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우 목사
이희우 목사

옛날 얘기지만 어떤 회사 신입사원 선발을 위한 질문에 이런 문제가 있었다. “당신이 거센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길에 차를 혼자 몰고 가고 있는데 한 작은 마을 버스정류장에 세 사람이 초조하게 비를 맞으며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자. 한 사람은 위독하신 할머니이고, 다른 한 사람은 한때 당신 생명을 구해준 아주 고마운 분, 그리고 또 다른 한 사람은 묘령의 여인, 평생 찾던 아주 이상형의 아름다운 여자인데 그 셋 가운데 한 사람만 차에 태워갈 수 있다면 당신은 그 중에서 누구를 태워가겠나?”

200:1의 경쟁 속에서 당당하게 합격하고 요직에 발탁된 어떤 사람은 답을 이렇게 적었다. “내 자동차 키를 의사에게 주고 위독하신 할머니를 모시고 가서 정성껏 치료해달라고 하고, 나는 이상형의 아름다운 그 여자와 함께 버스를 기다리겠습니다.” 세 사람을 다 살리고 자기 소원도 성취한 굿 아이디어였다. 소위 ‘win win, 너 좋고 나 좋고’로 답을 썼기에 그는 회사에 큰 도움이 될 사람으로 평가받았다.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작품 『햄릿』(Hamlet)에서 햄릿 왕은 “인생은 선택의 역속”(Life is series of choices)이라 했다. 맞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선택에 따라 우리의 운명이 결정될 수 있다는 거다. 베드로도 지금 결정적인 선택의 순간을 맞았다. 너무도 중요한 시점이다. 제자들 중 제일 맏형, 그렇게 임명받은 적은 없지만 그는 예수님의 수제자이다. 비록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여 체면을 구기긴했지만 아직 예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깨진 것이 아니다. 그래서일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세 번째 만나고도 쭈빗거렸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 면전에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세 번을 물으셨다. 보복이 아니다. 문제 삼지 않겠다는 것, 다 잊자는 거다. 한 번쯤은 “야, 어떻게 세 번씩이나 맹세하고 저주까지 하냐?” 그럴 법하나 일체 과거를 묻지 않으신다.

리처드 바크(Richard David Bach)의 『갈매기의 꿈』(Jonathan Livingston Seagull)에 보면 “생의 마지막 끝에서 삶을 정리하고 돌아볼 때 가장 가치 있는 질문은 오직 하나, ‘나는 누구를 얼마나 사랑했느냐?’ 그것뿐”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예수님도 그걸 물으셨다. “누구를 얼마나 사랑했느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 따라 내 인생이 평가된다. 베드로는 세 번 다 같은 대답을 한다. “사랑합니다. 주님, 주님이 아십니다”.

21장은 요한복음의 ‘에필로그’(Epilogue), 소설이나 연극도 아니고, 또 영화나 만화도 아니며, 작품의 줄거리가 끝난 후에 덧붙인 보충된 후일담 혹은 부록이란 말인데 성경에 무슨 에필로그냐 그럴지 몰라도 요한복음은 20장 31절로 마무리된 느낌만큼은 분명하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서 끝나는 게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그런데 오히려 마태가 복음서의 마지막에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기록하고,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지상명령을 한 것과 비슷하게 분위기를 맞춘 듯한 21장이 붙여졌다. 물론 마지막 명령이 매우 인간적인 언어와 형식이다. 베드로와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사랑하는 제자의 미래에 관한 말씀이 핵심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한 사랑만큼은 변함이 없음을 세 번 연속 밝히자 그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나를 따르라”였다. “나를 따르라”는 제목으로 요한복음의 대장정을 끝내려 한다.

베드로에게 주신 말씀

세 번에 걸친 사랑 고백은 베드로의 선택이었다. 자신의 아픈 과거를 깨끗이 씻을 수만 있다면 주님과의 사랑을 회복하면 좋겠다는 선택, 이 선택이 “내 양을 먹이라”는 거역할 수 없는 소명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주님은 베드로의 자발적인 이 선택으로 말미암아 앞으로는 더 이상 자기 삶을 자의적으로 살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18-19절). 공관복음서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 베드로의 숨은 이야기, 베드로가 자발적으로 주님께 붙잡혔다는 거다.

돌이켜보면 요한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사건을 복음서 중에서 가장 약하게 다루었다. 마치 의도적으로 베드로의 약점을 감춘 것 같다. 그리고 복음서 내내 은근히 베드로 띄우기에 집중했다. 항상 형님 먼저, 최고의 자리를 베드로에게 양보하는 자세로 일관했다.

제일 먼저 제자가 되었던 것도 아니고, 자신의 형제인 안드레의 인도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지만 그 후 안드레는 오병이어의 기적 때 외에는 전혀 거명하지 않는 반면에 베드로는 핵심 인물로 다룬다. 최후의 만찬석상에서도 그랬다. 예수님의 품에 의지하여 음식을 먹은 것은 요한이었는데 질문의 주도권은 베드로에게 있었다(13:24). 예수님이 대제사장에게 심문을 받을 때도 그랬다. 베드로가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은 요한이었다(18:15). 그리고 부활의 무덤에 가장 먼저 달려갔던 사람도 요한이었지만 요한은 무덤 안으로 제일 먼저 들어간 사람은 베드로였다고 한다(20:4-6). 그뿐인가? 디베랴 바닷가에 서 계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알아본 것도 요한이지만 요한은 베드로가 바다로 뛰어들었다고 했다. 급한 성질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성질이라면 요한도 만만치 않다.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잘랐다면 요한은 예수 일행을 배척하는 마을을 불태워버리자고 했다. 그렇다면 바다로 뛰어들었다는 것도 의도적인 베드로 띄우기로 볼 수밖에 없다.

요한이 예수께서 베드로의 죽음에 대해 예고하셨다고 밝힌 부분도 같은 맥락이다. “나를 따르라”는 십자가의 길, 순교자의 길을 따르라는 말씀, 그러니 그의 죽음이 자연적인 죽음이 아니라 순교라는 거다. 순교가 부인과 저주에 대한 보복인가? 아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영광으로 다룬 것처럼 순교도 하늘로 가는 영광으로 다룬다. 요한만 그런 게 아니다. 초대교회 시절, 순교는 최고의 가치였다. 그리고 “나를 따르라”는 사랑의 명령이기도 하다. 앞으로도 함께하자는 것, 사랑에 실패했던 베드로 입장에서는 감격이었을 거다. 공관복음에는 나오지 않는 이야기, 요한은 베드로 띄우기를 위해 이 내용을 복음서 부록에 추가로 남겼다.

신약 외경인 ‘베드로 행전’에 보면 베드로의 순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베드로는 네로의 박해를 피해 로마를 떠나가다 노상에서 로마로 가고 계시는 예수님을 만난다. 예수님이 “네가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 하니 내가 다시 십자가를 지기 위해 로마로 간다”라고 하시자 소설에서는 충격을 받은 베드로가 “쿼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외치다 회개하고 로마로 되돌아가 사역하다 체포당한 후 십자가 처형을 당한다. 베드로는 “내가 어찌 주님처럼 바로 매달릴 수 있겠는가” 고백하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린 채 순교하였다. 실패의 길을 걷던 베드로가 회복을 넘어 철저한 순종과 순교의 길을 걸은, 진주 같이 빛나는 영롱한 보석이 되었다는 말이다.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명령 때문이다.

요한에게 주신 말씀

학자들은 베드로가 “이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20-21절)라고 물은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요한을 가르킨다는 데 별 이견이 없다. 요한이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로 기억되길 원한 것인데 예수님의 말씀은 “나를 따르라”, 요한과는 상관없는 말씀처럼 보이지만 무관하지 않다. “나를 따르라”, 순교으로만 따르는 게 아니다. 베드로에게 한 말씀이지만 듣고 있던 요한은 그 말씀을 자기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는다. 이게 중요하다. 이런 일은 대화할 때 흔히 있는 일이다. 마음이 열린 사람이 말씀을 받는 거다.

한편 베드로는 자신의 죽음에 대한 말씀을 듣다가 요한이 바짝 뒤따르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렇다면 쟤는요?”하고 물었다. 요한도 순교 당할 것인지를 물은 거다. 맏형답게 “나 하나 순교하는 것으로 족합니다” 그랬어야 하는데 마치 다른 사람까지 끌어들이는 물귀신 작전을 펴는 것 같다. 예수님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22절), “상관하지 말라”며 다시 한 번 “나를 따르라”고 하신다. 베드로 입장에서는 요한이 부러웠을 수도 있다. 순교가 누구에게나 두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요한 순간에 늘 예수님 곁에 있으면서 사랑을 독차지하는 요한, 지금은 예수님의 어머니까지 맡은 상황이라 경쟁의식, 비교의식, 질투심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요한의 기록이라 그럴까? 요한에게서는 그런 감정을 찾을 수 없다. 조금도 베드로를 비겁하고 치사한 형으로 몰지 않는다. 요한은 순교도 십자가처럼 영광으로 여겼다. 그리고 순교든 장수든 그건 인간의 선택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택, 그런 면에서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순교든 장수든 하나님의 뜻에 따르면 된다는 게 요한의 생각이다. 하나님의 뜻이 베드로는 순교, 요한은 장수라는 것, 결국 베드로는 순교했고, 요한은 열 두 제자 중 가장 오래 살면서 목회하고 서신을 기록하였다. 하나님께서 필요한 대로 사람을 적절하게 쓰신 거다.

일본의 아동문학가 노베찌(野邊地)는 “너의 둥지는 너무 낮았었다.”라는 유명한 시를 썼다. 이 시는 어느 날 자기 집 뜰에 있는 나무에 새가 둥지를 틀고 있는 모습을 관찰한 것이 동기가 되어 쓴 시다. 새의 작업을 재미있게 구경하다가 “둥지의 위치가 너무 낮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양이의 습격을 받을 만큼 낮은 위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에게 충고할 방법이 없다. 또 거의 완성된 둥지를 헐 수도 없다. 해서 그냥 내버려 두었다. 얼마 후 이 둥지에서 새끼들이 태어났다. 그리고 어미 새는 어디선가 부지런히 먹이를 구해다가 새끼들을 먹이는 행복을 누린다. 하지만 결국 예감했던 비극이 발생한다. 어미 새가 먹이를 찾아 둥지를 비운 사이, 고양이의 습격으로 새끼들이 처참하게 희생된 것이다. 먹이를 가지고 돌아온 어미 새는 오랫동안 그 둥지에서 슬피 운다. 이 체험이 노베찌 시인으로 하여금 “너의 둥지는 너무 낮았었다”라는 제목의 시를 쓰게 했다.

우리의 인생 둥지는 어떨까? 혹시 노베찌 시인이 봤던 새처럼 인생의 둥지를 너무 낮은 데에 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은 나면서부터 성공적인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 말을 배우고, 글을 깨치고, 유치원 때부터 여러 학원을 다니면서 성공의 기초를 닦는다. 눈코 뜰 새 없이 공부한다. 그래서 대학에 입학하고, 취직하고, 어느 정도 성공을 이루기도 한다. 하지만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그래서 그럭저럭 살아가는 인생이 된다. 아니 자기의 꿈을 이루었다고 해도 그것이 참된 성공이라고 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자기 일신상의 욕망만을 채우는 삶을 성공적인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인생의 목표가 문제다. 둥지가 너무 낮은 것, 이게 잘못된 거다.

돌이켜 보면 나사로의 죽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다. 또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 사울이 바울이 되는 복음의 결실을 거두게 되었다.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을 쓰신다. 결국은 유익하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 후회도 없고 언제나 완전하시다. 요한의 길은 순교가 아니라 장수하며 교회와 성도를 섬기는 일, 요한은 장수하며 “나를 따르라”는 명령에 순종했다.

나에게 주신 말씀

예수님은 요한은 순교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22-23절). 심지어 요한이 예수 재림 때까지 살아 있을지라도 베드로와는 상관이 없다고 하셨다. 베드로는 베드로의 사명에 충실하고 요한은 요한의 사명에 충실하면 된다는 뜻이다. 각각 독립된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 우리도 마찬가지다. 베드로를 향해 하신 “나를 따르라”라는 말씀을 나에게 주신 말씀으로 받으면 레마의 말씀이 될 것이다. 로고스(λόγος)가 원래 말하여진 것(what is spoken), 우리가 읽고 있는 말씀이라면 레마(ῥῆμα)는 무언가에 대해 명확하게 이야기하는 것(to state specifically), 개인적으로 영혼에 충격을 준 말씀, 가슴 속에 깊이 새겨져 생활에 힘이 되는 말씀이다. 로고스는 Happening이나 Fact, 레마는 Interpretation 정도로 생각해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을 요한은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살아 있을 것이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었다. 상당수의 초대 교인들이 그랬다. 초대 교인들이 요한이 죽기 전에 예수께서 재림하실 것이라는 대망으로 살았기에 극심한 핍박과 환난을 감수했다는 것은 긍정적이나 해프닝, 해석을 잘해야 한다. 잘못하면 이단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것, 말씀을 함부로 해석하지 않고, 말씀에 일점일획도 가감하지 않고 오직 말씀만 붙들고 주님을 따르는 거다. 복음서는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24절)라며 갑자기 ‘우리’라는 인칭대명사를 쓴다. 요한공동체일 것이다. 주목할 것은 그들이 요한의 증언을 참된 줄 안다는 것이다. 알아야 한다. 믿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 행하신 모든 일을 낱낱이 다 기록하지는 않았다며, 다 기록하면 이 세상이라도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것이라며 마무리한다. 자신의 복음서가 예수님의 행적이나 말씀을 다 담고 있지 않다는 말씀, 겸손한 마무리가 멋지다. 맞다. 어떤 글이 감히 하나님을 다 담을 수 있겠나? 하나님께만 집중하라. 감정이나 현상에 좌우되지 말고, 마귀 길이나 세상 길이나 남의 길을 따라가지 말고, 어떤 고난과 비난이 있더라도 예수님이 정해주신 바로 그 길, “나를 따르라”며 제시하시는 각자의 그 길을 끝까지 순종하며 걸어가야 한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희우 #기독일보 #기독일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