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우 목사
이희우 목사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졌더니 대박, 큰 물고기가 153 마리나 잡혔다. 축복이다. 그것도 11절에 보면 ‘큰 물고기’, ‘메가’라는 단어를 쓴 것을 보면 정말 큰 고기였다. 또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고 했는데 누가복음 5장의 처음 제자들을 부를 때 그물이 찢어진 것과 다르다.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축복이다. 박윤선 박사는 그물이 찢어지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서 교회에 속한 자들을 보호하심을 상징한다”고 했다. 요한은 여기서 하나님의 축복을 강조하고 싶다.

그리고 200마리까지는 안 되지만 100마리는 훨씬 넘는다고 하지 않고 한 마리 한 마리 세어서 153마리라고 한 것, 이것도 기적이고 축복이다. 지금까지 과학적으로 기록하지 않던 요한이 숫자를 구체적으로 밝히며 갑자기 현대 과학의 시각으로 기록한 것은 기적의 역사성을 강조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지 부활하신 주님과 만나는 게 더 급할 것 같은 베드로가 고기를 세었다고 했다. Blessing 153, 제자들의 신앙을 회복시킨 촉진제가 된 무척 인상적인 숫자였다.

153, 하나님의 축복

153은 모나미 볼펜에 쓰인 숫자여서 기성세대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숫자다. 동남아나 아프리카 같은 곳에 갈 때 선물하기 참 좋은 제품이기도 하다. 싸기도 하지만 ‘모나미 153’이라고 이름을 붙인 경위가 감동적이라 자연스럽게 복음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63년 모나미를 출시할 때 도산 위기에 처한 회사가 사활을 걸고 출시하는데, 송삼석 사장은 제품의 이름을 정하려고 직원들과 아이디어 회의를 했다. 모나미가 프랑스어로 ‘나의 친구’라는 뜻인데 이미 모나미라는 기존 제품이 있었기 때문에 모나미 다음에 뭔가를 추가하기 위한 회의였다. 「모나미 1963」이란 이름도 나오고, 출시일이 맞춘 「모나미 501」도 나왔는데 직원 하나가 「모나미 153」이 어떠냐고 제안했다. 각 숫자를 더하면 한국사람들이 좋아하는 ‘갑오’, 끗발이 좋지 않냐고 하자 직원들은 무슨 화투 이야기를 하냐며 핀잔을 주었지만 사장 송 장로는 153을 되뇌이며 급히 자기 방으로 가서 성경을 뒤적이다가 요한복음 21장 11절 말씀을 찾았다. 거기 제자들이 말씀에 순종함으로 잡은 물고기의 수가 153마리, 이거다 싶었다.

송 사장은 153을 계시처럼 생각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름을 허락받겠다고 기도원에 올라가 기도하는데 사업이 바쁘다는 핑계로 신앙생활에 소홀히 했던 것부터 회개하고 앞으로는 회사 운영을 상도는 지키되 오직 하나님 말씀대로 하겠다고 굳게 결단했다. 또 구체적으로 “반드시 주일성수 하리라” “반드시 십일조 하리라” 서원했다. 그리고 목표를 50억 자루 판매로 세우고, 하나에 15원, 3은 모나미가 만든 3번째 제품이란 뜻으로 153으로 정했다. 이게 바로 국민 볼펜 모나미 153의 탄생 스토리이다. 기도한 대로 복받아 50억 자루 목표는 달성한 지 오래됐다.

153은 축복의 숫자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상호에 153을 넣는다. 153 한방삼계탕, 153 패션, 153 헤어샾, 153 수산, 연어로만 153, 153 매트, 153 막창, 책 제목도 153 교회, 153 감사노트, 153 행정학…

153에 대한 해석도 다양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시릴(Cyril)은 100은 이방인을, 50은 유대인을, 그리고 3은 하나님을 의미한다고 했고, 교부 오리겐(Origen)은 예수님 당시 백과사전에 물고기 종류가 153종이었다며, 153을 만민이 교회에 들어올 것을 상징하는 예언으로 해석하는 등 꽤 해석자가 많지만 템플(Temple)은 “이 숫자에서 숨은 뜻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잡은 고기를 세어보니 그냥 153마리였을 뿐”이라 했다.

하지만 21장에서 사도 요한이 153이란 숫자를 굳이 밝힌 것을 보면 153이 요한공동체를 하나로 결속시키는 숫자, 공동체를 상징하는 숫자였을 가능성은 있다. 성경에 보면 153을 수식하는 표현이 세 번은 나온다.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6절), “가득히 찬 큰 물고기”(11절) 그리고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11절), 그만큼 축복이 풍성했다는 거다. 이스라엘에서는 상징처럼 사용되는 숫자들이 있다. 12, 40, 60 같은 숫자다. 12는 열두 지파, 40은 한 세대, 그리고 광야 40년, 그래서 사울, 다윗,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왕의 재위 기간도 상투적으로 40년이다. 그리고 60은 출애굽 인구 60만 명이다.

맞다. 숫자는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153을 단순히 신앙고백적 차원으로 이해하면 좋겠다. 요한 공동체의 하나된 연대의식의 표현이었어도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생생한 신앙고백으로 보면 된다. 나다나엘에게 ‘무화과나무 아래’가 자신의 소중한 것을 담고 있는 신비한 지성소였듯이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153이 그런 숫자였다. 자기들만 아는 축복, 이 153이 그들을 결속시켰다. 성경적 축복이 임하기를 소원하는 간절한 기대가 담긴 숫자, 우리에게도 이런 축복, 풍성했던 그물처럼 하나님의 축복이 넘치면 좋겠다.

부활을 입증하는 축복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 앞에 세 번째 나타나셨다. 막달라 마리아가 몰라보고,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몰라보고,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던 주님이 아니다. 이제는 안다. “누구세요?” 그러는 제자가 없다. 그런데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1절의 ‘나타나셨다’를 “요한의 유별난 언어”라 했다. 요한이 예수님을 이 세계를 초월하여 실재하심을 강조했다는 거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과거 디베랴에서 고기 잡던 제자들을 바로 그 바닷가에서 만나셨다. 제자들이 여기서부터 당신을 따라나서서 3년을 함께 지냈다. 당신의 기대와 달리 제자들은 언젠가 당신이 새로운 왕국을 건설할 것이라는 꿈을 꾸며 따라나선 것을 아신다. 갈릴리 어부 출신들이 스승이 유대의 새 왕이 된다는 꿈을 꾸며 흥분한 것을 왜 모르시겠나? 그리고 이제 그 꿈이 산산조각나 할 일을 못 찾고 두려워하고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과 패배감을 느끼며 안절부절못하는 것도 아신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들을 처음 만났던 갈릴리에서 재회하신 거다.

제자들 입장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까지 달려가서 빈 무덤을 확인했고,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문을 잠그고 다락방에 숨어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직접 만나 뵈었다. 그리고 8일 후에 도마를 포함해 모여있을 때 부활하신 주님이 다시 나타나셔서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던 그 인상 깊은 만남은 잊을 수 없다.

하지만 불안감이 여전하다. 그때 갈릴리에서 만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났다. 일곱 명이 갈릴리로 왔다. 그런데 고향에 오니 만감이 교차했던 모양이다. 한동안 피차 말이 없었다. 침묵을 깨고 맏형인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겠다”고 하자 나머지 제자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며 따라나선다. 일사분란하다. 그런데 단합대회 하려고 뭉쳤나? 고기 잡고 친지들 만나고 재충전도 하려고 고향 방문했나? 예루살렘으로부터 무려 96㎞, 240리나 떨어진 갈릴리, 당시 교통수단으로는 먼 거리다. 하지만 예수님의 약속 때문에 온 건데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겠다”는 베드로나 “우리도 함께 가겠다”고 만장일치? 일사분란한 그 모습이 이상하다. 고향 바다 냄새에 취한 건가? 계획된 것도 아니고 목적도 없다. 레온 모리스는 그저 불안하다는 인상을 주는 문장일 뿐이라 했다. 예수님 만나러 갔다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어야 했다. 그런데 기다리지 않고 배를 띄운 것, 그만큼 착찹하다는 거다. 마음이 복잡하다는 거다.

혹자들은 그들이 옛날로 돌아갔다고 혹평하지만 그건 오버다. 너무 단순한 결론이다. 누가 뭐래도 그들이 갈릴리까지 온 것은 부활이후 갈릴리에서 만나리라는 예수님의 약속 때문, 문제는 약속 때문에 오기는 했지만 앞으로에 대한 답이 없다. 막막하다. 십자가 처형 전에 갖고 있던 스승 예수께서 유대 나라의 새 왕이 될 것이라는 기대는 접어야 하고, 부활하신 것은 맞지만 앞으로는 어느 정도의 관계로 지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그래서 어수선하다. 3년 동안 많은 설교를 듣고, 이적의 현장에서 표적을 직접 보기도 하고, 오늘날의 몇 년간의 신학 과정과는 비교도 안 되는 인격적인 만남, 체험적인 교육, 제자화의 모든 과정을 다 거쳤지만 십자가는 너무 큰 충격, 그저 헤매고 있다. 물론 인간적으로는 이해된다. 우리였으면 달랐을까? 그런데 안 그래도 서럽고 외로운데 그 고기잡이를 타락이요, 불신앙, 더 나아가 외도라고 혹평하는 것은 남의 일이라고 너무 가혹하게 평가하는 것이 아닐까?

여하튼 고기를 잡기 위해 배를 탔다. 복잡한 마음 때문일까? 고향 갈릴리, 낯익은 바다에 그물을 던졌는데 실패다. 한 마리를 못 잡았다. 마음이 복잡하면 무슨 일이든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그 말대로다. 이상하다. 한 마리도 못 잡았다. 기술 문제일까? 재수가 없었나? 아니다. 돌이켜보면 3년 전 제자로 처음에 부름받을 때도 그랬다. 그때도 밤새 수고하고도 한 마리를 못 잡았다. 신기하다. 새 출발해야 할 지금 이 시점에 그때의 상황이 재연되고 있다.

그런데 아직 어둠이 다 가시지 않은 바닷가에 우뚝 서 있던 한 사람이 소리친다.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없습니다” 헛손질하다 날 샌 사람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반사적으로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졌는데 기적이다. 물고기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다. 너무 많이 잡혔다. 밤샘 헛수고가 축복으로 바뀐다. 순종이 낳은 기적이다. 사실 그 정도면 누군가의 눈에 고기가 보였어야 하지 않나? 그런데 아무도 몰랐다. 제자들도 순종했지만 고기들의 일사분란한 순종이 놀랍다. 제자들 눈에 띄지 않게 매복했다가 제자들이 그물을 던지는 순간 “지금이다” 하고 일순간 그물에 걸린 것,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이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되는 축복이다.

절망과 패배감에 붙잡혀 축 늘어져있던 제자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에 충분한 기적이다. 그렇다. ‘Blessing 153’, 이 기적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입증하는 축복이다. 그 축복이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제자 된 그 자리에 다시 서게 한다. 실패보다 더 무서운 절망감을 떨쳐내게 한다. 예수께서 Blessing 153을 통해 다시 한 번 당신이 부활하셨음을 입증하신 거다.

제자들의 재기(再起)를 위한 축복

큰 물고기 153마리를 잡게 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을 확인한 제자들, 순식간에 만선의 기쁨으로 지난밤 피곤이 다 사라진 것 같은 모습, 노래가 절로 흘러나오고, 덩실덩실 춤을 출 만한 상황이지만 그건 아니다. 복잡한 마음의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다. 피곤이 몰려온다. 치열하게 지냈던 살벌한 예루살렘에서의 피로에 밤샘 그물질로 인한 피로감까지 겹치면서 그들은 완전 번 아웃(burn out), 녹초가 되었다.

그런데 웬 떡? 육지에 신선한 아침 식사가 기다리고 있다. 예수님이 손수 준비하신 너무 인상적인 조찬이다. 제자들의 반응은 기록하지 않았지만 복음서 그 어디에도 없는 리얼한 조찬, 예수님이 직접 숯불 피우고 그 위에 빵도 굽고 생선을 구우신다. 출출한데 냄새가 끝내준다. 예수님은 기적적으로 갓 잡은 싱싱한 생선도 가져오라고 하신다(10). 그러고는 여전히 서먹서먹한 제자들에게 컴 다인(come dine), “와서 조반을 먹으라” 그러신다.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는데 셀프가 아니다. 서비스, 최고다. 누가 좀 도우라고 하시지 않고 주방도 서빙도 직접 다 해주신다. 그렇게 서먹서먹하게 있지 말고 먹으라는 거다.

얼마나 위로가 되었을까? 가난하던 시절 먼 길 떠나는 이들에게 우리 어머니들이 따뜻한 쌀밥을 지어주시던 그 모습이다. 이게 진짜 주의 만찬이다. 주의 만찬에는 따뜻한 밥 한 끼의 정신, 사랑이 담겨 있다. 포도주 대신 물고기, 만찬 제정사도 없지만 형식에 매이지 않는 예수님이 허기진 제자들을 위해 정성껏 준비하신 황홀한 조찬이다. 하나됨의 결속이 밥상공동체로 나타난다고 했던가? 맞다. 같이 밥 먹어야 하나 된다. 그래야 친한 거다. 교회에서 같이 밥 먹는 것이 중요하다. 이게 바로 주의 만찬 정신을 실현하는 것이고, 가정교회를 세워나가는 중요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은 주의 만찬 의식 자체보다 그 의미를 전하려는 의도가 강하다. 그래서 13장의 목요일 최후의 만찬에서도 주의 만찬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형식화되는 주의 만찬은 아니라는 거다. 반면에 요한복음의 주의 만찬은 5천 명이 굶주릴 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베푸신 기적의 현장에서 재연됐다. 그 식사 이후에 하신 말씀이다. 6:54-55,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주의 만찬 제정사 중 하나 아닌가? 가볍게 보지 말라. 이 말씀이 오병이어 기적의 현장에서 하신 말씀이다. 배불리 먹고 즐기는 것, 이게 진정한 주의 만찬의 정신이란 말씀이다.

갈릴리의 조반도 마찬가지다. 따뜻한 빵과 싱싱한 물고기 반찬이 밤샘 노동에 지친 제자들을 위로한다. 고향 바닷에서의 예상치 못한 이 아침 식사, 지난밤의 피로를 잊고 유쾌한 대화와 즐거움으로 즐기기에 충분하지 않나? 물론 이것도 상징이다. 우리를 진짜 배부르게 할 진정한 빵은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예수님, 어떤 숯불구이 빵보다 따뜻하고, 갓 구운 싱싱한 베드로 고기보다 더 신선한 생명으로 가득하다. 먹어도 먹어도 모자람이 없다. Blessing 153, 제자들의 재기를 위한 주님의 축복이다. 그들의 축복이 우리의 축복되어야 한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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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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