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하늘 나라에 가서 후회 할 일이 있다면 그 중에 ‘가장 큰 후회’는 이 땅에 살 동안에 진실한 ‘기도를 너무 적게 했다’는 점일 것이다.”
“기도응답의 비밀을 속 시원하게 알려주는 책은 없을까? “
들어가는 말(서론): ‘기도는 하나님의 보고(寶庫)의 문을 여는 열쇠다’
매년 11월이며 한국교회는 ‘다니엘 기도회’강사들의 생생한 간증으로 뜨겁게 달구어진다. 그런 간증들을 들으며 “나는 왜 저런 간증이 없을까?” “나의 기도는 왜 응답이 안 될까?” “기도응답의 비밀을 속 시원하게 알려주는 좋은 책은 없을까요? “나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생생하게 체험하며 간증하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좋을 찌 좀 알려주세요”
<무릎으로 사는 그리스도인(The Kneeling Christian)>은 신앙서적의 고전(古典)이다. 지금까지 수 많은 성도들을 무릎 꿇게 만든 기도에 관한 ‘20세기의 최고의 명저(名著)’다. 저자는 영국의 무명의 그리스도인이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길 꺼려하고 있다. 그는 본서에서 오로지 주님의 이름만이 들어내길 원한다. 1920년 대에 저술된 책이다. 지난 100여년 간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이 “무명의 그리스도인”은 앨버트 어니스트 리처드슨(Albert Ernest Richardson, 1868-1951)이다. 그는 옥스포드 대학을 졸업하고, 1897년 영국 성공회에서 안수받고, 1898년 아프리카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1900년에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다가 1903년에 다시 인도선교사로 파송되었다. 인도에서 돌아온 후 그의 복음전도에 대한 열정으로 영국 성공회 내에서 전도사역에 집중하였다. 1921년부터 저술을 시작하였으며, 이 책은 그의 2번째 책이다. (2017년, 크리스챤다이제스트사는 이 책을 출판하면서 무명의 저자는 앨버트 리처드슨이라고 밝히고 있다. 역사적 근거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전체 12개 꼭지다: 1.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 2. 거짓말 같은 약속들 3. 구하라, 시행하리라 4. 표적을 구함 5. 기도란 무엇인가? 6.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7. 기도는 고뇌 가운데 해야 하는가? 8. 하나님은 모든 기도에 응답하시는가? 9. 기도의 응답들 10. 어떻게 기도에 응답하시는가? 11. 기도를 막는 것들 12. 누가 기도를 할 수 있는가?
서평자는 20세에 거듭난 이후 수 십 권의 기도에 관한 책들을 섭렵하였다. 이 서평을 쓰기위해 다시 50여년 전에 읽었던 본서를 읽으며 기쁨과 감사가 넘쳤다. 무명의 저자는 기도의 고수임을 확인하였다. 술술 읽히는 책이다. 계속 질문을 제기하며 독자를 설득하는 간결한 글쓰기가 압권이다. 서평자는 저자가 질문을 제기하는 6개 질문들 중심으로 서평 할 것이다.
1. “기도란 무엇인가?” → ‘기도는 찬송이다’. ‘찬송함으로 궁전에 들어가라’
기도 정의를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서평자는 확신한다. 어떤 학문이나 과목이든 먼저 주제의 학문의 정의를 똑바로 알면 이미 절반은 그 주제나 과목을 이해한 것이다.
기도는 “무엇인가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기도는 “방향이 설정된 소원”//“하나님과 교제하는 것”//“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며 또 하나님께 발견되는 것”//“단순한 간구의 차원을 넘어 높은 차원에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한 마디로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지각(知覺)하는 것이며, 그 다음에 하나님의 은총을 깨닫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무한한 위엄과 영광을 체험하는 것이다. 기도는 먼저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묵상하며 영광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서평자는 이를 ‘기도는 찬송이다’, ‘인생은 찬양이다’고 정의한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지극히 위대한 영광을 깊이 생각하고 경탄하면서 상당한 시간을 소요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 가운데 “은혜”라는 말의 완전한 의미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의 기도가 때로는 너무 효험이 없고 무력한 것은 - 비록 기도도 하지 않을 때가 있지만 – 우리가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나아가기 때문이 아닌가? 또 우리가 가까이 하기 원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묵상하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우리는 하나님을 최고로 생각해야 한다.” (pp. 76-77, 저자는 독자들에게 4개의 질문을 연이어 제기하고 있다)
핵심을 이것이다. 기도는 먼저 경배와 찬양을 하나님께 올리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는 너무나 서두른다. 발에서 신 벗는 일(출3:5)도 없이 먼저 하나님과 요구. 교제하려 한다.
“이러한 경배와 송축과 찬양과 감사는 우리에게 깊은 기도의 영을 줄 뿐만 아니라, 신비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역사하도록 돕는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50:23) 하신 놀라운 말씀을 기억하고 있는가? 찬송과 감사는 바로 내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늘 문을 열어 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축복하실 수 있는 길을 예비한다. 사도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기 전에 “항상 기뻐하라”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의 찬송도 기도와 마찬가지로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 (p. 81)
서평자는 그래서 매일 새벽 ‘7곡 찬송운동’을 계속 외치고있다. 기도가 먼저가 아니다. 시100편 4절은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전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찌어다”고 했다. 궁전 보좌에 앉아 계신 주님을 알현하려면 먼저 궁전 문을 통과하여 궁전으로 들어간다. 감사하며 문을 통해 문지방을 넘고, 찬송할 때 주님의 존전(尊前)에 이르는 것이다. 이 비밀을 무명의 저자도 강조하는 것이 얼마나 반가운지!!
2.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내 이름으로 하라” → “그의 뜻대로”로 기도하라는 뜻!
이 질문은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주님은 친히 “어떤 것이든지”,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여러 번 약속하셨다. 그러나 단서가 있다. 수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단순히 기도를 끝맺는 후렴구 정도로 인식한다. 그래서, 기도중에 시종 졸다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고 할 즈음에 잠에서 슬며시 깬다.
이즘 영국교회서 가끔씩 경험한다. 담임 목사나 교회의 리더들 중에서 기도를 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도 없이 바로 ‘아멘’하며 기도를 끝낸다. 서평자도 처음엔 당황스러웠다. 그러면 이런 기도가 잘 못되었는가? 물론 그럴 수 있다. 꼭 틀렸다고 할 수도 없다.
“우리는 단순히 우리 자신의 쾌락이나, 인기, 출세를 위하여 부귀와 건강 또는 번영이나 성공, 안락이나 위안 또는 신령함과 사역의 열매를 위해서 구해서는 안 된다. 다만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의 영광을 위해서 구해야 한다.” (p. 90, 우리의 기도의 절대다수는 이런 기도들!)
“내 이름으로” 기도는 3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그리스도 때문에” “그의 대속의 죽음 때문에” 무엇인가 시행된다는 뜻이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의 뜻은 천국은행에 무한한 신용을 갖고 계신다는 뜻이다. 재원은 한이 없지만 구해야 할 조건이 숨어(?) 있다.
요한은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어심이라”(요일5:14)고 말했다. 오로지 그의 뜻에 맞는 것, 곧 그의 이름에 영광이 되는 것만 구해야 하는 것이다. 셋째는 “내 이름으로” 뜻은 ‘그리스도의 인격으로’의 뜻이다. 우리는 천국은행의 백지수표를 받았다. 그러나 기도하는 내가 ‘그것을 수령하기에 합당한 자가 되기를 요구’하신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뜻은 그의 보냄 받는 대리인으로서 보낸 자의 인격으로 기도한다 뜻이다. 따라서 여기서 “그의 이름으로”의 뜻은 “그의 뜻대로”의 말과 정확하게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뜻은 성경에 드러나 있다.
3. 기도는 고뇌 가운데 해야 하는가? → 기도는 시간이 아니라 강도에 의해 평가된다.
“기도는 무거운 짐인가?” “감당해야 할 의무인가?” “기도는 길게 해야 하는가?” “식사도 거절(금식)하며 온밤 지새우며(철야기도) 해야 하는가?” “항상 기도하면 언제 일하고 공부하란 말인가?” “기도는 언제나 엄숙하고 근엄하게 해야 하는가?”
이 모든 것은 전부가 기도에 어리석은 질문, 곧 우문(愚問)들이다. 하나님은 험악한 건설공사장의 감독이 아니다. 우리의 사랑의 아버지시다. 어린 아이는 사랑하는 부모가 지켜볼 때 더 잘 놀고, 공부도 잘 한다. 주님이 우리를 지켜 보신다는 의식이 주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있다는 믿음이 된다. 저자는 “기도는 시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강도(强度)에 의해서 평가된다”고(p. 106) 하였다. 맞는 말이다. <기도의 사람 하이드> 책을 보면서 “나도 그와 같이 기도할 수 있을까?” 나도 온종일 그렇게 기도해야 할까? 물론이다. 그러나 사람마다 다를 뿐이다.
예수님은 전혀 기도 하실 필요가 없었을 건인가? → 예수님은 왜 눈물 통곡기도에 힘쓰셨나?
“그러나 주님은 진지하게 하는 기도는 아무리 길어도 결코 꾸짖지 아니하신다. 주님께서는 가끔 기도로 온밤을 지새우셨음을 기억하자. 얼마나 빈번히 기도하셨는지 알 수 없으나 그런 기록을 볼 수 있다(눅6:12). 주님은 때때로 “새벽 오히려 미명에” 일어나셔서 한적한 곳을 찾아가서 거기서 기도하셨다(막1:35). 완전하신 사람이 우리보다 더 많은 시간을 기도하셨다.” (p. 115, 이 보다 더 큰 도전이 또 있겠는가? 주님은 우리의 최고의 기도의 모델이시다)
주님은 3년 공생애(公生涯) 기간 그렇게 바쁜 나날 이었지만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눅5:15, 16)고 기록하였다. 주님은 따르는 무리에게 가르치시며, 선포하시며, 치료하시는 (주님의 3대)사역보다 기도가 훨씬 더 능률적임을 잘 아셨기 때문이다. 때로는 음식을 잡수실 시간도(막3:20), 휴식하고 주무실 시간도 없었다(막6:31). 주님은 우리가 기도하되 끈질기게, 간절히, 계속적으로 기도를 할 것을 비유로 가르치셨다(눅11:8, 18:1-8)
구약의 모세와 신약의 바울은 모두 자신의 동족,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심령의 고통과 기도의 진통으로 사생결단(死生決斷)을 하였다(출32:31, 32, 롬9:1-3). 장로교의 창시자, 존 낙스(John Knox, 1513-1572)는 “오 하나님, 나에게 스코틀랜드를 주소서. 그렇게 않으면 나는 죽겠나이다”고 부르짖었다. 우리도 모세와 바울처럼, 우리의 동족, 남.북한의 완전 통일을 위해 사생결단 기도해야 마땅하지 않는가?
4. 하나님은 모든 기도에 응답하시는가? → “진실한 기도에 결코 불응(不應)은 없다”
하나님은 언제나 기도에 응답하시는가? 물론 하나님은 일부 기도에 대해 응답하심을 알지만 모든 기도에 응답하시는가? 그렇다. 그 기도가 진실한 기도라면 무엇이든지 다 들어 주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잘 못 구하는 기도는 응답을 못하신다.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사1:15) 자기를 반역하는 백성은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안 들으신다.
하나님은 자기의 자녀의 기도에 3가지(예/아니오/기다려라)로 응답하신다. “아니오”와 “기다려라”도 분명한 기도 응답이다. 아들이 면도칼을 원한다고 면도칼을 주는 부모가 있겠는가?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려면 순수한 마음/순전한 동기/순진한 욕구가 있어야 한다. 조지 뮬러는 한 친구의 구원을 위해 무려 63년 8개월이나 기도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응답이 올때까지 결단코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런 독한 끈질김의 기도가 절실히 필요하다.
예수님의 기도가 샘플이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밤, “아버지여 만일 할 수 있거든…하옵소서”(마26:39)라고 기도하셨다. 그리고 그는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다”(히5:7)고 히브리서 기자는 기록하였다. 또한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히7:25). 아울러 성령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 위해 간구하신다.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중보의 기도를 드리시며(롬8:26), 하나님께서는 성령께 “안 된다”라고 말씀하실 수 없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중보의 기도를 드리시며(히7:25),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 “안 된다”라고 말씀하실 수 없다. 그 분의 기도는 우리들의 기도를 수천 배나 능가한다. 그런데 그런 분이 우리에게 기도를 명령하신다.” (p. 137, 기도는 반드시 응답된다)
기도를 들으시는 성부 하나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시는 성령님,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롬8:34). 성 삼위 하나님은 기도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완벽하게 역사하셨다. 동일한 성 삼위 하나님이 그의 자녀들을 위해 지금도 중보기도하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시금 독자 여러분에게 “진실한 기도는 결코 불응이 없다”는 이 한 가지 진리를 붙들기를 촉구한다” (p. 132)
5. 어떻게 기도를 응답하시는가? → 기도하는 자의 마음속에 새로운 생각으로 응답하신다.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시는 방법을 우리가 완전히 알 수 있을까? 우리는 모두 어린아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수 만 가지 방법을 알 길이 없다. 우리는 기도에 대해 모르는 면이 너무나 많다. 그렇다고 기도를 못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에게 지혜를 주신다. 성령께서 기도하는 자에게 새로운 생각을 부어주신다. 반면에 사단은 시시때때로 우리의 마음 속에 악한 생각을 침투시키기 위해 우는 사자처럼 동분서주(東奔西走)하고 있다(벧전5:9). 주님은 친히 제자들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주기도문이 그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성령님을 보내 주셨다(요14:26). 그래서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새로운 생각을 넣어 주심으로써 기도에 응답하신다.
“주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실 말씀이 많다. 그는 우리 마음에 주실 생각도 많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너무 바쁜 나머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그의 뜻을 계시할 기회를 제공해 준다. 우리들은 가끔 “주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는 태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p. 152)
서평자는 매일 새벽마다 매체인 성경, 4,5장을 읽고 말씀으로 기도하는 중에 “주여 내게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 나이다”고 기도한다. 예레미야 같이 나도 동일하게 고백할 수 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하심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다”!!
“우리가 상대하는 하나님은 지혜가 무한하시다. 하나님은 의사의 마음속에 특정 의약이나 치료 방법을 넣어 주실 수도 있다. 모든 의사들의 기술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 하나님은 인간의 골격구조를 다 알고 계신다. 그가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가장 현명한 의사보다 훨씬 더 깊이 알고 계신다. 그가 만드셨으므로 고치실 수 있는 것이다.
(중략)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놀라운 지혜로써 고치실 수 있고, 때로는 인간의 도움 없이도 치료하실 수 있다는 사실도 믿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원하시는 방법으로 역사하시도록 해 드리지 않으면 안 된다. 흔히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얽어 매려 하고 있다. (p. 158, 지금도 “병든자에게 손을 언은즉 나으리라”(막16:18) 응답역사는 계속 되고 있다)
“당신과 나에게 있어서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기도에 응답하시는가?”가 아니라, “내가 진실로 기도하느냐?”이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큰 능력을 우리에게 맡겨 두셨는가! 하나님을 불쾌하시게 하는 것을 우리가 붙잡고 있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그리스도인 친구들이여, 전폭적으로 그리스도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그가 전적으로 참되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p. 161, 주님은 모든 정직한 기도에 응답하신다)
6. 누가 기도할 수 있는가? → 모든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담대히 기도 할 수 있다.
누구나 기도할 수 있는가? 그렇다. 누구든지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기도할 권리가 있는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는가? 또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기도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특전, 특권인가?” 영국인 모든 사람이 다 찰스 3세 왕을 접견 할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 어떤 특정인이나 단체, 혹은 외국 대사들은 왕을 대면할 특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왕의 친 자식처럼 왕을 쉽게 대면하거나 환영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왕 중의 왕이 계신다. 그는 우리 모두의 하나님 아버지시다. 누가 그 분에게 나아 갈 수 있는가? 누가 이런 특권, 이런 권세를 누릴 수 있는가? 극한 무신론자들에게도 기도는 항상 잠재하고 있다는 말을 듣는데 이 말은 상당한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 이 경우 언제든지 기도할 권리가 있을까? 어떤 종교에서는 기도가 제한 되어 있다.” (p. 179)
세상에는 수 많은 종교가 있고 그 종교마다 기도가 있다. 인도의 힌두교는 브라만 계급 외에는 기도할 권리가 없다. 이슬람은 몇 구절 아라비아 말을 배우지 않으면 기도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누구나 기도할 수 있다. 다만, 하나님의 자녀들 만이 기도할 수 있다.
“기도는 영혼의 가정생활이다. 기도는 그 이상이다”
“기도는 그 이상의 것이다. 기도는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들어가 전능자의 그늘 아래 거하는 것이다(시91:1). 기도는 우리의 소원과 요구들을 하나님께 알리고 믿음의 손을 뻗쳐서 하나님의 선물을 취해 오는 것이다. 기도는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결과이며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그러나 왕과 반역자 간에는 교제가 있을 수 없다. 빛과 어두움이 어떻게 서로 사귈 수 있는가? (고후6:14) 우리 자신에게는 기도의 권리가 없다. 다만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엡2:13).” (p. 180)
기도는 물에 빠진 사람이 부르짖는 그 이상이다. 기도는 사자들이 으르렁거리며 먹이를 쫓아 먹이를 구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다. ‘영혼의 가정생활’이다. 예수님을 영접하여 마음에 성령이 거하시지 않은 자는 ‘아빠 아버지’ 부를 수 없다. 모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님을 영접하자마자 곧바로 ‘기도의 학교의 입학생’이 되는 것이다.
누가 기도의 특권을 누리는가? → 단순하게 믿음으로 간구하는 자가 누리는 특권이다
한 마디로,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들 뿐이다. 이름 뿐인 크리스쳔이 너무나 많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않는 신자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없다. 어떤 아버지도 잘 못하는 자녀에게 은총을 낭비하지 않는다. 신실한 자녀들 만이 성령으로 기도 할 수 있다. 기도의 은사를 받아야 하는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조지 뮬러는 기도의 은사를 받았기 때문에 기도의 사람이 된 것이 아니다. 다만 그는 믿음으로 기도했기에 기도의 사람이 된 것이다. 야고보도 조지 뮬러도 우리와 성정이 똑 같은 사람이다(약5:17).
나가는 말(결론): 예수님의 일생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히5:7)
서평자는 예수님의 기도학교에 입학한지 이제 53년째이다. 이즘에 와서야 깨닫는다. “기도보다 더 위대한 선교사역, 목회사역, 교수사역은 없다”. 그래서 나는 기도에 목숨을 걸었다.
“누가 기도할 수 있는가? 우리(모두)가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정말 할 수 있을까? 주님께서는 처음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4)고 말씀하실 때 보다 지금 더 큰 연민과 관용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지 않겠는가? 만약 주님께서 그의 사역을 능력 있게 행하시는 데 기도를 의존하셨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이 기도해야 하겠는가? 주님도 때때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다(히5:7).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는가? 우리는 기도의 눈물을 흘린 적이 있는가? “우리를 소성케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시80:18)라고 부르짖을 수 있는가?” (p. 187) 오 아버지! 주님처럼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게 하소서! 아멘.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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