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더 톰린슨 작가
헤더 톰린슨 작가. ©x.com/heathertomli

영국 크리스천투데이는 헤더 톰린슨 작가의 기고글인 ‘소셜 미디어가 나를 더 나은 기독교인으로 만든 방법’(How social media made me a better Christian)을 26일(현지시각) 게재했다.

톰린슨 작가는 프리렌서 크리스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요즘 많은 이들이 온라인 소셜미디어가 개인과 사회 전반에 해를 끼치고 있다고 우려한다. 이를테면, 공적 담론의 질을 떨어뜨리고, 잘못된 정보나 거짓을 퍼뜨리며,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우울하게 만든다는 비판이 있다.

이러한 우려는 충분히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20년 넘게 몸담아 온 언론계도 인터넷으로 인해 여러 면에서 타격을 입었다. 저널리즘의 품질과 생존 가능성 모두 하락했고, 수많은 팟캐스트와 미디어 매체들 속에서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는 오히려 개인을 잘못된 방식으로 ‘무지’하게 만들고 있다.

글쓰기와 조사 수준이 전반적으로 낮아졌고, 우리가 참조하는 정보원의 폭도 좁아졌다. 그래서 종종 주류 언론이 편향적이거나 질이 낮다는 비판을 받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일 수 있다. 안타깝게도 이는 특정인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인터넷 시대의 불가피한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개인 차원에서의 해로운 영향인 정신 건강 악화, 부족한 이해, 집단주의적 사고 등은 우리가 소셜미디어를 어떤 태도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충분히 개선 가능하다고 본다. 의도적인 방식으로 접근하면, 해로운 도구가 아니라 영적으로 유익한 기회가 될 수 있다. 소셜미디어가 우리의 최악을 드러낼 때, 그것을 통해 더 나은 길을 모색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의미가 있다.

트위터(X)와의 러브(헤이트) 스토리

이 글의 제목만 보면 필자가 X에서 ‘모범적인 기독교인’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필자는 X에서 여러 차례, 사랑보다는 분노와 거친 말을 드러낸 적이 많다. 때로는 무례하게 굴고, 잘 알지도 못하는 사안에 대해 훈계하듯 말하며, 무의미한 논쟁에 휘말리곤 했다.

소셜미디어는 유독 사람들의 나쁜 면을 끌어내는 데 탁월하다. 실제로 필자가 현실에서는 친절하고 온유하다고 여겼던 이들이 X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는 평화롭고 긍정적인 글을 쓰다가, 몇 주 지나지 않아 분노에 찬 반응주의자나 극단적 활동가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았다.

X는 필자에게도 그런 변화를 불러왔다. 필자는 그곳에서 지금껏 목격한 가장 심한 인종차별과 악성 댓글을 경험했다. 최근 필자가 한 표현을 문제 삼았던 익명의 계정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쓴 글을 읽어봤는데, 전혀 공감되지 않으니 조용히 꺼져줬으면 좋겠어요, Heather.” 물론, 그 문장에선 별표(*) 없이 직접적인 욕설이 사용됐다.

하지만 필자는 바로 이 ‘도발’과 ‘분노 유발’의 특성이, 기도와 예수님의 가르침과 결합될 때 영적인 열매를 맺게 한다고 믿는다.

초기의 모습

2010년 처음 트위터를 사용했을 당시, 필자는 무신론자들과 열띤 논쟁을 벌이곤 했다. 한 예로 ‘Satan de Sade’라는 계정과 오랫동안 설전을 벌였던 기억이 있다. 지금 돌이켜보면, 서로 모욕만 주고받은 비생산적인 대화였다.

실제로 상대방이 눈앞에 없으면 훨씬 쉽게 무례해진다는 점은 자주 지적되는 사실이다. 이제는 건설적인 대화가 가능하다고 판단되지 않으면 웬만해선 논쟁에 참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당시의 격렬한 논쟁들이 필자의 내면을 돌아보게 했고, 변화의 계기가 되었다. 필자가 트위터에서 누군가를 공격하고 방어적인 태도를 취할수록, 그 안에 있는 분노와 자만심을 인식하게 됐다. 기독교인으로서 예수님의 말씀은 이러한 행동에 대해 경고한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태복음 5:22).

이 말씀은 우리를 기도의 자리로 이끈다. 잠시 기도만 해도 이러한 공격적 행동의 뿌리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분노이며, 자존심이며, 자신의 의견이 다른 사람의 존중을 받아야 한다는 착각이다. 이런 감정은 보통 내면에 억눌려 있지만, 소셜미디어라는 배출구가 생기면 드러나게 된다. 이 해방감은 자칫 잘못된 카타르시스가 될 수 있지만, 변화의 계기가 된다면 의미 있는 것이다.

숨겨진 악한 감정과 죄성이 드러났을 때,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 앞에 가져가야 한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은 말한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목회자 댄 몰러는 자주 묻는다. “당신이 압박을 받을 때, 예수가 튀어나오는가?” 필자는 X를 통해 필자가 압박받을 때 예수가 아니라 자아가 나온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기도와 회개, 그리고 다시금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결단이 필요했다.

지금도 가끔은 거칠고 비꼬는 방식으로 반응할 때가 있다. 하지만 몇 년 사이, 상대가 무례하거나 말도 안 되는 의견을 말할 때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한 템포 쉬게 된 자신을 발견한다. 잘하면 완전히 넘어가고, 화도 나지 않으며, 오히려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이러한 변화는 트위터의 혹독한 환경 속에서 연단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집단화의 유혹

또 하나의 영적 통찰은 소셜미디어에서 얼마나 쉽게 ‘집단주의적’ 사고에 빠지는가 하는 점이다. 사람은 자신이 속한 그룹을 지나치게 신뢰하고, 상대 진영을 무시하거나 적대하는 경향이 있다.

이 현상은 기독교인, 무신론자, 민주당원, 공화당원, 노동당, 보수당, 트랜스젠더 지지자나 반대자 등 어떤 그룹에도 예외 없이 나타난다.

특히 그 집단이 도덕적 우월감을 가질 때 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자신이 윤리적 이슈를 다루고 있다는 확신이 있을수록, 상대방에 대한 비난은 더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필자 역시 과거에는 진보적이고 좌파적 성향이었으나, 지금은 보수적이다. 한때는 무신론자였고, 지금은 신앙을 가진 기독교인이다.

그러나 좌우, 종교 유무를 막론하고, 인간의 본성은 동일하다. 우리는 타인을 깎아내리고, 자신이 속한 집단을 높임으로써 우월감을 느끼고 싶어한다. 이는 기도를 통해 성찰해 보면 쉽게 드러난다. 아주 미묘한 비판이나 분류조차도 이런 죄성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이러한 집단주의의 유혹을 인식하고 빛 가운데 드러내는 것이 변화의 출발점이었다. 한 걸음 물러서서 보면, 각 집단에서 보이는 극단적인 행동은 놀랍도록 유사하다. 자신의 집단의 문제를 외면하고 상대 집단만 비판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에, 이 문제가 더 심화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단호하면서도 해방감을 준다. 마태복음 7장 3~5절: “왜 너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래야 형제의 티도 분명히 볼 수 있다.”

이 말씀을 통해 필자는 우리 모두가 같은 배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필자는 누구보다 더 낫지 않으며, 동일한 죄성에 쉽게 빠진다. 그러므로 먼저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우선이다.

기독교인도 분노와 교만, 미움의 집단심리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우리에겐 회개와 구원의 길이 있다. 논쟁하거나 비난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우리는 그 마음의 뿌리를 돌아보고 기도로 예수님의 사랑을 구할 수 있다.

트위터(X)는 분명 필자를 때로는 벗어나게도 만들었지만, 그때마다 문제를 하나님께 가져가면 다시금 사랑을 배울 수 있었다. 예수님의 지혜, 특히 산상수훈에서 주시는 말씀은 온라인 세계도 변화시킬 수 있다. 그리스도는 모든 공간과 공동체를 구속하실 수 있으며, X도 예외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히 말해서, X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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