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아 윌리엄스
안드레아 윌리엄스 Christian Concern 최고 경양자. ©christianconcern.com

영국 크리스천투데이(CT)는 안드레아 윌리엄스의 기고글인 ‘우리는 조용한 부흥뿐만 아니라 도덕적 개혁이 필요하다’(We need a moral reformation - not just a quiet revival)를 3일(현지시각) 게재했다.

안드레아 윌리엄스는 Christian Concern 과 Christian Legal Centre의 최고 경영자로 재직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최근 며칠간,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이른바 ‘죽음의 주간’ 동안 의회에서 목격된 어둠을 두고 애통해했다. 국회의원들이 출생 직전까지의 낙태와 조력자살을 찬성 표결한 것이다. 이런 순간들은 많은 이들의 마음 속에 슬픔과 긴박감을 일으킨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들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수십 년간 뿌려진 씨앗의 열매였다.

비난이 아닌, 정직함으로 되돌아보아야 한다. 교회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까지의 수개월, 수년 동안 깨어 있었는가? 생명의 가치와 모든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명확하고 일관되게 말했는가? 사랑과 소망뿐 아니라 진리도 전했는가?

Christian Concern에서 우리는 오랫동안 이러한 문제들을 알리려 애써왔다. 그리스도께 충성하는 것은 공적 영역에서 진리를 지키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번 표결 전에, 교회가 더 적극적으로 나설 기회들이 있었다. 더 큰 연합과 결의가 있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 수도 있다. 모든 교회가 소극적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많은 곳이 이러한 문제들을 복음 증언의 핵심으로 삼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이렇게 초대한다. 함께 이야기하자. 함께 일하자. 수십 년간, 우리와 다른 단체들은 문화에 사랑과 용기를 가지고 말하는 교회를 섬기기 위해 힘써왔다. 우리가 종종 부족한 것은, 확신이 아니라, 자원과 하나로 연합된 교회였다.

나의 여정은 1988년 젊은 변호사로 시작되었다. 나는 예수님을 전하고, 캐롤 서비스를 주최하고, 복음 전도 활동을 이끄는 것을 사랑했다. 그러나 법조계에 들어서면서, 나는 법이 하나님의 진리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방식으로 문화를 형성하는 것을 보았다. 생명, 가정, 복음 전파의 자유에 대해 말할 때, 저항에 부딪히곤 했다. 문화로부터뿐 아니라, 더 아프게는 교회 안에서도.

‘열정적이다’, ‘날카롭다’, ‘분열적이다’라는 표현들이 이런 공적 증언을 두고 종종 사용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많은 이들이 깨닫게 되었다. 이것들은 주변적 문제가 아니라 복음적 문제라는 것을.

이제 우리는 출생 직전까지 태아가 보호받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노인, 약자, 정신적 고통을 겪는 이들은 돌봄이 아닌 ‘존엄한 죽음’을 제안받는 위험에 놓여 있다.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가?

너무 자주, 우리는 중요한 문제들을 ‘부차적’이거나 ‘너무 분열적’이라며 침묵했다. 그러나 문화가 생명과 가정, 진리 자체를 재정의할 때, 이것들은 복음으로부터의 방해물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을 더욱 온전히 선포할 기회다.

최근 교회 밖 공인들이 도덕과 사회 문제에 대해 분명하게 말할 때, 이 ‘조용한 부흥(Quiet Revival)’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우연일까? 예수 그리스도의 선하심과 지혜가 공적으로 선포될 때, 비록 논쟁적 이슈라 할지라도, 그것은 국민의 정서와 분위기를 형성한다. 그것이야말로 사람들이 기독교를 다시 진지하게 고려하게 하는 이유다.

그동안 교회의 침묵은 구원을 낳지 않았다. 문화가 교회에 더 부드러워진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 사회를 형성하는 세계관은 더욱 단단해져, 세대들은 자신들의 가치, 정체성, 심지어 인간성마저도 확신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출생 전 태아와 약자에 대한 보호를 제거하는 법안이 통과된 바로 다음 주, 많은 이들이 다시 의회 기도 아침 모임에 모였다. 훌륭한 행사처럼 보였고, 참석하고 연설한 많은 이들을 깊이 존경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늘 그랬던 대로’인 것처럼 보였다. 연설이 있었고, 기도가 있었고, 귀빈들에게 박수가 보내졌다.

내 즉각적 반응은 이것이었다. 공개적인 회개는 어디에 있었는가? 그 건물에서 방금 일어난 일들에 대한 국가적 애통은 어디에 있었는가? 통곡이 있었어야 했다. 깊은 자기 성찰이 있었어야 했다. 교회와 우리를 다스리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와 그의 길로 돌아가라는 국가적 도전이 있었어야 했다.

대신, 바로 그 전 주에 낙태 비범죄화와 조력자살에 모두 찬성표를 던진 자유민주당 의원 조이 프랭클린이 기도를 인도했다. 아무런 아이러니도 없이, 그녀는 그 자리에 있는 이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개인으로서 모든 사람을 존엄과 가치로 대하기”를 기도했다.

의회에서 기도를 인도하는 이가, 바로 전 주에 죽음을 위해 투표한 자라고 할 때, 어떻게 기독교적 증언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희망이 있다. 새로운 세대가 일어나고 있다.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진리를 갈망하는 세대다. 그들은 정의와 명확함, 그리고 예수님을 갈망한다. 그리고 이렇게 묻는다. “왜 아무도 내게 이걸 말해주지 않았나요?” 그들은 도덕적 개혁(Moral Reformation)을 부르짖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고, 하나님의 가정 설계를 존중하며, 약자를 지키는 것이 주변적 문제가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고 창조주를 경외하는 일의 중심임을 본다.

교회가 실패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실패하셨기 때문이 아니다. 주님은 결코 실패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예언자의 목소리를 잃었다. 용기를 편안함으로 바꿨다. 의로움 대신 인정받음을 택했다. 이제, 예레미야 시대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전에 모여 예배할 뿐 아니라, 우리의 땅의 상태를 보고 울라고 부르고 계신다.

이것은 절망이 아닌, 회개와 목적의식을 가지고 일어나라는 부르심이다. 예수 그리스도, 사자이시며 어린양이신 주님은 침묵하시는 구주가 아니다. 그는 의로 다스리신다. 그리고 타협 없이 그의 진리를 선포하라고 우리를 부르신다.

“너무 정치적이다”라고 경고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예수님은 모든 것의 주님이시며, 정치도 그 안에 포함된다. 그분은 나라들을 세우시고 영원을 정하신다. 그의 진리는 모든 영역에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말해져야 한다.

땅이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왕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반석이시다. 이제 고개를 들 때다. 이제 입을 열 때다. 이제 용기를 낼 때다. 교회여, 깨어나라. 일어나라. 때는 늦었으나, 우리 하나님은 결코 늦지 않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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