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우 목사
이희우 목사

시편 120-134편까지 15개 시편은 모두 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songs of degrees)라는 표제가 붙어 있다. 공동번역에서 ‘순례자의 노래’라는 표제가 붙으면서 ‘순례자의 노래’라고 불리는 시편들이다. 매튜 헨리는 주석에서 “표제에는 큰 의미를 두지 말라”고 했다. 이유는 “표제는 발행인이 붙인 것 같고, 그 어디에도 표제에 관한 설명도 없고, 유대 학자들도 그 뜻을 추측할 뿐이기 때문”이라 했다.

동일 필자도 아니고 동 시대에 쓰인 것도 아닌 것 같은 이 노래들은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첫째는 짧다는 것, 세 편(132,135,136편)만 길고 나머지는 모두 짧다. 세 편(131,133,134편)은 딱 세 절뿐이다. 이 시들이 시편 중 가장 긴 119편 바로 다음에 이어진다는 것도 흥미롭다.

두 번째는 구성면에서 절정에 이르면 앞에 나온 말을 반복하며 강조한다는 것이다. 120편의 “내가 화평을 미워하는 자들과 함께...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가 그렇고, 121편의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도 마찬가지고, 123편의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반복한다.

세 번째는 유대인 남자들이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그리고 ‘로쉬 하샤나’(ראש השנה)라는 새해 첫날 등 1년에 3번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할 때 노래한 시라는 것이다.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은 이것을 『한 길 가는 순례자』 서문에서 “봄이면 유월절을 맞아 하나님의 구원을 새롭게 기억하고, 초여름 오순절에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헌신을 재다짐하며, 초막절이 있는 가을에는 하나님이 베푸신 최상의 결실에 대한 복 받은 유대공동체로서의 반응”이라 했다. 그들은 이 시들을 외우며 성전에 올라갔다. 특히 디아스포라(διασπορά), 먼 타국에서 사는 사람들은 평생에 몇 번 가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순례자들은 예배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이 노래들을 부르며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그러니 이 시들이 순례자들에게는 감격이 있는 찬양이자 기도였던 것이다.

타향에서 이방인들과 잠깐이 아니라 거의 일생을 살던 사람들, 우상 문화를 이겨내며, 때로는 야만적이고 거친 이방인들로 인해 상처받으며 사는 곳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영향력을 행사해야 했던 사람들, 그들은 이 노래를 부르며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전으로 올라가는 순례자들은 멀리 예루살렘이 보이면 그때부터는 기어서 갔다는 말도 있다. 목적지는 이제 성전이 아니라, 예수님이 돌아가신 골고다의 십자가다. 그 목적지까지 가면서 즐겨 부르던 찬송이 바로 이 ‘순례자의 노래들’, 이 노래들은 성전 층계송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스라엘 성전에 니카노르 문이 있는데 성소를 가르는 육중한 문이다. ‘여인의 뜰’에서 ‘이스라엘의 뜰’로 올라가는 곳에 있다. 여인들은 이 문 앞까지만 가능하고, 유대 남성이나 제사장들만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 이 문 앞에 둥근 모양으로 오르는 층계, 15개의 계단이 있는데 미쉬나(משנה)에 의하면, 초막절에 레위인들이 ‘순례자의 노래’ 15편을 한 계단 오를 때마다 악기와 더불어 노래했다고 한다. 120편 제목을 ‘평화 갈망의 노래’로 정해 봤다.

응답하셨도다

시편에 나오는 시들은 어느 계절에 맞춰 읽는 시도 아니고, 대부분 편안하게 읽을 시도 아니다. 당장 1절을 보더라도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시작이 탄식이다. 양식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독일 개신교 구약학자 헤르만 궁켈(H. Gunkel)이 시편을 찬양시, 탄식시, 감사시, 지혜시, 왕의 대관시 등으로 분류했는데, 탄식시가 찬양시보다 더 많다. 150편 중 1/3 정도가 개인 탄식시일 정도이다.

성경 필사 때는 시편이 짧아서 좋을지 몰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기분 좋게 하기 위해 들려줄 시로 생각했다가는 후회할 거다. ‘살려 주소서, 억울합니다, 복수해주소서.’ 이런 탄식과 원망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게 진짜 우리네 인생 아닐까? 고난 없는 인생이 누가 있겠나? 너무 고달파서, 하소연할 곳조차 없어서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면 그래도 시원하기에 부르짖는다. 또 응답 주시면 인생 한고비를 넘길 수 있기 때문에 기도하며 산다.

이 시편은 에돔 사람 도엑이 사울에게 다윗을 비난할 때 다윗에 의해 기록된 것으로 추측되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52편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지금 여호와의 회중에서 떠나 타향살이를 너무 오래 한 것을 탄식하며, 자신이 야비한 사람 중에서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고 탄식한다.

그런데 순례자들이 이 시를 읽는다. 일이 마무리되거나, 좀 한가로와서 순례를 떠난 것이 아니다. 떠나기는 했지만 불안하다. 시인처럼 환난 중에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사람, 지금 사기꾼들, 기만자들의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로 인해 숨이 막힐 지경이다. 시인처럼 “내 생명을 건져달라”고 외쳐야 할 처지, 순례길에 오르는 것도 쉽지 않다. 거리도 멀고, 가족들이 다 함께 가는 것도 아니고, 가는 길에 또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 수 없다. 두고 가는 가족들의 안전도 자신의 안전도 불안한 것, 인생을 소풍이라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에게 인생은 소풍이 아니라 전쟁이다.

이런 걸 감안한다면 시편의 찬양은 진흙 구덩이나 황무지에 핀 꽃과 같다. 아름다운 정원이나 온실이 아니다. 진흙 구덩이나 황무지에 정리가 되지 않아 엉클어진 모습으로 핀 꽃, 깊은 수렁에 넘어지고, 그러다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겪으면서 아름다운 인생을 만들어가는 거다. 비록 우리의 평화가 전쟁터에서 잠깐 누리는 평화요, 안식일지라도 그 순간을 즐기며 사는 거다.

감사한 것은 시인이 기도로 거짓된 혀로부터 구원받았다는 거다. 자신의 심장을 멈추게 하려고 면전에서는 미소 짓고 입 맞추고, 우정을 빙자하여 친한 척하며 악한 계획을 도모하는 야비한 자들, 거짓된 고소자들, 그래서 자신의 명성이 더렵혀지고, 증오의 대상이 되었지만 시인은 그들과 함께 사는 전쟁터 같은 인생에서도 감사하며 찬양한다.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1절). 존 베일리(John Bailey)의 표현처럼 “갈림길을 비추어주는 불빛 같은 하나님,” 그 하나님께 악한 자들을 막을 다른 방법이 없어서, 나를 파멸시키려고 생명을 위협하기에 그들의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 기도한다. 그런데 응답하셨다는 것, 시인은 응답이 너무 기쁘고 감사하다. 히브리어 문장은 ‘부르짖었다. 그리고 응답하셨다’라는 구조, 실제 응답이 있었는지 지금까지 늘 그랬듯이 하나님이 응답 주실 것을 확신한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게 믿음이다. 하나님은 기도하면 응답하신다!

우리의 한숨과 탄식 소리를 들으시고 우리가 부르짖을 때 응답하시는 하나님, 이건 악인의 계획을 막는다는 뜻이고, 그들의 거짓된 입술로부터 하나님이 당신의 사람들을 보호하신다는 확신이다. 두려워할 이유 없다. 염려하지 말고 믿어야 한다. 우리의 싸움은 들으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이미 이긴 싸움,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승리의 하나님이시다.

생명을 건져 주소서

시인도 디아스포라 유대인 같다. “메섹에 머물며, 게달의 장막 중에 머무는 것이 내게 화로다”(5절), ‘메섹’은 노아의 아들 야벳의 아들, 전투력이 뛰어나고 호전적인 산악부족이다. ‘약탈’이란 이름을 가진 메섹은 하나님의 백성을 침략할 사악한 부족이다. 그리고 ‘게달’은 이스마엘의 둘째 아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을 의미한다. 그러니 메섹과 게달은 이방 족속으로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은 고통이다. 야만적이고 거친 사람들, 그들과 함께 사는 유대인들은 이방인이고, 난민이고, 소수자다. 이미 자리를 잡은 기존 세력들에게 이물질과 같은 존재들이 잘사는 것은 너무너무 싫은 것, 그래서 이방인들이 위협하고, 재산 빼앗고, 심지어 목숨마저 위태롭게 한다. 그래서 시인은 부르짖는다.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2절).

그들의 공격 방식이 시 곳곳에 나타난다. 1절의 ‘환난’, 2절의 ‘거짓된 입술’, ‘속이는 혀’, 3절의 ‘속이는 혀’, 6절과 7절의 ‘평화를 미워하는 자들’ 이 표현을 볼 때 그들은 주로 말로 공격했다. 항상 소수자를 향한 공격은 말로부터 시작된다. 온갖 혐오의 말과 거짓, 꼭 참소하는 마귀 같다. 거기서 멈추나? 아니다. 그들은 멀쩡한 사람에게 소송을 건다. 재판하거나 권력을 동원해 재산을 빼앗고, 신체를 구속한다. 그리고 마지막엔 칼로 죽이거나 추방한다. 그래서 이방 땅에서 독한 말과 혐오와 거짓말로 고통을 당하던 시인, ‘내가 이 땅에 너무 오래 거주하였나?’(6절) 후회한다. 그래서일까? 유진 피터슨은 120편의 메시지를 ‘회개’라 했다. 순례자들도 같은 심정, 성도 예루살렘이 가까울수록 여기가 내가 살아야 할 곳이 아닌가 생각했을 거다. 그들에게는 성도 예루살렘이 너무 그립다.

어디에 살든 이웃이 중요한데 시인이 사는 이웃 주민들은 악했던 모양이다. 간혹 착한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집단 논리가 문제였을 수도 있다.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사람이 집단 논리에 갇히면 착한 사람도 악마 된다. 얼마나 힘들었던지 시인은 하나님께 호소한다. “너 속이는 혀여 무엇을 네게 주며 무엇을 네게 더할꼬? 장사의 날카로운 화살과 로뎀나무 숯불이리로다”(3-4절). 온갖 거짓과 독설을 내뱉는 바로 그 독사의 혓바닥에, 전능자의 화살이 내리꽂힐 것이라 했다. 그리고 분노와 음모로 가득한 그 입에, 활활 타고 잘 꺼지지 않는 로뎀나무 불이 붙어 그 입을 태울 것이라 했다. 맹렬한 열기로 오랫동안 타는 불꽃, 이게 거짓을 사랑하며 거짓말을 지어내는 사람들이 받게 될 대가라는 거다.

시인은 사실 하나님의 복수를 기대한다. 마치 계시록 마지막 장 분위기 같다.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계22:15) 그렇다. 하나님은 믿는 사람들의 생명은 건지시고, 악인들은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다. 억울하고 분통 터져도 믿고 맡겨야 한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평화를 주소서

시인이 다윗이라면 그는 용사인데 7절에 보니, “나는 화평을 원한다”고 말한다. 맞다. 다윗은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길 원했던 평화의 사람, 누구와도 불화하길 원치 않았다. 원문은 “아니 샬롬(אני שלום)”, ‘나는 화평이다’라는 말, 시인이 누구든 본질적인 평화의 사람, 평화를 사랑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캐릭터의 기본 설정값이 평화, 모든 것의 목표가 평화인 사람, 평화를 위해 자기를 부정하고, 양보하는 성품이 평화로운 사람, 평화를 기뻐하고 평화를 기도하고 평화를 위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그런데 대적자들은 싸움을 거는 난폭한 사람들, 그들은 싸우려고 덤벼든다. 하지만 로마서의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12:18)는 말씀대로 그들이 싸우려고 하면 할수록 시인은 더욱 평화를 추구한다. 격렬한 야만인들, 무자비하며 불행을 초래하는 사람들이지만 같은 방법으로 이길 생각이 아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롬12:17), 복수를 원하던 사람이지만 악을 악으로 갚을 생각이 없다.

쉬운 일인가? 평화롭게 지내는 것, 쉽지 않다. 평화, 그저 비둘기로 상징되는 것이 아니고, 소박하고 서정적인 산촌의 풍경화로 대체되는 것도 아니다. 어떤 교수는 평화의 직접적인 뜻을 ‘전쟁이 없는 상태’라 했다. 분쟁과 갈등이 없는 상태, 깨지면 전쟁이라는 거다. 포탄이 떨어지는 전쟁터도 있지만 일상 속에서 날마다 치르는 전쟁, 입시 전쟁, 입사 전쟁, 교통 전쟁, 마케팅 전쟁... 생각해보면 평화만큼 다르게 해석되는 말도 흔치 않은 것 같다. 누군가에게 평화는 그저 햇살 좋은 날 해변에 누워 주스 한 잔을 곁에 두고 음악을 듣는 순간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오늘 밤 자는 동안 머리 위로 포탄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 평화다. 삶과 죽음을 가를 만한 평화는 잃어봐야 비로소 그 소중함을 깨닫는다. 식구들이 오순도순 모여 같이 밥 먹고, 도란도란 나직한 목소리로 정답게 이야기 나누는 것, 그게 진정한 평화였음을 평화의 사치를 누릴 때는 깨닫지 못한다. 그렇다. 우리의 일상은 사치스러운 평화였다. 대화와 타협, 수용과 공존, 다양성의 인정이 필요하지만 평화를 잃은 한국 사회, 그리고 전쟁 중인 국가들, 모두 다 평화를 갈망하고 있다.

시인도 그 평화를 원한다고 노래한다. 순례자들도 마찬가지, 어쩌면 시 84편 10절의 심정이었을 것 같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단순한 피신이 아니다. 순례자들은 지금 평화를 원하는 마음으로 평화의 도성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음을 알고 평화의 왕을 바라보는 심정이다.

시인이나 순례자들이 그토록 원하는 샬롬! 부활하신 예수께서 유대인들이 무서워 문을 닫고 있는 제자들에게 인사말로 전하셨던 첫 마디, 그렇다. 샬롬은 예수님과 함께할 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자 하나님의 백성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축복의 요새요 완성이다.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주를 신뢰하는 영혼에게 주어지는 절대적 축복의 완성, 그게 샬롬이다. 핵심은 화목과 평화, 결과는 치유요 축복인 샬롬, 삶의 현장에서 사탄과의 치열한 전쟁을 치르더라도 그때마다 시인처럼 평화를 갈망하며 주님 계신 곳으로 올라가는 이기는 순례자가 되어야 한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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