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우 목사
이희우 목사

대중가요 중에 서울을 주제로 한 노래가 꽤 많다. 1150곡 정도 된다고 한다. 설교를 이렇게 시작하는 이유는 노래에 시대의 애환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시대의 아픔을 달랠 때나 기쁨과 환희를 표현할 때 노래만큼 좋은 게 또 있을까? 한때 ‘단장의 미아리 고개’라는 노래에 사람들은 민족의 아픔을 담아 노래했고, 또 ‘서울 아가씨’, ‘럭키 서울’ 같은 노래로 자유와 즐거움을 표현했다. 서울을 주제로 노래한 사람이 700명 정도라고 하는데 서울이 시대를 망라해 그만큼 대중들에게 어필한 도시, 문화적으로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는 뜻이다.

서울을 주제로 한 노래가 많듯이 예루살렘을 주제로 부른 노래도 많다. 대중가요도 많겠지만 “거룩한 성” “샬루 살롬 예루살라임”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찬양하세 오 예루살렘” “예루살렘아 여호와를 찬송할찌어다” 등 찬양도 많다. 그 중 단연 으뜸은 순례자의 노래 15곡, 그 중 하나인 122편은 이스라엘 백성이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 세 절기를 맞아 예루살렘으로 예배하러 올라갈 때 사용하도록 다윗이 쓴 노래다. 그리스도인을 ‘한 길 가는 나그네’라고 표현한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은 “시 122편이야말로 예배의 본질을 표현한 최고의 시편”이라 했는데 ‘(예배를 위해) 예루살렘을 향한 사랑의 노래’라고 이름을 붙여 봤다.

기쁨의 노래

예루살렘은 지구상에 가장 독특하고 신비한 도시다. 고대로부터 수천 년의 세계 역사에서 그 어떤 도시도 갖지 못한 특이한 요소들을 갖고 있는 도시, 주전 1000년경 다윗의 점령 후 하나님 백성의 정치적 종교적 중심이 된 이후 3천 년 이상 그 역할을 하는 민족의 성소다. 기독교인과 유대인들에게 ‘거룩한 도시’로 인정받고, 무슬림들에게는 모하멧(Muhammad)이 태어난 메카(Mecca) 다음으로 거룩한 도시, 3대 종교(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의 성지가 모여있는 곳이다. 그래서 언제나 인종, 종교, 정치적 기운이 거세다.

그러면서도 예루살렘은 디아스포라(διασπορά), 흩어진 유대인들에게는 그리운 꿈이자 목적지, 그래서 이 노래는 기쁨의 노래였다. 시인은 첫 구절부터 순례의 설렘과 기쁨을 노래한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1절).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는 ‘예루살렘으로 순례 가자,’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자’는 말이다. 아마 친구들이나 이웃 중 누군가가 권유했던 모양인데 마치 다윗이 법궤를 운반할 때 춤추며 기쁘게 하나님의 집에 올라가던 모습(삼하6:12-14)이랄까? 시인은 그 권유가 너무 기쁘다. 안 그래도 힘겨운 삶, 외부에서 짓누르는 무거운 짐과 내부에 가득 차 있는 짐으로 지쳤는데, 너무 피곤해서 쉼이 필요했는데, 잘 됐다는 거다.

맞다. 우리 삶에는 쉼이 필요하다. 쉼은 삶의 전환점이 될 것이다. 시인은 모든 일을 중단하고 순례길에 오른다. 그리고 동료들과 드디어 예루살렘에 도착한다. 얼마나 기뻤을까? 강력한 엔돌핀이 솟구친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기쁨이었는데 드디어 예루살렘 성문을 밟은 것, 순례자는 그 감동을 이렇게 표현했다.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2절), ‘여호와의 집’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뛰었는데 “와 대박! 내가 사모하던 성전에 왔네” 그런 기분, 아마 모든 피로가 다 풀렸을 거다. 완전 감동 그 자체, 마치 시84:10절 같지 않았을까?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그렇다. 순례자들에게 성전은 사모하던 자리요, 은혜의 자리였다.

만일 순례자가 팔레스타인에서 왔다면 성전을 방문하고 다시 돌아가기까지 짧게는 1주, 길게는 한 달 정도 걸렸을 거다. 방문 시기는 여름 건기와 겨울의 추위 동안이 아니라 바쁜 농사철, 그러니 순례길에 오르려면 하던 일을 중단하거나 해야 할 일을 못하고 떠나야 한다. 그런데 이게 바로 우리 인생의 순례길이다. 그렇다. 인생은 본질적으로 꼭 가야 할 곳이 있다. 이게 원칙이다. 이 원칙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일에 빠지지 않도록 하며, 영혼의 안식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꼭 지켜야 한다.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우리가 꼭 가야 할 순례길이 어딘가? 우리의 예루살렘은 교회다. 가야 할 여러 곳 중 하나가 아니라 생명과 같은 곳이다. 일주일 동안 지친 영혼이 주일을 맞아 교회를 찾는 것, 이건 작은 순례이지만 안식을 위해 꼭 필요한 일, 교회가 아니더라도 세상일 중심의 패턴은 주기적으로 한 번씩 끊어주는 것이 좋은데 교회 오는 길은 다른 곳과 비교할 수 없는 설렘과 기쁨이다. 교회가 사람도 만나지만 하나님과의 미팅 하우스, 교회는 하나님을 만나뵙는 곳이다. 기억하나? 기도의 어머니 한나는 사무엘을 젖 뗀 후부터 아예 하나님의 집에서 자라게 했다. 자녀의 삶의 중심이 하나님의 집이어야 한다는 자세였던 거다.

122편 시인의 순례는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는 권면으로 시작된다. 이 말은 이스라엘의 위기 때마다 등장했던 핵심 슬로건, 이사야 선지의 외침을 기억하나?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사2:3). 그들은 민족의 위기 때마다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했다. 그리고 본문 4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 ‘전례대로’, ‘전에 했던 대로’, ‘규칙적으로’, 그들은 조상 대대로 예루살렘에 모여 감사로 예배를 드렸고, 예루살렘에 모여 총회를 열고, 예루살렘에 모여 집단 회개를 했고, 예루살렘에 모여 집단행동을 했다. 민족이 망했을 때는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눈물로 예루살렘의 회복을 소망했다. 그게 삶의 원칙이었고, 규칙이었고 전통이었다. 그러니 예루살렘은 그들의 영적 구심점, 이런 구심점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회복도 쉽다.

그들에게 예루살렘은 생각만 해도 설렘이었고, 기쁨이었다. 예배 때문이다. 예배는 일생을 좌우하는 교회의 존재 이유이자 교회의 가장 핵심적 사역, 그들이 부른 122편은 예루살렘에서의 예배를 생각하며 기쁨으로 부른 사랑의 노래, 이 노래가 우리 노래 되기 바란다.

영광의 노래

순례자들이 전례대로 예루살렘에 모이는 이유는 하나님께로부터 가르침을 받기 위함이었고 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었다. 3절에서 5절까지를 보면 시인은 잘 짜여진 견고한 성읍 예루살렘(3)과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기 위해 올라온 지파들(4), 그리고 심판의 보좌인 다윗의 보좌(5)를 찬양한다. 먼저는 잘 짜여진 성읍을 위한 찬양, 이건 예루살렘의 견고함에 대한 찬양이다. “예루살렘아 너는 잘 짜여진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3절), 산지인 다윗의 성 예루살렘이 견고한 요새라는 것, 모든 필요한 것을 구비한, 성전과 왕궁과 집들이 견고한 요새라는 거다. 성 밖의 물을 실로암으로 끌어들이는 히스기야 터널이 있었기에 산지지만 물도 있다. 안전한 곳, 보호받고 회복을 경험하기에 충분한 곳이다.

그런데 바벨론 침공 때 이 성벽과 견고함이 무너졌다. 포로로 바벨론에 있던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에게 특청해 허락을 받고 컴백해 무너졌던 성벽을 재건하고 예루살렘을 복원하는데 그 과정을 보면 성이 허물어지고 성문이 불탔다는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는 탄식했다.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느1:3-4), 기도로 끝이 아니다. 자원하여 유대 땅 총독으로 부임하여 성벽을 쌓는다(느4:17). 주변 민족들의 방해가 극심했지만 52일 만에 중건했다(느6:15). 그게 바로 예루살렘 성벽이고 도시다.

얼마나 도시가 견고했던지 AD 70년의 유대 독립전쟁에서 이스라엘은 로마 제국 군대를 맞고도 약 4개월을 버틴다. 오래 버틴 거다. 1967년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군은 예루살렘 시온성 점령을 목표로 선제공격을 감행하였다. 그 흔적이 예루살렘 성벽 위의 수많은 총탄 자국으로 남아 있다. 성벽은 견고했지만 인류 역사에서 가장 많은 불운을 겪은 곳, 3천 년 역사의 고도(故都) 예루살렘, 성벽이 무려 10번이나 무너졌다 다시 중건되었다.

그만큼 많은 전쟁에 시달린 도시였다. 우리도 침략을 많이 당한 고난의 민족이지만 한양 도성이나 북한산성은 그만큼 제대로 된 전투를 치른 적은 없다. 그들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평화로웠다. 하지만 일제 침략기에서 한국전쟁에 이르는 고난은 그들 못지않은 큰 고난이었다. 그래서 이 122편이 더 마음에 와닿는다. 오랜 세월 시달린 예루살렘 성의 고난, 시인이 순례 와서 예루살렘 성벽을 만지며 느끼는 감회는 남달랐을 거다. 아마 “주는 나의 산성이시요, 나의 요새”라는 고백이 절로 나왔을 거다. 인간이 쌓은 성벽으로는 안전하지 않다며 “주님이 산성되고 요새가 되신다”는 고백, 폐부로부터 솟구치는 소리로 찬송하지 않을 수 없었을 거다.

여기에 더해 순례자는 예루살렘에 몰려든 모든 지파를 보며 감격한다(4절). 열두 지파가 산지사방에서 예루살렘으로 오는 모습, 성전 이곳저곳에서 담소하며 때로는 말씀을 나누고 서로 연합하고 동거하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 오는 것이 쉽지 않았기에 더 흐뭇하다.

이거다. 이스라엘의 종교 개혁의 핵심에는 예루살렘 중심성 확보가 있었다. 지방 산당을 없애고, 예루살렘 성전만 유일한 성전으로 삼는 것, 그래야 민족의 구심점이 생기고 말씀의 권위가 생기기 때문에 먼 곳까지 온 거다. 물론 예루살렘의 정통성에는 좀 문제가 있다. 모세오경에 등장하지 않는 도시, 오히려 사마리아의 그리심 산이 성전산으로는 더 적합했다.

또 원래는 여부스 족속의 땅이었다. 다윗이 정복한 후 이스라엘의 수도로 삼고, 솔로몬이 성전을 지으면서 예루살렘은 중심이 되었다. 대략 BC 1000년경 일이다. 초기에, 그리고 이후 분열 왕국 시기에 다른 지파들은 예루살렘을 외면하고 단이나 벧엘에 산당을 세웠지만 이스라엘은 종교개혁을 통해 산당들을 없애고, 예루살렘 중심성을 세웠다.

그리고 마침내 예루살렘이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시온 산이 하나님이 거주하는 곳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하나님의 집으로 확정되었다. 지금은 열두 지파 모두가 예루살렘의 하나님의 집에 모인다. 시인은 12지파가 연합하여 동거하고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 흐뭇하다. 드디어 통일 이스라엘이 완성된 것,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 거다. 그래서 시인은 그 영광을 보며 노래를 부른다. 영광의 노래, 우리의 노래가 되기 바란다.

평화 갈망의 노래

모든 것을 다 갖추고도 마음에 근심과 두려움이 가득하면 그 모든 것은 아무 의미 없다. 평안이 있어야 한다. 평안은 사는 맛을 느끼게 하는 축복의 도구, 축복의 통로이기도 하다. 사업하다 60세에 파산해 수백만 달러의 빚을 지고 병원에 입원한 카놀 산도스는 얼마나 힘들었던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자살할 생각으로 늦은 밤에 병원 문을 나섰다. 그때 어디에선가 찬송소리가 들린다. ♬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382장) 조그마한 교회에서 흘러나오는 찬송이었다. 다가가 보니 한 늙은 부인이 꿇어앉아 찬송을 부르고 있다. 그때 갑자기 산도스의 마음이 뜨거워졌다. 자기도 모르게 교회 바닥에 엎드려 통곡하며 회개 기도를 드렸다. 무거운 짐이 사라지고 마음이 평안해졌다. ‘새출발’에 대한 힘이 솟구쳤다. 자본금이 없어서 쓰레기를 수거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거기서 번 돈으로 통닭집을 운영했는데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것이 바로 ‘산도스 치킨’, 그는 주님이 주신 평안으로 억만장자가 됐다. 주의 평안이 대박이었던 거다.

‘예루살렘’은 히브리어로 ‘예루샬라임‘(יְרוּשָׁלַיִם), ‘평화의 마을’이라는 뜻인데 세계에서 가장 전쟁이 많았던 도시다. 그래서 시인은 예루살렘을 향해 축복한다(6-9절).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라” ‘평안’(샬롬)을 형통으로 연결했다. 여기서 ‘형통’은 ‘안정’의 의미가 강하다. 7절과 8절은 반복, 그리고 9절은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 시인은 평화를 최고선으로 기도하는데, 그게 복인데 예루살렘에 평안이 없다.

가장 반평화적인 도시, 지난 3천 년간 20회 이상 주인이 바뀌고, 성벽이 파괴되었다가 재건된 것만도 10번이다. 현대 예루살렘도 마찬가지, 성전이 있던 곳은 이슬람의 모스크 사원이 세워져 회교도들이 하루 세 번씩 예배하고, 바로 곁이나 다름없는 곳에 있는 통곡의 벽에는 유대인들이 벽에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기도한다. 또 멀지 않은 곳인 옛 갈보리 언덕을 중심으로 성묘교회와 십자가의 길이 있다. 기독교인들이 북적인다. 가끔 정교회에서 울리는 종소리가 예루살렘 전역에 메아리친다. 곳곳에 군인들이 총을 들고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다. 그러니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가 아니라 긴장과 갈등의 도시, 지금도 전쟁 중이다.

평화의 길을 외면한 그 예루살렘을 보며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셨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눅19:41-42). 폭력과 전쟁의 길을 가던 예루살렘, 결국 AD 70년에 로마에 의해 망하고 말았다.

시편 122편의 예루살렘은 신약시대에는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사신 교회를 상징하며, 또 장차 우리가 들어갈 영원한 도성, 천국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교회에 들어올 때 122편의 시인 같이, 순례자들 같이 억누를 수 없는 벅찬 기쁨을 느끼기 바란다. 벅찬 기쁨이 터지는 곳, 출장 갔다가 돌아와서 가장 먼저 달려오고 싶은 곳, 군대에 가 있어도 외국에 가 있어도 늘 생각나는 가슴 벅찬 곳, 교회가 그런 곳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예루살렘을 향한 사랑의 노래를 부르며 날마다 기쁨과 영광과 평화를 누리며 사시길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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