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 <어쩔수가없다>에 대한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25년간 제지회사에 종사해 온 ‘만수’는 성실히 근속했지만 구조조정의 칼바람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갑작스러운 해고 통보는 그와 식구들의 행복한 일상을 파괴하죠. 종이에 관한 최고 전문가를 자처하는 그는 자신만만하게 재취업을 도모하지만, 일은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급기야 어렵사리 장만한 집마저 처분해야 할 지경에 이르자 모종의 결심을 합니다. 재취업에 걸림돌이 될 경쟁자들이 없어지면 그 자리가 자기 것이 될 거라 생각하고는 한바탕 소동극을 벌이죠. 잔혹한 방식으로요.
‘가족애’에 숨겨진 허위의식을 저격
‘역설’과‘ 뒤틀림’은 이 작품의 도드라진 특징인데요. 만수네 식구들의 행복을 위해서는 다른 가정이 파괴되어야 합니다. 자신을 해고한 고용주에게 앙심을 품는 게 아니라 같은 처지의 노동자를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몫을 확보하려 드는 만수의 기행에는 냉혹한 자본주의 사회의 질서에 순응하며 그 안에서 생존을 도모하는 소시민의 자조가 배어 있습니다. 절도 범행을 저지르다 체포된 아들에게 거짓 증언을 하라고 부추기는 모습에는 지독한 가족 이기주의가 담겨 있구요. 그뿐인가요. 아내는 남편의 범행을 알면서도 은폐하는 한편, 부적절한 일을 해서라도 가정을 지키려 합니다. 아들의 절도는 형편이 어려워진 가계에 보탬이 되려는 효심 때문이었구요. 이렇듯 영화는 만수네 가족의 뒤틀린 모습을 통해 ‘가족애’라는 보편적 가치가 얼마나 얄팍하면서도 모순적이고 위선적일 수 있는지를 짓궃게 보여줍니다.
해고 전까지 만수는 ‘다 이루었다’는 말을 내뱉을 만큼 만족스러운 중산층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정원 딸린 집으로 숙원을 이루었고, 아내는 뭇 사내들을 신경 써야 할 정도로 미인이며, 첼로를 배우는 딸은 영재 소리를 듣는 인재였으니까요. 하지만 따지고 보면 만수가 가진 것들은 지극히 위태로울 뿐이었습니다. 집은 막대한 대출금을 끌어다 산 것이고, 아내는 외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영재라는 딸은 정작 가족에게는 한 번도 제대로 된 연주를 들려주지 않는 자폐증세를 보이죠. 우여곡절 끝에 만수는 재취업을 하고 가정의 안온함을 지켜내지만, 그조차 어딘가 모르게 위태로워 보입니다.
이렇듯 만수 가족의 이기주의와 기괴한 가족애, 그리고 중산층의 얄팍한 자의식이 뒤엉켜 있는 형국이란 만수가 벌이는 흉악한 일을 측은하면서도 우스꽝스럽게 보이게끔 하는데요. 이를 그려낸 영화의 시선에는 연민과 함께 차가운 조소와 비아냥이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영화의 태도를 기독교의 입장에서 빌려 볼까요(감독의 의도와는 무관할지라도요). ‘가족애’에 숨겨진 함정이란 일찍이 예수님께서 꼬집으셨던 바이기도 합니다. 가족의 행복을 추구하다가 더 큰 가치를 놓치고 말 인간의 어리석음을 지적하시며 가족 사랑을 최우선의 가치로 두지 말 것을 당부하셨죠. 그러고 보니, 자족감에 겨워 만수가 내뱉은 ‘다 이루었다’는 말과, 예수님께서 인류 구원이라는 원대한 사역을 십자가에서 감당하신 후 하신 말씀이 같다는 것도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네요.
은유와 역설
영화는 왜 하필 제지업계를 소재로 할까요? 종이는 디지털 미디어의 확장으로 예전만큼 대접받지 못하기에 만수의 처지를 은유하기에 좋은 소재였을 겁니다. 종이로 번 돈으로 중산층의 반열에 서게 된 만수에게 그 종이란 결국 체납 독촉장으로 되돌아왔다는 점에서는 역설을 담아내기에도 제격이었겠죠.
반려견 두 마리는 만수 일가에게 가족과도 같은 존재이자 행복한 가정의 화룡점정 격이었습니다. 하지만 만수의 해고로 긴축재정이 불가피해지자 가차 없이 내보내죠. 이는 ‘가족 같은’ 직원을 미련 없이 해고하는 기업의 구조조정에 대한 명백한 은유로 보입니다.
해고 이전 자동화가 야기한 구조조정에 반대해오던 만수는, 고대하던 ‘문 제지’ 면접에서는 시대의 변화를 인정해야 한다며 자동화를 지지하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재취업에 성공하자 혼자 생산 라인을 담당하게 되는데요. 그를 궁지로 내몬 원흉인 AI시스템을 ‘문 제지’가 도입했기 때문이죠. 아무도 없는 현장에서 홀로 일하는 만수의 모습이란 유머러스하면서도 처연합니다. AI 덕분에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는데도 굳이 아날로그 작업방식대로 제지 롤을 막대로 두들기는 만수의 모습은 그가 변화된 상황에 적응하지 못한 채 발버둥 치고 있다는 뜻이자, 치열한 구직경쟁 끝에 살아남았지만 여전히 위태로운 상황임을 은유합니다.
이렇듯 영화는 AI가 불러올 미래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풍기는데요. 부정적인 암운이란 비단 산업현장뿐만 아니라 기독교 진영에도 매한가지로 드리워져 있습니다. AI가 인간 목회자를 대신해서 설교나 상담이 가능하다는 것은 더 이상 놀랄 일도 아니지요. 머지않아 사람들은 인간 목회자와의 번거롭고 쑥스러운 대면보다,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손쉽게 만날 수 있는 AI 목회자를 선호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어쩔 수가 없다’는 자기 합리화의 비애
잔혹 행위를 이어가면서도 ‘어쩔 수가 없다’며 자기 합리화를 하는 만수의 모습에 관객은 정말로 ‘어쩔 수 없는 건지’ 의구심을 품게 됩니다. 왜냐하면 다른 업종에 취업할 수도, 정원 딸린 이층집을 팔고 전세 아파트로 이사할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는 고집스럽게도 손에 쥔 것을 놓으려 하지 않죠.
이러한 만수의 모습은 먹고 살기 위해 맹목적으로 달려가는 우리네 인생들에 대한 고도의 상징이자 신랄한 비아냥이라고 하겠는데요. 자기 가정을 지키고자 남의 인생을(그것도 무고한 자의) 손쉽게 파괴하는 만수의 엎치락뒤치락 난동이란 낄낄대는 웃음과 함께 씁쓸한 뒷맛을 자아냅니다.
악의 평범성
평범하고 안정된 삶을 살아온 성실한 가장 만수가 연쇄살인을 저지른다는 점은 철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가 제기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떠올리게 합니다.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이 광기에 사로잡힌 포악한 악인이 아니라 상부의 명령에 순종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심지어 만수처럼 가정적이기까지 한)에 의해 자행되었듯이, 평범한 사람 그 누구도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은 채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죠. ‘어쩔 수 없다’를 주문처럼 되뇌며 경쟁자들을 처리하는 만수의 모습은 그가 성실한 가장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가 처한 노동자의 현실과 버무려져 우리를 서글프게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도 이런 악의 평범성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이 무죄함을 알았지만, 사회적 지위를 잃을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예수님께 십자가형을 언도합니다. 빌라도의 수하들 또한 상관의 명령이니까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을 능멸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겠죠. 이들에게 면죄부를 줄 수 있을까요? 다윗 왕이 부하의 아내를 범하고 그 부하마저 죽게 만든 데는 요압이라는 조력자가 있었습니다. 요압은 주군을 섬기는 신하로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할지 모르겠으나, 그의 성실한 직무 수행은 악을 감추고 악에 동조하는, 또 다른 죄악일 뿐이었습니다.
뒤틀린 세상에서 구원을 희구하는 영화
뜬금없이 만수는 뱀에게 물려 상처를 입고, 회사가 보낸 장어를 본 아들은 뱀 아니냐고 묻습니다. 만수가 취업하려는 문 제지의 팀장은 ‘뱀 걱정하지 말라’며 이혼한 전처에 대한 미련을 에둘러 말하죠. 아시다시피 뱀은 구약성경 창세기에서 사탄의 표상입니다. 만수를 벼랑 끝으로 내몬 노동의 문제란 것도 따지고 보면 뱀으로부터 시작된 인간의 원죄에 기인하죠.
이렇듯 영화는 묘하게 기독교와 맞닿아 있다고 하겠는데요. 만수의 엽기행각처럼 모순과 부조리, 기괴함과 우연, 윤리적 딜레마가 기이하게 뒤엉켜 있는 세상에서 기독교가 돌파구가 될 수 있는지를 묻고 있는 듯합니다.
이 영화를 연출한 감독은 전작에서도 알 수 있듯 세상을 아름답게 그려내는 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근거 없는 희망을 말하지 않고, 어설픈 위로를 건네려 들지도 않죠. 반면에 그의 미장센(화면의 구도와 색채, 등장인물의 동선, 각종 소품의 배치 등을 포괄하는 용어)은 놀랍도록 아름답습니다. 이러한 모순이야말로 <어쩔수없다>를 비롯한 그의 작품세계를 여실히 설명해주죠. 뒤틀리고 엉망진창인 현실일 망정 자신이 펼친 스크린 안에서는 아름다워야 한다는 그의 유미주의적 태도란, 역설투성이 세상에서 복잡한 고민 따위 제쳐두고 아름다움을 탐닉하자는 제스처이자, 어쩌면 ‘그러니 기독교가 해답이 되어 달라’는 매우 종교적인 희구가 아닐런지요.
노재원 목사는 현재 <사랑하는 우리교회>(예장 합동)에서 청년 및 청소년 사역을 담당하고 있으며, 유튜브 채널 <아는 만큼 보이는 성경>을 통해 기독교와 대중문화에 대한 사유를 대중과 공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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