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성 박사
양기성 박사

중국 및 한반도에 학문적 찬란한 빛을 제공했던 인물은 공자와 맹자다. 공자가 인을 강조했다면, 그의 제자격인 맹자는 의를 강조했다. 의는 “바름” 또는 히브리적 해석으로는 “곧음” 이나 “직선”을 말한다. 말하자면, 구불 구불한 정신상태, 또는 갈 지자 행보는 의가 아닌 불의라 할 수 있다.

어느날, 그가 양혜왕을 만났을 때, 양혜왕이 맹자에게 물었다. “무엇을 해야 이로움을 얻을 수 있는가?” 맹자가 대답했다. “어찌하여 왕은 이를 말합니까? 왕은 “의”를 말해야 합니다. 국가 경제를 발전시켜 백성들이 잘 먹고 잘 살아야 하는 입장에서 왕은 “이로움” “유익” 또는 “이익”을 말했지만, 정치 지도자로서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름” “의”라는 것임을 말한 것이다. 아무리 풍성하게 살아도 양심이나 도덕 없이 사는 것은 옳은 통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두 인물을 중심으로 한 동양사상을 보면 1세기 근동 팔레스틴 지역의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과 매우 닮아있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도 자비, 동정, 또는 사랑을 강조한 반면, 바른 정신을 뜻하는 의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마태복은 6장 말미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하신 말씀이 그 뜻을 대변한다. 물론, 예수께서 말씀하신 의란 “신앙”을 근간으로 하고 있는 용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란 도덕적 요소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의도 인간 도덕적 의와도 깊은 연관성이 있는 의라 말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불의란 무엇인가? 불의란 “생각이나 행동이 옳지 못함”을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나 공자, 맹자의 의에 대한 반대적 논조를 생각하면 되는 일이기는 하지만, 불의란 어떤 사안의 기본에 있어서 “일탈”을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주전 3세기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에게서 볼 수 있다. 그는 “의란, 자기 본분의 영역에서 자리나 책무를 성실히 지키는 것”이라 말했다. 예를 들어, 인간 육체를 예로 들면, 머리는 머리구실을 하고, 팔은 팔의 역할을 하는 것, 또는 다리는 다리의 역할을 하는 것을 말한다. 몸의 각 부분이 자신이 맡은 일을 성실히 하는 것으로 그런 것이 정상이고 바름이라 하는 것이다.

반면, 자신의 일을 소홀히 하거나 성실하지 못한 자세를 갖는 일, 또는 오히려 타인이 하는 일에 관심을 두는 일” 등을 불의라 했다. 팔이 다리의 역할을 하려고 하는 것이나, 다리가 머리의 역할을 하려고 할 때, 그런 것을 불의라 한다는 것이다. 주어진 직분을 자신이 잘 감당하지 못하면 그런 것을 의롭지 못한 것이라 말한다.

플라톤의 교훈에서 또 하나 생각할 것은 어떤 직책을 가진 사람을 그가 중요하게 보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는 정치가가 국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정치를 통해 국민들이 “바름” 속에서 행복하게 살도록 하게 하는 임무를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정치가가 자기 마음대로 뱃속 채우는 일을 한다든가, 백성들을 억울한 삶을 살도록 만드는 것은 불의한 일을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정치 한답시고, 국민이 불안해 하거나, 불만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우면 정치를 잘 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노자 역시 훌륭한 정치가는 어떤 인물인가에 대해 말했는데, 이는 당시 용어로 “왕이 있는지 없는지 백성들이 인식하지 못할 정도의 조용한 정치적 분위기”를 유지하는 자가 훌륭한 정치인이다”라고 말했다. 나라가 시끄러우면 지도자가 정치를 잘 못하기 때문이라 생각하면 된다.

이에 더하여 국민들의 정신 수준을 중요하게 보았다. 바보같은 자를 뽑아 놓으면 바보의 지배를 받는 국민들이 되기 때문에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정말 국민을 위한 마음으로 정치하겠다는 인물을 선택하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은 수백년 동안 지배받는 삶을 살아, 자신들의 권리가 묵살되더라도 힘을 가지고 제 마음대로 통치하는 전제군주 같은 자를 좋아한다. 아직도 과거 식민통치 시대를 정당화 하고, 독재정치하던 시대를 그리워하고 그때가 좋았다 말하는 자들이 있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할 수 있다.

플라톤은 또한 무사계급을 높게 인정했다. 문인으로서 무인들을 높이 평가했다. 이유는 군인들은 목숨을 내어 놓고 가정 식구와 국가를 벙어하는 직책을 가진 그룹이기 때문이다. 당시 그리스와 스파르타, 또는 아테네와 페르시아와의 전쟁이 다발적으로 많았는데, 그리스 아테네 군사들이 적들과 나가 싸워야 하는 병사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희생과 용기를 칭찬한 것이다.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용사들을 전 시민들이 나아가 환영하고 영웅화 하던 그런 풍습이 진지하게 열리기도 했다.

지금의 미국도 군인들을 어디서나 박수로 용기를 북돋아 준다. 아프가니스탄 모슬렘 테러분자들을 미군이 한창 소탕하고 있을 때, 미국에서는 어느 공항이든 군인들이 나타나면 열열히 박수를 보내주었다. 자신들의 가정, 국가, 자유와 평화를 지키느라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른 마음 품지 않고 생명을 걸고 자신들의 직책에 충실하니 국민들의 지지와 성원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그렇게 해야 되는데, 별로 신통치가 않다. 몇몇 정치군인들이 자신들의 책무와 직책, 임무를 소홀히 하고, 자신들의 직무와 관계없는 것, 즉, 정치에 관심을 두고 행동들을 했기 때문이다. 즉, 군사쿠테타를 감행하여 정권을 국민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탈취하는 일들이 몇번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직무와 책임에 무관심하고 다른 일, 즉 정치에 관심을 두다보니 플라톤의 말을 빌려서 한다면 불의한 일을 한 것이다. 몇몇 불의한 자들에 의한 행동 때문에 그룹 전체가 불명예를 당하게 된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대다수 군인들은 불철주야 자신들의 임무를 진실로 성실히 수행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들에게는 무한한 격려의 박수를 보내 주어야 한다.

목사나 평신도 지도자도 마찬가지이다. 군인과 같은 사명을 가지고 불의한 영적인 악당을 제지하기 위해서 군인처럼 투쟁하고 교단과 신학을 지키는데 위험을 무릅쓰고 정체성을 지키기위한 의를 위해 용기있게 앞장서는 자들에게는 아낌없는 격려와 박수를 보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위험을 무릎 쓴 영적인 군인이기 때문이다. 군인이 총칼을 가져야 나라를 지킬수 있듯이 교회와 신학에 있어서도 혼란을 일으키는 자들을 바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지성과 영성과 정의감과 용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십자가 군병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울사도와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과 존 웨슬리가 아닐까 싶다.

불의한 것은 목회자 세계에도 존재한다. 목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성실히 수행하고 전해야 하는데, 그보다 관심을 정치에 두기도 한다. 예배 중, 설교가 복음으로서의 설교가 아닌 정치 얘기거리로 진행된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 구원의 역사를 듣고 보고 싶어하는데, 정치 전문가도 아닌 목사가 정치가가 하는 말을 설교로 하니 불의한 일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현상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5달란트, 2달란트, 1달란트를 나누어 주고, 받은바 직무에 충실 할 것을 당부하였는데, 5달란트와 2달란트 받은 사람은 받은 것을 가지고 열심히 일을 하여 자신의 임무수행의 열매를 맺어 주인에게 돌려줬는데, 1달란트 받은 사람은 땅에 묻어 두었다. 자신이 부여 받은 것에 대해 “되든 말든”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주인의 뜻을 배반한 것이다. 결국, 그는 남는 것 없이 가진 것마저 빼앗기게 된다는 말씀이다. “타산지석”으로 삼야야 한다. 자기 목회나 똑바로 해야지 타 영역에 전문가도 아닌 사람이 왈가왈부하는 것은 그야말로 보기 좋지 않은 의롭지 못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목회자들의 불의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최근 한국에는 이단은 말할 것도 없고, 무속신앙이 들불처럼 번져나가고 있다. 그런데, 몇몇 대형교회 목사들은 무속신앙을 가진 정치 권력자들과 교제를 즐기는 듯 하다. 이단이나 무속신앙에 빠진 권력자들을 말씀으로 따끔하게 훈계하여 하나님 앞으로 바로 돌아오게 하는 본분을 행했어야 하는데, 오히려 그들을 지지하거나 성원하고 있으니 이 또한 성직자로서 불의한 일을 행하는 자들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기본적으로 의를 강조하는 목사가 되어야지, 이익을 먼저 구해 쿠데타를 하거나, 불의한 권력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의 영역을 벗어난 일을 하면 어느 누구든지 악한 자, 불의를 행하는 자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이 말씀 하셨듯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라는 말씀에 충실하는 것이 목사로서 의로운 자가 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께는 의를 구하고 백성들에게는 인애를 베푸는 신학자 목사와 장로 평신도지도자 그들이 곧 바울사도, 루터, 칼빈 그리고 웨슬리의 후예가 될 것이다. 심히도 혼란한 오늘 이 시대에 한국교회를 바른방향으로 이끄는 의로운 지도자가 많이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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