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존 스톤스트리트 회장과 쉐인 모리스 작가의 기고글인 ‘NT 라이트가 여전히 생명이 필요한 이유를 보여주다’(NT Wright shows why we still need the case for life)를 최근 게재했다.
스톤스트리트 회장은 콜슨 기독교 세계관 센터의 회장을 맡고 있으며 신앙과 문화, 신학, 세계관, 교육 및 변증법 분야에서 인기 있는 작가이자 연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모리스 작가는 콜슨 센터의 선임 작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BreakPoint 해설과 칼럼 등의 글을 쓰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최근 부활 신학의 권위자이자 전 더럼 주교로 널리 알려진 영국의 저명한 신학자 N.T. 라이트가 낙태의 도덕성에 대한 기본적인 논점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무지한 발언을 하며 충격을 안겼다. 자신의 팟캐스트 ‘Ask N.T. Wright Anything’에서 낙태에 대한 질문에 응답하던 라이트는 때로 낙태가 최선의 선택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낙태는) 많은 경우에 있어 어머니의 건강과 아이의 건강 사이의 문제입니다. 특히 강간이나 근친상간의 경우라면 ‘이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말았어야 한다’는 매우 강력한 주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원칙적으로 이런 일을 하고 싶지 않지만, 슬픔과 약간의 부끄러움을 안고 가능한 한 빨리... 이 임신을 중단하는 것이 최선일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라이트는 이어 임신 후반기의 태아를 죽이는 것은 “혐오스럽다”고 강조하며, 태어난 이후의 유아 살해와도 맞먹는 “이교적인” 악이라고 말하고, 초대 교회가 이를 반대한 것은 옳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임신 후반기”란 정확히 어떤 시점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선 자신이 판단할 자격이 없다고 밝혔다. “남성으로서 이런 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말하며, 낙태 문제에 대해 확고한 입장을 가진 남성들은 여성에게 “강압적”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나는 의학적으로 언제부터 아이가 생명으로 간주되어 소중히 여겨져야 하는지를 말할 자격이 없다”고 덧붙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곧바로 ‘생존 가능성(viability)’이 그 기준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라이트에 따르면 강간, 근친상간, “심각한 기형”의 경우에는 낙태가 “슬픔”과 “부끄러움” 속에서 가능한 한 빨리 이루어져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도덕적으로 “혐오스러운” 후기 낙태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도덕적 기준선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명확히 말하지 않고, 남성 또는 비전문가가 그것을 말할 수 없다고 덧붙인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낙태가 “슬픔”과 “부끄러움”을 동반해야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뜻이 아닌가? 그리고 만일 그것이 잘못된 일이라면, 기형을 가진 무고한 생명을 죽이는 것이 어떻게 동정심의 표현이 될 수 있는가? 강간이나 근친상간이라는 악을 또 다른 악으로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는가?
또한, 그는 “많은 경우에 산모의 건강(특히 “정신 건강”)을 이유로 낙태가 정당화될 수 있다”고 했는데, 그 기준은 누가 결정하는가? ‘정신 건강’을 이유로 정당화할 수 없는 낙태란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더 나아가, 왜 “심각한 기형”을 가진 아기는 태어나기 전에는 죽여도 되지만, 태어난 후에는 안 되는가? 그리고 자신이 생명이 소중히 여겨져야 하는 시점을 판단할 자격이 없다고 하면서도, 생존 가능성을 그 기준으로 삼는 것은 모순 아닌가?
라이트의 모든 주장은 낙태 옹호론자들의 전형적인 논리를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며, 그 내부의 모순은 너무나 뚜렷하다. 이런 주장은 낙태가 인간 생명을 죽이는 일이 아니라는 전제를 전제로 삼는다. 라이트가 이러한 논리를 흡수해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생명 옹호 진영의 핵심 논지를 알지 못하거나 무시하고 있다는 증거다.
이에 대해 스콧 크루젠도르프(Scott Klusendorf)의 명쾌한 생명 옹호 논리 구조는 라이트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전제 1: 무고한 인간을 의도적으로 죽이는 것은 언제나 잘못이다. / 전제 2: 낙태는 무고한 인간을 죽이는 것이다. / 결론: 그러므로 낙태는 언제나 잘못이다.
낙태가 어떤 상황에서는 “최선의 선택”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이 두 전제 중 적어도 하나를 반박해야 하며, 또는 결론 자체가 잘못되었음을 입증해야 한다. 하지만 라이트는 이 작업을 피해간다.
라이트는 또 다른 문제적 발언도 했다. 그는 예수의 ‘육체적 부활’이 모든 기독교인에게 반드시 필요한 믿음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심지어 이 문제를 더 잘 알고 있는 신학자들조차 “그냥 매우 혼란스러운 것일 뿐”이라며 정당화하려 했다. 그는 바울의 육체적 부활에 대한 강한 신앙 고백과는 반대로, 같은 신학자인 마커스 보그(Marcus Borg)의 불신앙을 감싸안았다. 이는 예수의 부활을 탁월하게 변증했던 그의 저작들과 모순된다.
물론 라이트의 저술과 성경 해석은 전 세계 교회에 엄청난 유익을 주었고, 그는 우리 시대의 가장 탁월한 학자 중 한 명이다. 그러나 생명에 대한 진리는 그의 저술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진리이다. 이러한 기본적 진리들조차 때로는 다시 반복해 강조해야 하며, 특히 그 누구보다 진리를 잘 알아야 할 신자들에게도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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