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기독교 변증가이자 작가인 로빈 슈마허의 기고글인 ‘성경 속 ‘무자비한 하나님’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8일(현지시각) 게재했다.
기독교 변증가로 활동하고 있는 슈마허는 작가로도 활동하면서 많은 책을 냈고 미국 내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때때로 필자는 무신론자들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악과 고통을 근거로 창조주 하나님을 부정하려는 잘못된 시도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무신론자 리처드 도킨스조차 그것은 잘못된 사고라고 지적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악의 문제는 실제로는 진짜 문제가 아니다. ‘악한 신이 있다’라고 말하면 되는 문제일 뿐이다. 그러면 훨씬 작은 문제다.”
더 어려운 문제는 무한히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과 세상 속의 악과 고통을 어떻게 함께 설명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는 수많은 논쟁과 글들이 쏟아진 오래된 논제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회의론자들은 선한 하나님과 성경에 기록된 여러 폭력 행위들, 심지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사건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도킨스는 자신의 책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에서 하나님을 이렇게 묘사한다.
“아마도 모든 허구 속에서 가장 불쾌한 인물: 질투심 많고 그것을 자랑하며, 옹졸하고 불의하고 용서하지 않는 통제광, 보복적이고 피에 굶주린 민족 청소자, 여성 혐오자, 동성애 혐오자, 인종차별자, 영아살해자, 집단학살자, 자식살해자, 역병을 퍼뜨리는 자,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자, 가학·피학적이고 변덕스러운 악한 폭군.”
무신론자 찰스 템플턴도 『하나님께 작별을 고하며(Farewell to God)』에서 이렇게 썼다: “구약의 하나님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하나님과는 전혀 다르다 … 그분의 정의는 현대적 기준으로는 말도 안 될 정도다 … 그는 편파적이고, 불평이 많고, 보복적이며, 자신의 특권에 대해 질투심을 가진다.”
또한 작가 로버트 앤턴 윌슨은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처럼 되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집단학살자로 묘사한다”라고 말했다.
사실, 성경의 일부 구절들은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을 무자비하게 보이게 만든다. 예를 들어 창세기에 기록된 홍수 사건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멸하리니 땅 위의 모든 것이 죽으리라”(창 6:17).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주실 땅과 그곳의 백성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들을 진멸하라 … 호흡이 있는 자를 하나도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신 7:2; 20:16).
여리고 성 함락 사건에서도 “이스라엘이 성 안의 남녀, 노소, 소와 양과 나귀까지 칼날로 진멸하였다”(수 6:21). 아말렉에 대해서도 “남녀와 소아와 젖먹는 아이와 소와 양과 낙타와 나귀까지 죽이라”(삼상 15:3)라고 명령하셨다.
이런 본문들을 근거로 evilbible.com 같은 사이트는 “성경의 하나님은 오사마 빈 라덴보다 더 나쁘다. 그는 집단학살, 강간, 약탈, 노예제, 아동학대, 심지어 태아 살해까지 직접 책임진다”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 속 ‘무자비한 하나님’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
성경적 심판의 패턴
먼저 분명히 해야 할 점은, 어떤 회의론자들(예: evilbible)이 주장하는 하나님께서 강간을 명령했다는 식의 말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은 강간, 근친상간, 일부다처제 같은 끔찍한 일들을 언급하지만, 성경은 단순히 어떤 사건을 기록하는 것과 그것을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다는 것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강간을 명령하신 구절이 있다면 제시해보라.
둘째, 성경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내리는 주요 사건들을 살펴보면 일정한 패턴이 나타난다.
극심한 죄악에 대한 선언
하나님께서 심판을 내리실 때는 임의적이지 않고, 인류를 좀먹는 죄악에 대응하는 매우 중대한 판결이었다. 예를 들어 소돔과 고모라의 경우, “그들의 죄악이 심히 무겁다”(창 18:20)라고 말씀하셨다.
경고와 회개의 시간 제공
하나님의 최종적 심판은 늘 경고와 긴猶豫의 시간을 두고 진행되었다. 아말렉은 400년의 회개 기회를 받았다(창 15:13-16). 노아 시대에도 방주를 짓는 동안(최소 100년) 노아는 “의의 전파자”(벧후 2:5)로서 경고했다.
회개하면 심판이 취소됨
사람들이 회개하면 하나님은 심판을 거두셨다. 니느웨의 경우가 대표적이다(욘 3:10). 아합 왕도 회개했을 때 하나님의 심판을 피했다(왕상 21:27–29).
구원의 길 제시
심판 속에서도 하나님은 항상 구원의 길을 열어두셨다. 소돔에서 롯과 그의 가족이, 홍수에서 노아와 그의 가족이 구원받은 것이 그 예다.
이러한 패턴은 오늘날 복음 속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하나님의 심판은 자의적 폭력이 아니라 회개와 구원으로 이어지는 통로이다.
요나는 이렇게 고백했다: “주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며,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욘 4:2).
하나님의 심판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사야는 “주의 심판이 땅에 임할 때 세상의 거민이 의를 배운다”(사 26:9)라고 말한다.
결국 성경의 하나님은 “무자비한 하나님”이 아니다. 오히려 공의와 자비, 경고와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일관된 하나님이시다. 복음을 통해 우리는 그분의 의를 깨닫고, 죄를 떠나며, 그분의 희생과 사랑과 용서를 기억하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회의론자들이 그리는 ‘잔혹한 하나님’과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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