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제리 맥글로틀린의 기고글인 ‘왜 안락함은 고난보다 영적으로 더 위험한가'(Why comfort is spiritually more dangerous than suffering)을 7월 7일(현지시각) 게재했다.
제리 맥글로틀린은 헌정 공화국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데 헌신하는 게스트를 대변하고 유대-기독교 윤리를 유지하는 것으로 유명한 홍보 기관인 스페셜 게스트(Special Guest)의 CEO로 재직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기독교를 향한 가장 오래된 반론 중 하나는 감정적으로도 가장 강력한 호소력을 지닌다. 바로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왜 세상에 고통을 허락하시는가?"라는 질문이다.
이는 지극히 정당한 질문이다. 어린아이가 세상을 떠날 때, 가정이 무너질 때, 암이 덮칠 때, 전쟁이 가족을 파괴하거나 극심한 외로움이 노인들의 삶을 짓누를 때, 섣불리 내놓는 정답은 오히려 잔인하게 들릴 수 있다.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고통은 결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종종 끔찍한 아픔, 두려움, 슬픔, 혼란을 동반하며, 때로는 숨 막히는 침묵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가 던져야 할 가치 있는 또 다른 질문이 있을지 모른다. 만약 하나님이 선하시고, 영혼이 실재하며, 죽음 이후의 삶이 영원하다면, 진짜 깊은 미스터리는 '왜 하나님이 고통을 허락하시는가'가 아닐지도 모른다. 진짜 미스터리는 오히려 이것이다. "왜 하나님은 '더 많은' 고통을 허락하지 않으시는가?"
이 말이 충격적이거나 매정하게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결코 그런 의도가 아니다. 잔인함, 방치, 질병, 학대, 혹은 무관심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악은 여전히 악이며, 고통은 여전히 고통이다. 죽음은 여전히 우리가 정복해야 할 최후의 원수다.
그러나 기독교가 진리라면, 이 현세의 삶이 우리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다. 이 땅은 천국이 아니다. '편안함'이 최고의 선(善)은 아니며, 육체적인 안락함이 하나님의 사랑을 가늠하는 최종 척도도 아니다. 만약 고통 없는 안락한 삶이 결국 영적 공허함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차라리 사람을 깨워 하나님을 바라보게 만드는 고통스러운 삶보다 훨씬 더 거대한 비극일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왜 하나님이 사람들을 무릎 꿇게 만드는 고통을 허락하시는지 묻는다. 하지만 반대로, 사랑의 하나님께서 왜 그토록 많은 편안함을 허락하셔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한 절박함과 진리 탐구, 그리고 절대적 의존성을 잃어버리게 내버려 두시는 것일까? 고통은 사람들에게 무릎 꿇을 기회를 주지만, 넘치는 안락함에 질식된 사람들은 평생 단 한 번도 무릎을 꿇지 않는다. 세간의 주목을 받는 유명 인사나 스포츠 스타들의 삶만 보아도 이를 쉽게 알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눈에 띄는 큰 고통 없이 인생을 미끄러지듯 평탄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에게는 건강, 돈, 인기, 쾌락, 그리고 기회가 있다. 그들은 궁극적인 질문을 던질 만큼 거대한 위기에 직면하는 일이 드물다.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기에 그분을 향해 부르짖지도 않는다. 그들의 삶은 주의를 분산시킬 만큼 충분히 화려하지만, 그들의 영혼을 구원할 만큼 깊지는 않다.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사람들은 축복받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영원의 관점에서도 과연 그럴까?
예수님은 이 땅의 번영을 영적인 안전으로 착각하는 것을 엄중히 경고하셨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마태복음 16:26).
만약 한 사람의 편안함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지 못하게 가로막는 장애물이 된다면, 그 편안함은 일시적인 육체의 고통보다 그의 영원한 영혼에 훨씬 더 치명적이다. 고통은 적어도 우리에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반면, 번영은 종종 모든 것이 괜찮다고 속삭인다.
성경은 이에 대해 끊임없이 경고한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풍요로움이 영적으로 얼마나 위험해질 수 있는지 경고했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신명기 8:10-11).
이 경고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성공은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을 잊게 만든다. 건강은 자신이 불멸의 존재인 것처럼 느끼게 한다. 부유함은 스스로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을 심어준다. 오락은 사람들의 영혼을 마비시키고, 편안함은 영적인 마취제가 되어버린다.
엄청난 부를 거머쥔 운동선수, 연예인, 왕실 가족, 억만장자들은 종종 막대한 부, 찬사, 하인들, 경호원, 개인 전용기, 매니저, 그리고 수많은 박수갈채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물론 부유하고 유명한 사람들 중에도 겸손하고 관대하며 책임감 있는 이들이 있다. 부 자체나 명성 자체가 죄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수많은 스캔들, 통제 불능의 분노, 무모함, 특권 의식, 도덕적 타락을 목격하며 하나의 패턴을 발견하게 된다. 즉, 일상적인 고난, 교정, 책임감, 그리고 누군가를 의지해야 하는 상황으로부터 완벽히 차단될 때 사람의 영혼은 일그러지기 쉽다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조차 은수저가 쥐어지면 배은망덕해질 수 있다. 노예 생활에서 해방되어, 결코 해지지 않는 옷을 입고 하늘에서 내리는 기적의 양식을 먹으며 광야를 걷던 히브리 백성들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감사하는 대신 만나에 대해 불평하며 고기를 요구했다. 결국 그들이 그토록 원하던 것을 얻었을 때,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심판이 되었다.
'특권 의식(Entitlement)'은 편안함을 자신이 마땅히 누려야 할 우월함으로 착각할 때 생겨난다. "안 돼"라는 말을 거의 들어본 적 없는 사람은 자신이 일반적인 규칙 위에 있다고 믿기 시작한다. 끊임없이 찬사를 받는 사람은 인기를 미덕과 혼동하게 된다. 거의 모든 것을 돈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은, 정작 가장 중요한 것들은 결코 돈으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망각해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 한계, 그리고 일상적인 발버둥이 때로는 자비의 한 형태가 되기도 한다. 그것들은 우리가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상기시켜 준다. 다른 사람들의 소중함을 가르쳐 주고, 우리가 의존적인 존재임을 폭로한다. 또한 인생이 단지 우리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존재한다는 환상을 무참히 깨뜨려 준다.
가난, 질병, 슬픔만이 위험한 것이 아니다. 고통으로부터 너무 철저히 보호받는 것 역시 치명적인 위험이 될 수 있다. 마찰 없는 삶은 평화가 아니라 오만함을 낳을 수 있다. 결핍 없는 삶은 감사가 아니라 특권 의식을 만들어낸다. 고통 없는 삶은 거룩함이 아니라 안일함으로 이어진다.
잠언은 이렇게 말한다.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잠언 30:8-9). 실로 놀라운 기도다. 풍요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의존을 잊게 만들 수 있음을 정확히 꿰뚫어 본 것이다.
오직 지혜만을 구했던 솔로몬조차 지혜와 부를 함께 얻었지만, 결국 그에게 주어진 엄청난 편안함과 권력은 그를 경건한 지혜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그는 이방 여인들과 결혼했고, 거짓 신들에게 아이를 제물로 바치는 끔찍한 종교 의식까지 용인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지혜로웠던 사람조차, 반대되는 압력이나 결과에 대한 책임이 너무 적어지자 결국 타락하고 말았다.
반면 고통은 종종 이러한 환상을 산산조각 낸다. 고통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일깨워준다. 거짓 신들의 실체를 폭로하고, 우리의 교만을 벗겨낸다. 타인을 향한 긍휼을 가르치며, 우리가 애써 피하고 싶었던 궁극적인 질문들을 직면하게 만든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무엇이 진정 중요한가? 죽음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신은 존재하는가? 나에게는 용서가 필요한가? 이 세상 너머에 소망이 있는가?
C.S. 루이스(C.S. Lewis)는 고통을 가리켜 귀먹은 세상을 일깨우는 하나님의 '확성기'라고 묘사했다. 고통이 즐겁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쾌락과 성공, 그리고 자기 충족감이 우리를 영적으로 귀먹게 만들었을 때, 고통만이 우리의 주의를 끌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하나님은 당신의 자비로움 속에서, 우리를 멸망시키지 않을 정도의 선에서 우리의 영혼을 깨우기 위해 고통을 허락하시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는 우리의 일반적인 불평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다.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그저 인간의 편안함을 극대화해주셔야 한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사랑의 하나님께서 인간의 헛된 환상을 지켜주기보다 영혼을 구원하는 데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면 어떨까? 그분의 목표가 우리가 영원한 세상을 까맣게 잊은 채 일시적인 현세를 즐기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부모들은 이 원리를 작은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다. 사랑 많은 부모는 아이가 원하는 것을 모두 다 들어주지 않는다. 좋은 아버지는 아이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아이가 아직 보지 못하는 미래를 보기 때문에 훈육, 좌절, 수고, 실망, 교정을 허락한다.
성경은 말한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히브리서 12:11).
기독교의 관점은 고통이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니다. 고통은 일시적이며, 하나님은 자신이 미워하시는 것(고통과 악)까지도 사용하셔서 자신이 사랑하시는 목적을 이루실 수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가 가장 위대한 예다. 금요일 오후의 시선으로만 판단한다면 십자가형은 패배와 불의, 그리고 버림받음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주일 아침, 그것은 구원을 향한 영광스러운 문이 되었다.
바울은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고린도후서 4:17). 이 말씀은 고통을 하찮게 여기는 것이 아니다. 고통을 영원이라는 저울 위에 올려놓고 그 가치를 재평가하는 것이다.
만약 고통이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부르짖게 하고, 회개하게 하며, 진리를 찾고, 겸손해지며, 타인을 더 깊이 사랑하고, 영원을 준비하게 만든다면, 그 고통은 참으로 혹독하지만 위대한 자비(severe mercy)로 판명될 것이다.
반대로 편안함이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신을 숭배하며, 진리를 외면하고, 영혼을 방치한 채 영원한 단절을 향해 떠내려가게 만든다면, 그 편안함이야말로 지옥으로 직행하는 미끄럼틀을 감춘 '아름다운 덫'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단순히 "왜 사랑의 하나님이 고통을 허락하시는가?"에 머물러선 안 된다.
어쩌면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왜 사랑의 하나님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완전히 잊어버릴 만큼 편안하게 살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일까?"
하나님은 선하시다. 하나님은 완전하시다. 그분은 우리의 고통을 결코 낭비하지 않으신다.
만약 영원한 삶이 실재한다면, 안락함은 결코 최고의 선(善)이 될 수 없다. 그리고 만약 영혼이 육체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면, 인간에게 가장 큰 위험은 육신의 고통이 아닐 것이다. 가장 치명적인 위험은, 하나님을 간절히 찾을 만큼 그분을 필요로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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