뿐입니다. 햇빛이 잘 들지 않는 자취방을 정원이 서글퍼하자 커튼을 활짝 열어젖히며 ‘이 햇빛 너 가지라’던 은호의 남자다움은, 가난에 짓눌리게 되자 정원의 손에서 커튼을 빼앗는 우악스러움으로 변하죠. 가난이 사랑에 얼마나 위기를 가져다줄 수 있는지, 영화는 아프게 그려냅니다.

◆ 현실공감연애

영화 <만약에 우리>
게임 개발자로 성공하고 싶은 은호(오른쪽)와 건축사의 꿈을 품고 있는 정원(왼쪽) ©배급사: 쇼박스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그 시절의 나’를 돌아보게 합니다. 은호는 먼발치에서 본 정원을 몰래 스케치하고, 그림을 달라는 정원의 요구에 쩔쩔매며 조심스럽게 스케치북을 뜯습니다. 마음 한켠에 첫사랑의 아련함이 남아 있는 사내라면, 이런 장면에서 입가에 미소를 짓게 되죠. 냉혹한 현실로 인해 점차 옹졸해져 가는 은호의 모습은 선풍기를 독차지하는 그의 치사함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남성 관객은 과거 자신의 찌질했던 모습을 마주하는 듯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 흔한 연애가 성공하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사랑이란 얼마나 여러 겹으로 이뤄져 있는지, 가장 초라했던 그때가 가장 빛나던 때는 아닌지, 관객은 자신의 과거를 소환하며 영화에 몰입하게 됩니다.

한편으로는 연애가 사치로 여겨지는, 소위 ‘N포세대’ 젊은이들의 좌절이 영화에 투영된 것으로도 보이는데요. 대학생 시절 은호와 정원이 친구들과 소원을 비는 장면은 유난히 애잔합니다. ‘서울에 집 한 채 갖기를’ 소원하는 이들의 모습은 이 시대 청춘들의 자화상을 담아내면서 관객의 공감을 불러일으키죠.

◆ 집, 그러나 청춘

영화 <만약에 우리>
이별 이후 각자의 꿈을 이루고 재회하게 된 두 사람. ©배급사: 쇼박스

정원이 그토록 건축사가 되고 싶은 까닭도 가족이 없는 자신에게 ‘집’이란 그저 물리적 공간 이상의 의미를 갖기 때문일 겁니다. 과거 자신의 집이었던 보육원이 폐쇄되자 실망하는 모습이나, 은호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식당을 좋아함에는 ‘돌아갈 곳’에 대한 정원의 복잡미묘한 심경이 담겨 있죠. 그런 정원에게 은호는 ‘집 한 채’ 사주며 장가들고 싶지만, 현실은 녹녹치 않습니다.

한강뷰가 근사한 친구의 아파트에 초대받은 은호는 열등감으로 추태를 보이고 취객과 싸움이 붙기까지 하죠. 정원은 집이 갖고 싶지만 ‘가짜 집’이라 할 모델하우스에서 도우미를 할 뿐이고, 은호는 도우미 유니폼을 입은 채 퇴근하는 정원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서로의 꿈을 위한다고 애쓰지만 두 사람의 마음은 계속해서 꼬이고 엇나가죠.

이렇듯 청춘남녀가 만나서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랑이 퇴색되는 과정에서 공간적 배경이 되는 ‘반지하’, ‘월세방’, ‘옥탑방’, ‘고급 아파트’ 등은 이 시대 젊은이들의 좌절감을 효과적으로 은유합니다.

◆ 이별에 대한 성숙한 태도

이 영화의 미덕이란, 남녀의 이별에 대한 성숙한 태도를 견지한다는 점입니다. 이별 후 10년이 흘러 마주한 두 사람은 끈적한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은 채 과거의 감정을 복기하며 ‘그때는 진심이었음’을 확인할 뿐입니다. 이별을 굳힌 정원이 핸드폰에서 은호의 연락처를 삭제한 후 오열하는 모습이란 두고두고 회자가 될 명장면임이 분명하지만, ‘그때 내 집이 되어줘서 정말 고마웠다’며 진심을 토해내는 모습은 더욱 근사합니다. 집을 나간 정원을 미친 듯이 쫓아갔지만 정작 그녀 앞에서 뒷걸음질 치는 은호의 모습을 비겁하다 하는 남성들도, 서로를 ‘놓친 게’ 아니라, 서로를 ‘놓았다’는 은호의 말에는 눈가를 훔치지 않을까요.

현재 시점을 흑백으로, 과거 시점을 컬러로 그려내던 영화는 말미에 은호의 편지를 받고 미소 짓는 정원의 모습에서 컬러로 변하게 됩니다. 이는 두 사람의 현재가 더 단단해졌고 생기가 돌아왔음을 암시하는 한편, 아픈 사랑이 괴로운 기억이자 상처만은 아님을 웅변하기도 하지요. 과거 두 사람은 이별이 동력이라도 된 양 각자 포기했던 꿈을 다시 꾸게 되었고, 정원의 말처럼 ‘지금은 더 나아진 모습’으로 조우하게 되었으니까요.

남녀가 만나고, 사랑하고, 다투고, 헤어지는 것은 일상다반사에 해당합니다. 진한 후회와 회한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겠지만, 그것조차 어쩌면 자기연민이자 자기애가 아닐까요. 은호와 정원의 이별 이야기가 애상을 넘어 씩씩함을 주고 있음은 이 영화가 여타 청춘멜로물과 차별되는 지점일 겁니다.

◆ 후회하고 있다면

노재원 목사
노재원 목사

은호가 과거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며 주저앉지 않았듯, 성경에는 자신의 과오를 디딤돌 삼아 도약한 이들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남녀관계에만 한정하더라도, 다윗과 삼손은 여자 문제로 큰 과오를 범했지만 뼈아픈 후회에 매몰되지 않고 새로운 출발을 감행하죠. 베드로는 또 어떻구요. 3년간 동고동락하며 모셨던 스승을 위기상황에서 배신하고는 지독한 자책감에 괴로워했지만(마태복음 26:75), 이를 딛고 일어나 위대한 사도로 활약합니다. 기독교인을 핍박하고 스데반을 처형하는 데 앞장섰던(사도행전 7,8장) 바울은 죄를 깨달은 후 자기연민에 사로잡혀있지 않고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라’(사도행전 23:11)는 주님의 명령에 이끌려 힘 있게 사명을 이행했습니다. 이밖에도 후회와 회한에 붙들리지 않은 성경 인물이란 다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지요.

초라했던 과거가 현실을 무채색으로 만들려 할 때, 애틋하고 애잔했던 그때를 총천연색으로 복기해 보는 것은 은호와 정원에게만 주어진 특권은 아니겠지요. 고단한 현실이 삶을 지치게 할 때, 은호와 정원처럼 자신의 그 시절이 가장 빛나던 때였음을 회상하며 힘을 내는 건 결코 사치스러운 감정이 아닐 겁니다.

노재원 목사는 현재 <사랑하는 우리교회>(예장 합동)에서 청년 및 청소년 사역을 담당하고 있으며, 유튜브 채널 <아는 만큼 보이는 성경>을 통해 기독교와 대중문화에 대한 사유를 대중과 공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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