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트 풀턴 박사
브랜트 풀턴 박사. ©chinasource.org

미국 크리스천데일리인터내셔널(CDI)은 브렌트 풀턴 박사의 기고글인 ‘박해의 종식은 현실적인 희망이지만, 그동안 우리는 한탄한다’(The end of persecution is a realistic hope but in the meantime we lament)를 지난 30일(현지시각) 게재했다.

풀턴 박사는 ChinaSource의 창립자이며 2019년까지 초대 회장으로 재직했다. 그전에는 휘턴 칼리지의 중국어 연구소 소장을 역임했으며, 중국 국제부 미국 지부장과 홍콩 중국 교회 연구 센터의 영문 간행물 편집장을 역임했다. 현재 중국에서 파견된 선교사들에게 봉사하는 회원 돌봄 전문가 네트워크를 운영하고 있으며, 중국의 종교 정책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 다른 기관과 상담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중국 내 기독교 활동 공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소식은 전 세계 교회에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중국을 박해의 렌즈로 바라보게 된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이런 강한 부당함의 감정과 함께 따라오는 질문이 있다.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고통은 과연 끝날 것인가?”

‘Ending Persecution(박해를 끝내기)’라는 야심찬 제목의 책에서 인권변호사 녹스 템스(Knox Thames)는 “그렇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는 중국을 비롯해 여러 나라에서 신앙인들이 겪는 자유 침해 사례를 다루며, 현재 박해를 조장하는 조건들을 변화시키고 가해자들에게 책임을 묻기 위한 정치적 행동을 촉구한다.

법적으로 보았을 때, 템스의 주장은 옳다. 중국의 경우, 이러한 박해는 국제 규범과 중국이 비준한 유엔 협약뿐 아니라 중국 헌법에 보장된 권리마저 위반한다.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법적, 외교적 해결을 모색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템스 자신도 지적하듯, 중국 관리들의 면책특권으로 인해 법적 해결은 무력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밖 기독교인들의 집단적 항의는 자신들의 웹사이트, 보도자료, 정부 브리핑을 넘어서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국가 안보와 당의 전면 통제를 최우선시하는 현 정권 아래에서, 이 상황이 곧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박해받는 자들을 기억하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갇힌 자를 함께 갇힌 것 같이, 학대받는 자를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함께 생각하라”(히브리서 13:3)고 부름받았다. 그래서 그들은 기도하며, 고통받는 자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가능한 곳에서 개입하며 실질적인 위로와 도움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 모든 행동의 한편에는, 그리스도의 재림 전까지는 박해가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냉엄한 현실 인식이 있다.

박해는 교회 역사 내내 이어져 왔다. 오늘날도 많은 신자들에게 일상의 일부다. 예수께서도 그렇게 될 것이라 말씀하셨다. 따라서 우리가 박해받는 자들을 위해 행동하는 이유는 모든 박해가 끝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향한 사랑 때문이다.

애통의 길

박해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박해가 이야기의 끝은 아니다. 행동해야 한다는 imperative(명령)와 우리의 행동이 한계가 있다는 현실 인식 사이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슬픔을 외면하지 않고, 고통의 현실을 끌어안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알 수 없는 뜻에 믿음으로 맡긴다는 뜻이다.

싱어송라이터 마이클 카드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일이 오든지 간에 ‘나는 하나님을 놓지 않겠다’고 고백하는 것은, 고통을 풀 수 없는 신비로 받아들이는 마음을 드러낸다.”

그의 책 『A Sacred Sorrow(거룩한 슬픔)』에서 카드는, 성경이 제시하는 삶의 이상과 현실의 부조리함 사이의 간극을 파헤친다. 그는 시편에서 율법 중심의 초반부가 곧 lament(애통)로 터져 나오는 모습을 지적한다. 율법이 제시한 답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세상의 모순 앞에서, 시편 기자들은 애통으로 나아간 것이다.

구약학자 월터 브루그만의 연구를 바탕으로, 카드는 순종에서 lament로의 흐름을 설명한다. 이는 우리가 결과를 통제하고자 하는 본능에 반하는 것이다. 순종이 반드시 행복으로 이어진다고 믿는 우리의 관념을 깨뜨린다. 그러나 카드는 말한다. “애통만이 이 부서진 세상 앞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진정한 반응”이라고 말이다.

박해 앞에서, 교회의 진짜 대답

기독교인들에게 박해의 해답은 법적 해결책이 아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고 필요하다. 그러나 ‘이래야 한다’는 주장은 구조적 불평등, 뿌리 깊은 차별, 면책특권을 지닌 지도자들 앞에서 결국 무력해진다.

어려운 해답은 바로 lament, 즉 애통이다. 세상이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정하되, 하나님이 그 고통 속에 함께하심을 믿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고난받는 이와 함께 고난받고, 그 고난 속에서 그의 사랑을 경험한다. 예수님은 우리가 애통하는 모든 원인을 지금 당장 없애시기 위해 오시지 않았다. 오히려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주시기 위해 오셨다. 그것이 우리의 심장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4) 박해받는 자들과 함께 서는 것은 애통하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이다. 마이클 카드는 말한다. “우리의 절망과 그들의 절망을 정직하게 끌어안기 전까지, 세상은 복음을 들을 수 없다. 애통을 배우기 전까지, 우리는 세상에 할 말이 없다.”

애통에서 예배로

그러나 애통은 단순한 한탄으로 끝나지 않는다. 시편과 욥기의 흐름처럼, 애통은 불평을 거쳐 결국 예배로 나아간다.

시편 13편에서도,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로 시작해, 자신의 영혼의 고통과 원수의 위협을 토로하다가, 마지막에는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시편 13:5-6)

진정한 예배는 광야에서 시작된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맛본 자는 예배하는 심장을 갖게 된다.

이 땅에서 ‘박해의 끝’, 즉 박해의 소멸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박해의 궁극적 목적(telos)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고난 중에도 그의 변치 않는 사랑을 증거하는 데 있다. 애통은 절망에서 예배로, 황폐함에서 하나님과의 친밀함으로 우리를 이끈다.

계시록 21장은 애통의 진정한 끝을 약속한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시록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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