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우 목사
이희우 목사

매튜 헨리 주석에 의하면 “시 121편은 다윗이 전쟁 중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전시에도 지켜주실 것을 신뢰하며 전장에서 지은 시, ‘군병의 시편’이라는 사람도 있고, 시 내용 중에 군사적인 위험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순례자의 시편’이라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이 두 견해 중 순례자가 오가는 길의 안전을 간구한 내용으로 121편을 이해하려고 한다. 물론 순례 여정에 있던 한 성도의 아름다운 신앙 간증처럼 읽어도 좋고, 혼자의 노래가 아니라 두 명 이상이나 찬양대가 서로 주고받는 교송으로 읽어도 괜찮을 것 같다.

시는 질문으로 시작된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1절) 이미 많은 길을 걸어온 것 같지만 아직도 갈 길이 먼 상황, 더 가야 할 길의 어려움을 잘 아는 것 같다. 이 시를 순례를 끝내고 돌아가는 순례자의 작별인사로 보는 사람도 있다. 어떤 경우든 순례자는 지금 위험을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가면서 생각한 것이 “누가 나를 도와줄 것인가?”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한데 막막하다는 거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어쩌면 도울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한숨 쉬며 내뱉은 말일 수도 있다.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 프랑스는 독일과의 국경을 따라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마지노선이라 불리는 방어진지다. 6년 이상 걸려 세운 요새, 1차 대전의 경험을 살려 지세를 활용해 만든 철옹성이다. 전차의 침입을 막기 위해 철골벽을 이중으로 쌓고, 보병의 침입을 막기 위해 철조망 지대를 만들고, 직경 6m의 콘크리트 벽도 세웠다. 그리고 발전실, 탄약고, 작전실은 전부 70m 지하에 설치하고 거기에 모든 화력을 집중배치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그러나 막상 2차 대전 때 이 마지노선은 무용지물이었다. 독일이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로 우회 침공을 했기 때문이다. 마지노선만 그럴까? 아니다. 사람이 구축한 요새는 다 무너졌다. 트로이성에서부터 중국의 만리장성에 이르기까지 세상에 안전한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기억하지 않나? 코로나 19 팬데믹 때 전 세계는 바이러스에 꼼짝없이 당했다.

묻는다. 세상에 안전한 곳이 있나? 누가 우리를 지켜주나? 시인은 멀리 보이는 예루살렘 시온 산을 바라보며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묻고는 바로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대답한다. 순례자의 독백이다. 그리고 3-8절은 제사장의 축복이거나 순례자가 만난 사람과 나눈 격려일 수 있는데 시인은 하나님이 지키주실 분이라고 했다.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요 보호자이시다. “안전 갈망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눈다.

산을 향하여 눈을 들고

순례자는 도움을 찾기 위해 안정감을 주기 때문일까? “산을 향하여 눈을 든다”고 한다. 그런데 산은 정상에 올라가도 기쁨과 시원함은 잠시, 다시 내려와야 한다. 오르막도 힘들지만 내리막은 더 힘들다. 군목 때 우리 사단이 맡은 휴전선 철책은 22Km, 3박 4일간 돌며 병사들을 위해 기도해주기 위해 가는데 22Km에 평지는 거의 없었다. 완전 오르막과 내리막의 연속, 쳐다보며 한숨 쉬고, 내려다보며 탄식했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 고생을 하나?” 그럴 정도, 올라가고 올라가도 끝없는 계단, 또 내려가고 또 내려가도 끝없는 계단, 그때 나중에 혹시 무릎에 문제 생기면 국가가 책임질까? 그런 얘기까지 나눈 적 있다. 얼마나 힘든 코스면 22km 가는데 3박 4일이나 걸렸을까? 그런데 인생도 오르막과 내리막의 연속이다.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관광객이 아니라 일생동안 ‘한 길 가는 순례자,’ 어차피 오르막과 내리막의 연속이라면 오르막 때는 정상에서 누릴 즐거움과 통쾌함을 생각하고, 내리막 때는 충전하고 돌아가는 뿌듯함과 즐거움을 생각하면 좋겠다.

물론 산은 위험한 곳이다. 사나운 짐승이 있고, 강도나 산적이 있을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산에는 먹을 것도 많다. 그래서 자연인들이 주로 산으로 살러 간다. 그런데 산이 지상보다 높아서 그랬을까? 산은 신성한 곳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옛날에는 산신령 얘기가 많았다.

시인이 눈을 든다는 산은 히브리어로 '헤하림'(הֶהָרִים), ‘그 산들’이라는 말인데 예루살렘의 시온 산을 가리킨다. 예루살렘은 해발 700m 이상에 위치하고 있어서 그 자체가 그들에게는 산이다. 물론 산이라 하기 힘든 낮은 구릉이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마치 북방 산처럼 높은 산으로 여겼다. 어머니처럼 포근하고 많은 것을 주는 산, 신령하고 신비스럽기 때문이다. 순례자는 지금 이 위대한 산을 향해 눈을 든다. 산이 아니라 그 너머의 하늘과 그 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지는 대지, 그리고 모든 공간을 뛰어넘는 절대자 하나님을 바라본 거다.

어떤 사람은 1절을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어야 하나?”라고 읽지만 우리는 산을 향하여 눈을 들어야 한다. 의지할 것이 없어서 예루살렘을 바라보는 것, 성전을 생각하는 거다. 구원이 시온으로부터 임한다고 믿는 거다. 아니 한 발 더 나아가 시선은 예루살렘을 향하지만 마음은 그 너머 하나님을 향한다. 그래서 고백한 말,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이고, 온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이시라는 것, 그 하나님이 나의 도움, 나의 안전을 지켜주신다는 것, 우리는 눈을 들어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봐야 한다. 구원이 시온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도우심을 믿고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묻던 시인은 즉각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하는데 여기서 ‘도움’은 히브리어로 ‘에쩨르’(עזר), 창세기에서 아담에게 하와를 주시면서 ‘돕는 배필’이라 하실 때 쓰였던 단어다. 아담이 하와에게, 하와가 아담에게 서로 돕는 자가 되어 살아가듯 하나님은 동행하며 돕는 분이시라는 말이다.

시인은 그 분을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라고 노래한다. 작은 산이든, 높고 험준한 큰 산이든 다 하나님의 작품인데 그분이 함께하신다는 것, 산 주인이, 산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이, 산만큼 크신 분이 우리 곁에서 동행하는 절대자, 순례길의 수호자가 되신다는 말이다.

맞다. 그 분은 나를 만들고, 내 인생을 설계하신 분이다. 그래서 시139에 보면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14절) 우리가 신묘막측하게 지어진 인생이라 했다. 그만큼 하나님이 위대한 분이시라는 것, 하지만 문제는 이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닫는다는 거다. 기가 막힌 인생, 이미 이룬 일만 보지 말고, 미래를 내다보며 찬양하자. 이해가 되든 안 되든 하나님을 신뢰하자. 왜? 하나님은 탁월한 연출가로, 내 인생을 하나님의 수준으로 그려내실 것이기 때문이다.

121편에서 가장 시선을 끄는 단어는 ‘지킨다’는 거다. 3절에서 8절까지 여섯 번 나온다. 그것도 ‘여호와께서 지키신다’는 선언이 4번이다. 3절에서는 ‘지키시는 분’이라 했다. 너를, 네 영혼을, 네 출입을 안전하게 지키신다는 말씀, 121편의 주제는 안전 갈망이다. 그리고 3절에서는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라고 했다. ‘실족’은 발의 헛디딤, 하나님이 실족하지 않게 발걸음을 지키신다는 것, 실족케 되면 천 길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져 다치거나 생명을 잃게 되는데 지금까지 한전한 것은 인생의 걸음마다 하나님이 지켜주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절대자 하나님이 지켜주셔도 넘어질 수 있다. 혹 넘어져도 기억하라. 십자가(+)를 붙잡고 넘어지면 곱하기(×) 인생 되는 거다. 넘어지면 연단 받는 것, 그것 때문에 더 크게 넘어지지 않게 된다. 넘어졌다고 아이를 다시는 걷지 않게 하나? 하나님도 우리 보호자가 되신다.

시인은 4절에서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 부르며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신다”고 한다. 그게 이스라엘이 망하지 않는 이유다. 파수꾼이 되셔서 밤낮으로 지켜주신다는 것, 인간 파수꾼은 졸기도 하고 딴짓하다 성이 뚫리게도 하지만 하나님은 전능하신 파수꾼, 그 분이 오른쪽에서 지켜주신다면 안전한 것, 안심해도 된다. 대통령이나 군인은 한계가 있어도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참 감사한 것은 하나님이 섬세하신 분이라는 거다. 시인은 우리 우편의 그늘 되셔서 우리를 지키신다고 했다. 성경에서는 우편, 오른쪽은 구원의 자리다. 양(축복받은 자)은 오른쪽, 염소(저주받은 자)는 왼쪽(마25:32-33), 산헤드린 공회에서도 무죄는 오른쪽, 유죄는 왼쪽이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던 강도도 오른쪽 강도는 구원받고 왼쪽 강도는 아니었다. 성경에서 왼쪽은 저주와 사망, 미련하고 어리석음, 기만과 살의를 상징하는 멸망의 자리였고, 오른쪽은 위엄과 영광, 존귀와 생명, 지혜와 힘의 근원을 상징하는 구원의 자리였다. 믿음의 사람은 왼쪽, 오른쪽 가릴 것 없이 구원의 자리에 서면 된다.

하나님은 ‘우편의 그늘이 되신다’. 사막의 여행자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일사병, 40도 정도의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면 엄청난 고통이지만 그늘은 시원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출애굽 때 구름 기둥으로 그늘을 만들어 주셨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혹시 사막 같은 내 인생이 이상하게 시원한가? 시원케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다. 눈을 들어 낮의 해가 우리를 상하지 않게, 안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아야 한다.

밤의 달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밤의 찬 기운을 피하도록 불기둥으로 따뜻하게 해주셨다. 밤의 달은 질병의 공격을 뜻하기도 한다. 차가운 기운을 몰고 밤중에 질병이 몸에 침입한다. 그런데 질병과 바이러스로부터 지켜주시는 것, 은혜다. 물론 무리하면 안 된다. 어떤 목사님은 잘 아는 약사가 약을 한 통 주며 하루 10알씩 드시고, 이제는 이런 약을 많이 드셔야 한다고 하니 집에 가서 많이 먹어야 한다는 말만 기억하고 한꺼번에 한통 40알을 다 드셔서 갑자기 뇌경색으로 큰 고생을 하셨다. 너무 창피해서 아무에게도 약을 그만큼 먹었다는 말을 하지 않아 의사가 아무리 검사해도 뇌경색 원인을 몰라 이상하다며 ‘알 수 없는 병’이라고 진단했단다. 무리해도 안 되고, 밤에 함부로 돌아다녀도 안 된다. 괜히 자신이 망쳐놓고 하나님만 바쁘시게 하지 말라.

무리하지 않았고, 몸 관리에도 나름대로 신경을 썼는데 혹시 병이 났나? 하나님 원망하지 말라. 아니 그 순간에도 밤의 달이 상치 못하게 한다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신뢰하라. 병이 나을 수 있고, 아니면 그 병을 통해서 더한 중병을 막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는 보호자이시기 때문이다.

영원까지의 안전을 확신하며

시인은 노래 뒷부분에서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7-8절)라고 노래했다. 삼중 반복적 표현, 하나님의 안전 보장이 완전하다는 것을 강조한 거다. 사람은 맹세하고 다짐해도 변하지만,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 생명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지키고, 영원까지 안전하게 지키시는 분임을 노래한 거다.

유진 피터슨은 121편을 “대양에 있는 모든 물로도 작은 배 하나를 침몰시킬 수 없다. 그 배 안에 물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당하는 그 어떤 일도 우리를 흔들 수 없다. 그것이 우리 내면으로 침투하기 전까지는!”이라 해설했다. 주께서 지켜주신다는 거다.

시인이 선포하고 확신하는 하나님의 도우심! 어두운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사건 사고가 너무 많아 출입이 불안한 시대, “여호와께서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신다”, 얼마나 멋진 찬양인가? 밖에 나갈 때 “다녀오겠습니다”라고 하는 말이 말씀에 근거한 믿음의 말 되기 바란다.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는 시대, 그래서 더 121편 8절의 안전에 대한 확신을 갖고 살아야 한다. 평안히 나갔다가 평안히 돌아오는 것, 이것은 은혜이고 기적이다.

한동안에 국민일보에 ‘할렐루야 캡틴’이라는 연재 간증이 실렸었다. 대한항공 신일덕 기장의 간증이다. 1990년 11월 16일, 아주 맑은 날씨에 신일덕 기장은 신혼부부 61쌍과 일반승객 등 165명을 태우고 사이판으로 가는 항공기를 조종하고 있었다. 그런데 도착을 앞두고 고도를 낮출 때 기아를 내려야 바퀴가 내려지는데 기아가 내려지지 않는다. 아무리 반복해도 마찬가지, 큰일 났다. 비행기가 동체착륙하면 심하면 비행기가 몇 동강이 날 수도 있고 불이 나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을 위기다. 그때 장로였던 신일득 기장은 조종을 부조종사에게 맡기고 기관사와 함께 부르짖어 기도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고함치고 부르짖어 기도했던지 온몸이 땀범벅이 되었다. 그런데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온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얼마나 감동했던지 비행기 안에서 “할렐루야” 고함을 치고 기관사에게 다시 해보자고 하고 기아를 내리는 조종관을 잡아당기니 바퀴가 쭉 내려왔다. 이미 동체 착륙에 관한 기내방송을 들은 객실의 승객들은 아수라장, 난리법석을 떨고 있었는데 기장이 기내 방송을 통해 “할렐루야~ 하나님이 도와주셨습니다” 외친다. 비행기는 안전하게 착륙했다. 하나님이 지켜주신 거다. 50년 간 2만 시간 이상을 비행하며 1만여 명에게 전도한 항공선교사, 신일득 장로는 2016년 다니엘기도회 간증자이기도 했다.

우리 인생은 위대한 연출가이신 하나님의 손에 들려 있다. 시대가 어떠하든 우리는 관광객이 아닌 순례자, 실족하지 않게 지키고, 영혼을 지키고, 출입을 영원까지 지켜주실 것을 믿었던 시인과 앞선 순례자들처럼 고독한 길 같더라도 안전하게 보호해주실 것을 확신하며 이 노래를 우리 모두의 노래로 삼으시길 축복한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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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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