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우 목사
이희우 목사

요한복음 21장은 부록, 예수님과 제자들의 갈릴리에서의 재회(Reunion) 장면이다. 장소는 갈릴리 호수, 반지처럼 둥근 형태의 호수라 해서 갈릴리라 불리는데 이게 원래 이름이다. 수금을 닮았다고 게네사렛 호수라 불리기도 하고,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헌정되었다고 디베랴 바다로 불리기도 한다. 이스라엘의 가장 큰 호수이자 가장 아름다운 곳, 연중 따뜻하고, 고기도 많다. 성지 순례 때 유람선을 타고 “아름답다 갈릴리야, 네 이름이 아름답다” 감격하며 찬송을 불렀던 곳, 이 호수는 현대 이스라엘의 주요 식수원이기도 하고, 여기 물을 스프링클러를 작동해 광야를 옥토로 만들기도 한다.

등장인물은 베드로를 비롯한 일곱 명의 제자들, 그런데 주인공 예수님은 나중에 등장하신다. 멀리서 보기에는 분위기가 너무 좋다. 마치 한 편의 풍경화를 보는 것 같고, 한 편의 서정시를 읽는 것 같다, 시골 내음과 인간의 내음이 물씬 풍기는 분위기가 압권이다. 상상해 보라.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고기잡이하고,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잡고, 예수님이 직접 구워주신 생선 숯불구이에 떡으로 조반을 먹는다. 얼마나 낭만적인가?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좀 복잡하다. 예루살렘에 있던 일곱 제자들이 갈릴리로 간 것은 흔히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사명을 버리고 갔거나 옛 생활로 되돌아간 것은 아니다.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마26:32), 제자들로부터 버림당할 것을 예고하실 때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다. 그리고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마28:7), 부활하시던 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에게 천사가 전하라며 했던 말이다.

갈릴리가 어떤 곳인가? 대다수 제자들의 고향이자 처음 주님으로부터 부름받았던 곳, 그리고 주님과 동고동락하며 사역하던 많은 추억이 서려 있는 현장, 그렇다면 갈릴리에서의 재회(Reunion)는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했던 아름다운 시간들을 기억하고, ‘나를 따르라’는 음성을 듣고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던 처음 사랑을 회복하기에 딱 좋은 곳이다. 그래서 이날 만남 이후 그들과 함께 재출발(Re-start)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다고 생각하신 듯하다.

결국 제자들은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갈릴리로 갔고, 거기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세 번째 만남을 갖게 된다. 이제 그날, 그 갈릴리 현장으로 가 본다.

마음이 복잡한 제자들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2절)

시몬 베드로와 함께 한 제자들의 이름이다. 그렇다면 도마, 나다나엘,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분명하고 거기에 다른 제자 두 명이 더 함께한 것이다. 이렇게 이름을 명기한 것은 늘 그랬듯이 요한의 사건의 정확성을 드러내려는 의도 때문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두 번 만났던 제자들, 그들이 왜 주님과 함께 있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다. 뵐 면목이 없어서였을까? 분명한 건 지금 마음이 복잡하다는 것이다. 십자가를 겪은 충격과 버리고 도망쳤던 죄송함에 부활의 감격을 경험한 기쁨이 뒤섞여 있다. 예수님을 두 번 만나면서 부활이 엄연한 현실임을 확인한 것, 그래서 정신을 바짝 차리려고는 하나 상황이 전과 다르다. 지금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함께한다는 것은 위험을 초래하는 일일 수도 있고, 예수님과 언제까지 만날 수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약속을 기억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나기 위해 갈릴리로 오기까지는 했다. 하지만 왜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셨는지도 모른다. 그저 주님 떠나 있는 마음이 불안하고 복잡하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줄곧 함께한 동지들,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마28:10)는 명령에 따라 주님을 만나기 위해 갈릴리까지 와서 함께 기다린다. 아마 체험한 신비한 경험, 곧 주님의 부활 사건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생각할수록 놀랍고 신비한 일, 하지만 먼저 갈릴리로 오신다고 하신 예수님은 저녁때까지도 뵙지 못했다. 자기들끼리 뭘 해야 할지도 모른다. 초조하다. 불안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고향 냄새를 느낄 여유도 없었는데 호수의 물소리와 내음이 유혹한다. 성질 급한 베드로가 참다못해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겠다”고 나서자 나머지 제자들도 따라간다. 만장일치의 호응이다. 주경학자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제자들이 고기 잡으려고 바다에 나간 것은 그들의 불안을 잘 말해준다”며 이걸 ‘불확실성의 불안’이라 했다. 불확실한 미래, 그리고 서글픈 현실, 그들은 지금 방황하고 있다.

베드로의 한 마디에 다른 제자들이 함께 움직인 것을 보며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가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 누군가가 나를 보며 따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끼친 영향력은 결국 우리의 책임으로 돌아올 수 있다. 사랑하는 성도여! 만일 당신이 갈릴리 해변의 제자들처럼 마음이 복잡하다면, 이제 곧 체험하게 될 주님의 위로와 능력을 기대하라. 주님을 만나면 분명 평안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아무것도 잡지 못한 제자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날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3절)

제자들이 밤에 배에 오른 것은 밤이 고기가 가장 많이 잡히는 시간이기 때문이었다. 낮에는 기후가 더워 호수 상층부의 물이 뜨거워지기 때문에 고기들이 시원한 물 밑의 깊은 곳으로 내려가고, 서늘한 밤이 되면 수면 가까이로 올라오는 것을 갈릴리 어부 출신, 고기잡이 베테랑이었던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모를 리 없다.

하지만 밤새 그물질을 하고도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는다. 고기가 많이 잡히는 밤시간에 베테랑 어부들이 빈손이란 건 예삿일이 아니다. 아무리 3년을 쉬었어도 창조주이자 통치자이신 예수님의 특별 개입이 아니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15:5), 당신과 함께 있을 때만 열매를 맺고 당신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된 것, 이건 고기잡이에 익숙한 제자들에게 현장 학습을 시키신 거다.

평생 고기 잡는 일만을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누구보다도 익숙한 갈릴리 바다에서 이제까지 쌓아온 경험과 기술이 통하지 않았다는 사실, 아마 상당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3년 전 처음 부름받을 때 겪었던 경험과 너무 비슷하다. 15:5의 말씀이 절로 생각난다. 이제는 고기 잡는 일마저도 주님의 도움이 없이는 할 수 없다는 사실, 그렇다. 예수 없는 인생의 수고는 결국 헛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절감한다. 밤샘 수고, 그러나 빈손! 제자들을 위한 교훈이자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다.

인생을 달음질이라고 한다면 예수 없는 달음질의 끝은 절망과 허무뿐이라는 거다. 그날 밤 제자들의 빈손은 그들의 삶이 열매 없는 삶이고, 마음이 공허하다는 거다. 예수 없는 항해의 종착지가 영원한 절망의 심연이라는 것을 입증한 셈이다. 그렇다. 예수께 생명 있고, 예수께 구원 있고, 예수께 소망 있다. 성경은 말한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있음이 헛되도다”(시127:1).

열매 맺는 생활의 비결이 주님 안에 거하는 것, 주님과의 연합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포도나무 가지가 열매를 많이 맺기 위해서는 깨끗케 하심을 받아야 하고(15:2), 포도나무 안에 거해야 하고(15:5), 사랑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15:10).

성도는 예수님의 피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씻은 존재, 깨끗함을 받았지만 날마다 손발에 묻히는 죄는 자백함으로 씻어내야 한다(요일1:9). 주님과 함께하는 삶, 고백하지 않은 죄가 없어야 하고, 주님 허락 없이 하는 일이 없어야 하며, 매인 것이 없어야 한다. 말씀 속에 살며, 성령님의 인도를 받고 성령님의 능력으로 살아야 한다는 거다.

혹시 이런 생각해 봤나? 만일 내가 예수님을 떠난다면 주님이 잃으시는 것은 뭘까? 없다. 반면에 내가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면 나는 모든 것을 잃는다. 지금뿐 아니라 영원한 세계의 모든 것을 상실하게 되는 ‘잃어버린 자(the lost one)’가 되고 만다. 100-1=0, 100+1=∞, 주님이 물으신다. “너희도 가려느냐?”, 너무도 중요한 질문이다. 대답 잘해야 한다. “주님, 영생의 말씀이 주님께 있는데, 제가 주님을 떠나 어디로 가겠습니까? 저를 언제나 주님 곁에 있게 하시고, 주님을 충성스럽게 섬기게 하소서.” 이게 우리의 대답이어야 한다.

기적을 체험하는 제자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6절)

초조함에 실의까지 더해진 제자들을 찾아오신 예수님, 예수님이 제자들의 삶에 복된 아침을 몰고 오셨다. 하지만 그들은 해변가에 서 있는 분이 예수님이신 것을 알아보지 못한다. 지칠 대로 지쳤고, 아직 어두움이 완전히 물러가지 않은 상태인데다(4절), 해변까지 90미터 정도의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8절). 어쩌면 무엇보다 영안이 흐려진 상태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데 주님이 부르신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5절), 여기서 ‘애들아’는 애정이 담긴 호칭, 부모가 자녀에게 사용하는 호칭이다. 주님은 제자들의 필요를 아시고 3년 전처럼 명령하신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아직 누군지 모르지만 허튼소리 같지 않다. 3년 전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시던 주님의 말씀이 기억났을까? 아니면 어부의 단순함이란 특성 때문일까?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오른편, 왼편이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말씀,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졌다는 거다. 순식간에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엄청난 결과를 얻는다. 반전이다. 이게 믿음이다. 믿음은 무모한 짓일지라도 자기 안에 부딪혀 오는 말씀에 반응하는 거다. 밤샘 헛수고가 풍성함으로 바뀌었다. 말씀이 기적을 가져온 것, 주님의 임재가 주는 축복이다.

배는 여전히 그들이 밤샘 헛수고를 한 그 호수 가운데 있었고, 그물도 같은 그물이었으며, 그물을 던지는 사람 역시 같은 사람들이지만 달라진 게 있다. 주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이 있기 전에는 경험과 상식에 의존하여 그물을 던졌지만 지금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던졌다. 말씀이 바로 실패를 성공으로 바꾼 거다. 기억하나?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4:12).

찬송가 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의 작가인 존 뉴턴(John Newton)은 예수 믿기 전에는 구제 불능의 젊은이였다. 흑인들을 잡아 팔아먹는 노예 상인으로 악명 높은 사람, 요즘 말로 인신매매범이다. 그러나 말씀이 뉴턴의 마음을 사로잡자 완전 딴사람이 되었다. 회개하고 사랑과 눈물의 설교자로 바뀐다. 외모가 달라진 게 아니다. 삶과 가치관이 달라진 것, 말씀 덕분이다. 자기 원하는 대로 살던 삶이 주님의 말씀이 이끄는 삶으로 바뀐 거다. 성경은 말한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1:8).

“다시 갈릴리에서,”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갈릴리에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졌고, 순식간에 ‘그물을 들 수 없을 만큼’ 많은 물고기를 잡았다. 말씀이 기적을 가져온 거다. 만선, 153마리나 잡혔다. 153은 앞으로 교회가 세계 선교를 통해 얻게 될 구원받을 자의 충만한 수를 상징한다. 3년 전처럼 다시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제자들의 모습을 보라.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내리더라”(7절).

마음이 복잡한가? 밤새 헛고생한 제자들처럼 열심히 사는데도 열매 없는 삶 때문에 마음이 불안하고 공허한가? 바닷가에 서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제일 먼저 알아차렸던 요한처럼, 예수님이 주님 되심부터 확인하라. 그리고 주님의 심방을 기대하라. 파도처럼 출렁이는 마음으로 예수님께로 달려가라. 또 겉옷 입고 바다로 뛰어내리던 베드로처럼 말씀 앞에 자신을 내려놓으라. 갈매기처럼 춤추는 마음으로.

바닷가에서 숯불과 생선과 떡을 준비해놓고 기다리시던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당신의 잔치 자리에 초대하고 기다리신다. 춥고 배고프던 제자들이 부둣가로 올라와 해변에서 갖는 주님과의 아침 식사, 최고의 파티였다. 우리의 예배가 주님이 기다리시는 잔치가 되면 어떨까? 참여가 축복 아닌가? 그날 해변의 축제와 우리가 주님과 함게하는 잔치는 장차 어느 날 더 아름답고 더 영광스러운 어린양의 혼인 잔치로 재현될 것이다. 잔치 참여의 기쁨으로 충만하기 바란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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