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음에는 다소 서먹하기까지 했지만 부활 후 세 번째 나타나 친히 굽고 서빙해주신 아침 식사는 한 마디로 감동이었다. 많은 대화가 오갔을 거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변명도 했을 것 같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2부 캠프파이어(campfire)가 이어진 듯하다.
“조반을 먹은 후에”란 문장이 약간 긴장감을 갖게 한다. 꼭 그렇진 않지만 경험상 “밥 먹자”고 하는 분들이 식사 후 무슨 부탁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의 대화도 보통 대화 아니다. 둘만의 해변 데이트였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함께하는 자리였을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우선 요한의 상세한 기록이 그렇고, 부인한 이후 제자들의 의혹을 사던 베드로였기에 친구들 면전에서 여전히 사랑하고 있음을 의도적으로 3번 확인하셨을 것 같다. 베드로의 대답은 “주님이 아십니다”, 이 이야기를 우리의 이야기로 삼아야 한다.
변함없는 사랑의 고백
졸업고사를 앞둔 어느 신학생이 시험 준비가 엄두가 안 나서 공부는 뒤로 미루고 하나님께 기도만 했다. 금식기도도 하고 철야기도도 하고 기도에 집중했다. 드디어 시험을 잘 치를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겨 “믿습니다”하고 시험장에 갔다. 그런데 막상 시험지를 받아 보니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눈앞이 캄캄했다. 그는 결국 백지를 내며 시험지 맨 밑에 이렇게 적었다. “저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다 아십니다”. 교수님께서 지혜롭게 채점하셨다. “하나님은 A+, 너는 F”. 하나님이 아신다.
본문의 호칭이 시선을 끈다. “요한아 아들 시몬”, ‘시몬’은 본명이다. 뜻은 조약돌, 정겨운 이름이라 그렇게 부른 게 아니다. 약점 많던 이름, 연약했던 이름, 문제점이 많던 이름, 원래 그런 사람이었음을 기억하라는 거다. 하지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은 베드로를 복직시키고 싶어서 첫사랑을 기억하라고 이렇게 부르셨다. 세 번이나 부인한 실패자, 비겁한 도망자지만 장렬한 순교자, 거룩한 승리자로 세우시기 위해 본명으로 부르는 분위기를 연출하셨다.
세 번째 만난 이 자리를 공식적인 자리로 여기셨기 때문일 수도 있다. 예수님은 지금 공식적인 파송 명령을 하신다. 마태는 이 명령을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마28:18-20)라고 기록했고, 누가는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행1:8)는 지상명령 형식을 취했지만 요한은 본명을 부르며 매우 인간적인 언어와 형식으로 마지막 명령을 기록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같은 질문을 세 번 반복하신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세 번을 “주께서 아십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의 고백으로 시인한다. 베드로가 세 번 부인했던 일을 염두에 두고 3중 확인을 하신 것, 안 그래도 머뭇거리고, 서먹했는데 3번 부인했던 베드로는 정신이 번쩍 들었을 거다. 사실 그 누구보다도 주님을 가슴으로 뜨겁게 사랑한 베드로 아닌가. 무덤이 비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맨 먼저 달려갔고, 해변가의 주님을 알아봤을 때도 맨 먼저 물로 뛰어들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무덤에 갔을 때 옷자락만 봤다. 두 번의 만남에서는 다른 제자들 가운데 묻혀있었다. 그리고 이번 세 번째 만남에서도 주님인 것을 알고 가장 먼저 바다로 뛰어들었지만 예수님과의 직접 대화는 없었다. 좀 겉돈 느낌이랄까? 애꿎은 물고기만 세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긴 했지만 얼굴을 맞대지는 못하는 분위기였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아신다. 그래서 세 번 반복해서 사랑한다는 대답을 하게 하신다.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한 번씩 대답할 때마다 가슴 속에 박혔던 대못이 하나씩 빠지는 느낌이 들게 하신 것, 마침내 세 개의 못이 다 빠지면서 마음이 좀 편해졌을 것이다.
이런 트라우마가 없어야 한다. 트라우마, 상처다. 상처가 있으면 그 상처가 자꾸 발목을 잡는다. 사역 때 은연중에 나타나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할 수도 있다. 죄 있는 곳에 은혜가 있다고 과거에 좀 놀던 사람들이 은혜가 많다고들 하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그런 사람들은 은혜도 많지만 문제도 많다. 행복하게 사랑받고 자란 사람이 모가 나지 않고 평화로운 사역을 한다. 그런데 누구나 상처가 생길 수 있다. 그렇다고 포기할까? 기억할 것은 상처는 조개의 진주처럼 그 아픔을 견디고 잘 감싸면 보석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상처는 별이 된다”(Scars into Stars)고 한다. 상처받은 치유자가 되면 훌륭한 사역을 할 수 있다.
헨리 나우엔이 쓴 『상처받은 치유자』의 핵심 내용은 치유자가 먼저 상처받은 자가 되어야 한다는 거다. 자신의 경험이 다른 사람의 상처와 아픔을 온전히 이해하게 하기 때문이다. 내 상처를 싸맸던 붕대로 그의 아픔을 감싸주는 것, 베드로도 베드로서를 보면 성도들을 부를 때 다섯 번은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했다(2:11, 4:12, 3:1, 3:8, 3:17), 그리고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8)라고 말한다. 베드로의 상처가 동일한 연약함을 겪는 자들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용서하고 다시 서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랑에는 힘이 있다. 사랑이 사람을 이끈다. 그런데 학자들은 언제부터인가 사랑을 너무 아가페, 에로스, 필레오의 사랑으로 구분하려 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을 때 단어를 헬라어 아가파오(ἀγαπάω)와 필레오(φιλέω)를 번갈아 사용하신 것을 보며 이걸로 의미를 찾으려 한다. 처음 두 번은 “나를 사랑하느냐” ‘아가파스 메’(ἀγαπᾷς με)라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두 번 다 “사랑합니다” ‘필로 세’(φιλῶ σε)라고 대답했고, 세 번째는 ‘필레이스 메’(φιλεῖς με)라고 바꾸어 물으셨지만 베드로는 똑같이 ‘필로 세’라고 대답한다.
이 차이를 발견한 학자들이 상상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아가페는 하나님의 사랑(변함없고, 무조건적, 헌신적, 이타적 사랑)이고, 필레오는 인간적인 사랑, 우정(변하고 조건적 정도, 수평적, 쌍방간 give & take의 사랑)인데 예수님이 고차원의 아가페의 사랑을 요구하셨지만 베드로는 차마 그 수준의 사랑을 할 수 없어 필레오로 대답해서 예수님이 할 수 없이 수준을 낮추어 필레오로 물었고 베드로는 이에 맞추어 필레오로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의미를 뒤집는 다른 해석도 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나를 향해 차가운 사랑을 가졌는가?” 물으셨지만 베드로는 그 이상의 사랑, “따사로운 사랑입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거다.
신학적으로 인간적 사랑과 신적 사랑으로 구분한 것인데 과연 예수님과 베드로가 그렇게까지 구분하며 대화했을까? 섬세한 요한도 그렇게 구분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3:19)고 할 때 ‘아가파오’를 사용하고,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심이라”(16:27)라고 할 때는 ‘필레오’를 사용한다. 뒤바꾼 거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것이지 단어의 차이가 아니다. 좋아한다, 사랑한다는 말 정도의 차이인데 예수님과 베드로가 굳이 사랑의 성격을 따져가며 대화했을까? 아닌 것 같다.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그대로 받아들이며 “주님 그렇습니다.” “주님이 아십니다” 그는 계속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같은 대답을 드린 거다. 주경학자 레온 모리스도 피차 동질의 사랑을 말한 것으로 여겼다.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신 것도 마찬가지다. 그때도 각각 다른 단어를 사용한다. 아르니온(ἀρνίον, 젖먹이 양), 프로바톤(πρόβατον, 어른 양), 프로바티온(προβατίων 청소년 양)인데, 어린양, 양, 작은 양으로 번갈아 가며 썼다. 그러면 양을 치되 어린양부터 나이든 양까지 가리지 말고 치라는 뜻일까? 그랬다면 목자에 대한 모욕이다. 정상적인 목자는 양을 가리지 않는다. 맡겨진 양을 다 사랑하지 병든 양, 연약한 양을 구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양들을 더 신경 쓴다. 그러니 단어 차이에 너무 민감하지 말고 문맥으로 의미를 찾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 직분이 아니다. 능력이 아니다. 사랑은 기독교 봉사의 기본 자격이다. 다른 자질이 아무리 뛰어나도 사랑이 없으면 의미 없다. 사랑은 사역의 목적이기도 하다. 목적이 다르면 잡음이 생긴다. 괜히 남들과 비교하며 상처를 주고받는다. 사도 바울이 끝까지 사명의 길을 달려갈 수 있었던 것은 푯대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푯대는 그리스도, 우리도 그래야 한다. 오직 변함없는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야 한다.
복직하게 한 고백
베드로는 자기의 사랑을 주님이 아신다고 했다(15절). 성경 속의 사랑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하나님 사랑이 이웃 사랑으로 이어져야 한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내 양을 치라”는 목양 명령이 주어졌다.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선교 명령이 아니다. 물론 자기 양을 찾는 선교 명령은 기본이고, 주님은 이것을 넘어서 영적인 돌봄과 케어를 요구하신다. 이 사명을 감당하라는 것이 이 위임에서 중요한 핵심이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서 이 세상에 오셔서 양을 풍성하게 먹이셨고 그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셨다. 이제는 제자들에게 이 사명을 맡기신다. 영어에서는 목사를 pastor라 한다. 목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건 목회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명령이 아니다. 누구나 어릴 때는 양육 받아야 하지만 성장한 후에는 양육을 해야 한다. 만약 성장 후에도 양육 받기만 바란다면 그건 어린아이다. 늘 얻어먹으려고만 하면 안 되고, 늘 징징거리기만 해도 안 된다. 어른은 주는 사람, 더군다나 리더라면 사람을 세우고, 베풀고, 희생해야 한다. 나이가 되고 위치가 되면 그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사람을 살리고 성장시키고 리더로 세우는 것, 이게 바로 교회의 리더십이다.
나라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가 G8 정도라면 국제사회에서 당당해야 하고, 국민 수준도 달라져야 한다. 좀생이 국가되면 되겠나? 그런데 나라가 왜 이토록 분열하고 갈등하나? 욕심 때문 아닌가? 욕심은 끝이 없다. 이제는 베풀며 먹이며 이끄는 일을 해야 한다. 우리 성도로 인해 세상이 변화되어야 하는데 우린 너무 미약하다. 그렇다면 우리도 복직이 필요하면 복직하고 재무장이 필요하면 재무장해야 한다. 내가 제자로 삼아 성장시킨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게 “내 양을 먹이라”고 복직시켜 주시는 주님의 기대일 것이다.
사역의 행복을 누리게 한 고백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18절), 주님 말씀은 이제는 자기 기분대로, 욕심대로 살 수 없다는 말씀이다.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가고 싶은 곳 마음대로 다닐 수 있었다는 거다. 하지만 이제는 안 된다는 것, 다른 사람이 내 허리에 띠를 묶고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다는 거다. 이게 사역이다.
어느 해 추석 때엔 가족들이 모이는 강원도까지 막히고 막혀 온갖 고생을 다하고 막 도착했는데 장례가 났다는 연락이 와 바로 돌아섰다. 이런 일이 여러 번 있었다. 이게 사역이고, 사명이며, 운명이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목사 안수식 때 축사가 아니라 조사를 해야 한다고 한다. 그 순간부터 완전히 매이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코로나 시기에 ‘내가 매일 기쁘게’를 시작할 때 이웃의 S감리교회 L목사께서 “그거 완전히 매이는 건데 그 피곤한 걸 어떻게 하세요?” 그러며 자기는 절대 못하겠다고 했던 것이 기억난다. 실제로 큰 부담이다. 그런데 주님이 원하셨다. 또 상황이 그걸 원했다. 그리고 부담보다 행복이 더 컸다. 사실 포기하면 편하다. 포기해도 누가 뭐라 하지 않는다. 그 황금 같은 시간에 글을 쓰고 책을 읽을 수도 있고, 아침 산책을 통해 노무라 마사키가 쓴 『내 하루의 도둑맞은 58분』에 나오는 ‘선 라이즈 파워’, 뇌 활성화에 효과가 있다는 아침 햇빛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런데 도화동에 있는 큰 H감리교회 권사께서 자기들 카페에 날마다 좀 올려달라고 부탁해 잘 올리다가 우리 부사역자가 깜박하고 두 달 동안 올리지 않았더니 조심스럽게 “죄송하지만 다시 좀 올려주실 수 없냐”고 연락이 왔다. 극동방송 PD들도 일주일에 한 번씩 성경 봉독을 녹음해서 동참했는데 부탁하면 “영광”이라며 기꺼이 보내주었다. 그저 황금같은 시간을 빼앗긴 게 아니다. 이게 사역의 행복이고, 일종의 하이브리드 사역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목양 명령 중 주목해야 할 또 다른 단어가 있다. ‘내 어린 양’ ‘내 양’ ‘내 양’, 주님은 같은 소유격을 연속 쓰셨다. 모든 양의 소유가 주님이시라는 거다. 기억하라. 우리에게 맡기신 모든 일도 다 주님의 일이다. 주님의 사랑 대상인 ‘내 양’, 충성스럽게 케어해야 한다. 그리고 욕심내면 안 된다. 과거 CCC 때 “내 순원‘이라는 표현 때문에 다툰 적이 있었는데 목장 식구들도 마찬가지다. ’내 목원‘ ’우리 식구‘가 아니라 주님의 양이다. 많은 공을 들였어도 내 것이 아니다. 자랑하거나 욕심내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내가 책임질 일도 아니다. 책임은 소유주 책임, 소유주는 주님이시다. 우리는 단지 청지기,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된다. 성공적인 전도도, 성공적인 양육도 결과는 주님께 맡기는 거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베드로의 이 고백에 예수님은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다. 요한의 아들 조약돌 시몬, 그 시몬이 반석 베드로 되게 하신 것, 사역의 행복을 되찾은 거다. 어려서부터 학습부진아였던 앨버트 아인슈타인이 20세기 최고의 과학자가 되고, 3중고를 안고 태어났던 헬렌 켈러가 역사의 위인이 되고, 5척 단구의 연약한 여인 마더 테레사가 자신의 능력을 능가하는 성녀가 되었던 것처럼 문제점과 약점투성이였던 시몬 베드로, 조약돌이 반석이 되어 사역하는 행복을 누리게 되었다.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변함없는 믿음으로 “주님이 아십니다” 고백하며 우리도 행복한 사역자가 되어야 한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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