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론 드 블라시오 작가
말론 드 블라시오 작가. ©기독일보 DB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말론 드 블라시오 작가의 기고글인 ‘하나님과의 관계는 망상인 것일까?’(Is a relationship with God delusional?)를 25일(현지시각) 게재했다.

블라시오 작가는 문화 옹호자, 기독교 작가, 그리고 '문화를 분별하다'(Discerning Culture)의 저자로 활동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사람들은 종종 객관적인 의미를 전달하려 할 때 적절한 언어를 찾지 못하곤 한다.

필자는 그리스도인의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 역시 때로는 그것을 온전히 설명하기에 충분한 말이나 해답이 부족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 신앙이 지닌 객관적인 의미가 무효화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 신앙에는 분명히 인간의 이해로는 완전히 다다를 수 없는 차원이 존재한다. “그의 지혜는 측량할 수 없다”(시편 147:5)는 말처럼,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도 말씀하셨듯이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다”(이사야 55:9). 바울도 알 수 없는 영역을 언급하며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에 떠오르지 않은 것들,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들”(고린도전서 2:9)을 강조했다.

기독교 신앙의 객관성은 하나님에 대한 모든 질문에 답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누가 하나님이 물리학과 수학의 불변 법칙을 창조하신 방식에 대해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인류의 존재를 위해 중력의 법칙을 정밀하게 조정하신 이유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완전한 인간이 어떻게 태어나는지를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가?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시편 139:6). 이러한 불가해함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가 객관적 의미를 결여했다거나 신뢰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일부 회의론자들은 언어를 문화와 사회적 맥락에 묶인 것으로 보는 후기구조주의 문학 이론을 근거로, 특정 문헌을 읽는 해석이 신뢰할 수 있는 객관적 의미를 제공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문학 이론이 타인의 해석을 주관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자기 자신은 객관적인 위치에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정직하지 않다. 낸시 피어시(Nancy Pearcey)는 ‘Finding Truth’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실제로, 해체주의자들이 작동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비판으로부터 자신을 암묵적으로 면제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만은 권력과 이익의 산물에서 벗어나 있다고 가정하면서도, 타인의 모든 주장은 해체하려 든다…”

필자는 문헌을 해석함에 있어 ‘공감적 읽기’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싶다. 즉, 저자가 독자에게 무엇을 전달하려 했는지를 정직하게 해석하는 것이다. 윌리엄 레인 크레이그(William Lane Craig)는 ‘Reasonable Faith’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포스트모던 문화 속에 살고 있다는 생각은 하나의 신화다. 실제로 포스트모던 문화는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도무지 지속 불가능한 것이다. 예를 들어 두통약 병과 쥐약 병의 라벨을 읽을 때, 누구도 포스트모던주의자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실제로 라벨을 ‘공감적으로’ 읽어야 한다.

객관적인 의미는 실제로 존재한다. 그러나 죄, 회개,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와 같은 성경적 주제들에 대해서는 필요 이상으로 혼란이 더해진다. 때로는 기독교 신앙의 유효성을 약화시키기 위해 언어적 요설과 지적 교묘함이 동원된다. 그러나 성경은 인류에게 구속의 역사를 계시하고, 창조주께 돌아가는 길을 보여준다. 마음을 열고 진리를 찾고자 하는 이라면, 이 시대를 초월한 기독교 신앙을 스스로 탐구해볼 책임이 있다. 필자는 늘 이렇게 말한다. “스스로의 생각이 있다면, 남이 대신 생각하도록 놔둘 이유가 있는가?”

“옛적에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선지자들을 통하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브리서 1:1). 성경 속 인물들은 실제로 존재했던 사람들이었고, 실제 지역에서 활동했으며, 시간 속에 정확히 기록되었다. 이들은 서로를 알지 못했음에도 그 메시지는 세대를 초월해 일관되었다. 그리고 바울은 이를 풀어 설명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공감적으로 읽는 이라면, 그 의미를 놓칠 수 없을 것이다. 듣지 않으려 하거나, 믿고 싶지 않거나, 지금 시대에 적용될 수 없다고 외면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기독교 신앙의 객관성은 하나님과 화해하고 그분이 의도하신 인간으로 성장해가는 데 있다. 수많은 성도들이 수 세기 동안 지적이고 영적인 수고를 통해 이 목표를 경험해왔다. 이른바 ‘약점 잡기’식 질문들도 기독교 신앙을 무효화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어디서 오셨는가?”와 같은 질문이 있다. 이에 대해 성경적이고 철학적인 해석은 존재하지만, 설령 한 신자가 “모르겠다”고 답한다 해도, 그 사실만으로 그의 신앙이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유한한 이성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시기 전에 무엇을 하셨는가? 필자는 모른다.

그리고 필자는 하나님을 아는 기쁨과 평화를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하겠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며,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즐거워하나니…”(벧전 1:8)라 했고, 바울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7)며,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을 강조했다. 이러한 성령의 열매는 진실한 신앙의 본질을 이루지만, 신자들은 그것을 다 설명할 언어를 찾지 못할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성경을 통해 계시하신 진리 위에 기초한 기독교 신앙은, 객관적인 의미를 지니며 누구나 경험할 수 있다. 필자는 도전하고 싶다. 먼저 성경을 공감적으로 읽고, 저자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부터 진지하게 들어보라. 비판은 그 이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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