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은 십자가에 처형된 자

김영한 박사
김영한 박사

로마 시대에 십자가형은 사회의 안전을 깨뜨리는 위험한 범죄자들과 사회적 지위가 가장 낮은 천민계층에게 실시되었다. 이들은 사회를 구성하는 법 테두리 밖에 있는 자들이거나 인간으로서 권리를 박탈당한 노예들이었다. 이들은 당시 로마가 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온갖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억압해야 하였던 집단들이었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라는 슬로건 이면에는 로마 체제에 저항하는 자들을 응징하는 잔혹한 형벌과 이를 실시하는 엄청난 군사력이 있었다. 이렇게 체제에 대한 반란자를 잔인하게 응징하는 결과로 로마는 사회적인 안정과 법적인 평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일반 군중들은 예수와 같이 십자가에 달린 자들이란 의당히 사회적으로 윤리적인 면에서 반국가적 내지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하였다. 십자가 처형자들은 사회적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예수께서 판결받은 십자가형이란 그 당시에 가장 수치스러운 형벌, “최고의 형벌”(summum supplicium)이었다.

V. 십자가의 어리석음

희랍인들과 로마인들에게 실재하는 신들은 영원히 죽지 않은 존재들로 간주되었다. 이들에게 신들은 영원한 존재로서 이 세상과는 초월해 있는 존재들이었고 다신론적이었다. 희랍 로마인들이 표상한 신들은 철학적 명상 속에서 사변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러므로 이들의 신 표상으로는 유일하신 하나님의 독생자가 갈릴리의 무명(無名) 유대인 가정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들의 신 표상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다가오는 신들을 의미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골고다의 십자가의 처형 속에 이 세상의 구세주로서 자신을 드러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 세상의 지혜로 신표상(神表象)하는 자들에게는 전혀 이해될 수 없는 미련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희랍인들이나 로마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은 죽을 수 없고, 가장 잔인한 처형 방식으로 죽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사렛 시골 동네 출신인 예수는 자신을 메시아라고 하여 정치적 선동자로 몰려 십자가에서 처형당했다. 이러한 십자가에 달린 자를 메시아로 믿는다는 사실은 이들에게 “어리석음”(moria) 내지 “미친 짓“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바울이 언급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고전 1:18)라는 말은 십자가 처형에 대한 당시(當時)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식을 표명하고 있다. 십자가의 복음은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고전 1:23)으로 간주되었다. 희랍 청중들은 바울이 전하는 십자가의 말씀을 인정할 수 없었다. 십자가라는 단어에는 잔혹한 수치와 멸시와 미련함과 무시(無視)가 동반되었기 때문이었다.

VI. 유대인들에게 인식된 십자가 처형

더욱이 로마인들이 팔레스타인에 세운 십자가를 자주 볼 수 있었던 유대인들은 제자들이 증거한 십자가의 말씀을 더욱 인정할 수 없었다. 유대인들에게는 나무에 달린 자들마다 저주받은 자(신 21:23)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고대 세계의 종교적 이상과 비교하여 볼 때 기독교의 십자가 메시지는 로마시대 역사가 수에토니우스(Suetonius)의 용어인 “해로운, 새로운 미신”(superstitio nova et malefica)으로서 서술될 수밖에 없다.

유대인들은 다윗의 왕권을 가지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오는 인자인 메시아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이런 의미에서 영광의 신학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영광의 신학을 추구하는 유대인의 관점에서는 메시아는 다윗 왕권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방인의 압제에서 해방시키는 승리의 왕이지 십자가에 달려서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영광의 신학 관점에서 십자가란 걸림돌(σκάδαλον, a stumbling block, 고전 1:23)이 되었다.

십자가 신학이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처형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었다. 십자가는 수치스러움의 상징(히 12:2)이었다. 그러므로 그 시대 유대인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 들일 수 없었다. 당시 수치의 상징인 예수의 십자가를 하나님 구원의 능력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오로지 성령으로 감동받은 자들만에게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는 십자가라는 수치와 걸림돌( skandalon)이라는 장애를 걷어내고 나사렛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을 발견한, 마음이 가난하고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만이 기독교인이 되었다. (계속)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설립원장,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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