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우 목사
이희우 목사

요한복음의 수난사는 좀 특이하다. 십자가 위에서 하셨던 말씀, 가상발언도 마찬가지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 피맺힌 절규도 없고, 공관복음서에서 전혀 언급하지 않은 ‘다 이루었다’(30절)는 말씀을 전한다. 역사학자들과 성경학자들은 이 다른 언급에 다소 당황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요한의 이런 증거가 신선하다는 생각이다. 요한이 볼 때 예수님은 버림받고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 속에서 처참하게 죽으신 게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든 각자의 관점이 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증거하는 데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만일 요한복음마저 공관복음과 똑같은 관점에서 똑같은 내용으로 기록해 놓았다면 오히려 예수님을 교조적 인물 만들었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다양한 방향에서 바라본 입체적 예수님이 훨씬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요한이 그 기대를 충족시켜준다.

남다른 관점의 사람 요한, 예상보다 예수님의 십자가 장면을 간략하게 다뤘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 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나니”(17-18절), 이걸로 끝이다. 간단해도 너무 간단한 것, 힘들고 고통스러운 묘사가 없다. 성지를 순례하는 순례자들이 은혜 많이 받는 곳 중 하나인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슬픔의 길, 고난의 길, 고통의 길), ‘십자가의 길’(Via Crucis)이라고도 하는데 그 길의 14처 같은 것은 요한복음으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요한은 의도적으로 고난의 길을 단축시켰다.

우리에게도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요한복음서를 보면 요한에게 고난주간은 그저 슬프고 고통스러운 시간만이 아니다. 그는 십자가를 영광으로 본다. 본 훼퍼(Dietrich Bonhoeffer)가 “십자가 없는 은혜는 값싼 은혜”라고 했는데 요한은 값싼 은혜를 말하는 게 아니다. 아니 누구보다 값싼 은혜를 싫어한다. 오히려 20세기의 유명한 신학자 에밀 부르너(E. Brunner)가 십자가를 “기독교 신앙의 상징이고, 교회의 상징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의 상징”이라 한 것과 맥락이 같다. 요한복음에서 십자가는 영광이다. “요한복음 안에 기록된 가상 3언”을 중심으로 은혜를 나눈다.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가상 3언)

아침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셔서 오후 3시에 죽으신 예수님, 6시간 동안 일곱 마디 말씀을 하셨다. 정리해 보면 제 1언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라는 용서의 말씀, 제 2언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는 구원의 말씀, 제 3언은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19:26-27)는 사랑의 말씀, 제 4언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27:46; 막15:34,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고뇌의 말씀, 제 5언은 “내가 목마르다”(요19:28)는 고난의 말씀, 제 6언은 “다 이루었다”(요19:30)라는 승리의 말씀, 제 7언은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라는 만족의 말씀이다.

요한은 가상 7언 중 3언을 소개했다. 그 중 첫 번째가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라는 가상 제 3언, 어머니 마리아를 향해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시고, 요한을 향해 “보라 네 어머니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요한만 전하는 매우 독특한 말씀인데 예수님은 요한을 아들이라 하셨다. 이제부터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실 아들 요한, 낳아주고 길러주신 마리아에 대한 세심한 사랑이다.

단순한 마지막 효심일까? 마리아의 생계 걱정보다 더 크게 봐야 한다는 주장이 있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을 계기로 전설에 의하면 요한은 투르키예 에베소 근처에서 평생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산다. 전설이기는 하지만 에베소에서 5km 떨어진 파나야 카풀루(Parnaya Kapulu)라는 곳인데 이곳 성모 마리아의 집은 성지화되었다. 가톨릭은 여기서 더 나아가 마리아의 동정녀 설을 끝까지 밀고 가기 위해 마리아는 예수님 외에 출산한 적이 없다는 증거로 이 말씀을 든다. 야고보나 요셉이나 유다는 예수의 친형제가 아니라 사촌 형제들이라 마리아를 요한에게 맡겼다는 거다. 성경이 아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동생들보다 요한이 모시는 게 더 안전했을 가능성은 크다고 여겨진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단순히 효도의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 십자가상에서 육신의 부모를 챙기셨다는 것은 요한복음의 전체 맥락상 맞지 않는다는 주장은 일리가 있다. 마가복음 3:35마저도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혈육이나 육신의 정보다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일찍부터 다양한 해석이 있었다. 신학자 불트만(Rudolf K. Bultmann)은 “어머니는 유대 기독교를 상징하고 아들은 이방인 기독교를 상징한다”고 하였다. 4세기 교부는 마리아를 교회로 보며 사랑하는 제자에게 교회를 맡기는 장면이라 해석하였다. 요한복음 주석의 대가 레이몬드 브라운(Raymond E. Brown)은 “마리아를 구약의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을 생산하는 이미지로 사용되던 여성 시온의 상징이요, 새 생명을 잉태하는 하와의 상징이자, 요한계시록 12장에서 메시아를 잉태하고 광야로 피신한 여자의 상징이며,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는 그리스도인의 상징”이라고 했다.

이미 요한복음 1장에서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13절)라는 선언이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상 3언을 하심으로 말미암아 십자가 아래에서 새로운 가족이 출범하게 되었다. 십자가, 우리의 진짜 인생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저 예수님의 효심 정도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공동체, 운명공동체가 십자가 아래에서 탄생한 것이다. 이 말씀을 보며 교회라는 확대된 가족 개념을 좀 더 깊이 생각하면 좋겠다.

“내가 목마르다”(가상 5언)

시간이 지나면서 피가 계속 흐른 것, 몸에서 수분이 계속 빠져나가자 극심한 목마름을 느끼셨다. 물론 단순한 육체적 목마름만 의미하는 게 아니다. 당신이 십자가 위에서 겪은 모든 고통을 다 담는 표현, 아더 W. 핑크는 이 말씀을 ‘고난의 말씀’이라 명명했다. 단순한 갈증이 아니라 고난과 고통의 표현이며, 육적 고통과 영적 고통을 다 포함하는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은 바로 앞의 말씀과 연결해서 이해해야 한다.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28절), ‘내가 목마르다’는 말씀이 성경 말씀의 성취였다는 거다. 그 다음 말씀도 마찬가지다.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29절), 신 포도주를 예수의 입에 대어 먹게 하는 장면 역시 시편 69:21절 말씀의 성취다.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 로마 병정이 신 포도주를 준 이유가 예수님 조롱이나 고통을 달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말씀 성취 때문이라는 거다.

십자가 장면에서는 이처럼 “성경을 응하게 하신다”, “때가 이른 줄을 아시고”라는 말씀이 많다. 예수님의 운명이 통제되고 있다는 뜻이다. 거친 파도나 장마 때의 홍수가 무서운 것은 통제되지 않기 때문 아닌가? 통제되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 우리 운명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면 이건 축복이다. 악이 날뛰고 도처에서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고 곳곳에 기근과 자진이 있는 재난이 시작되어도 모든 것은 결국 다 하나님의 계획대로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주님의 이 외침이 상징하는 바가 많다는 거다.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님이 “내가 목마르다” 하신 것을 4장의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7절)고 하셨던 그때 그 일과 연관지어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잘 보면 그때도 예수님은 목이 마르셨다. 하지만 진짜 목마른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사마리아 여인이었다. 그때 예수님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4절), ‘내가 주는 물’을 강조하셨다. 가상 칠언의 “내가 목마르다”도 마찬가지다. 이건 인류 구원이라는 사명을 향한 예수님의 목마름인 동시에 우리의 목마름, 우리 인간의 부르짖음, ‘내가 주는 물’을 외치신 것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이 말씀의 의미도 모르고, 목마름의 원인도 모른다는 거다. 그래서 갈증을 채우기 위해 연신 물을 들이키면서도 목마름에 헤맨다. 그 목마름이 영혼의 목마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내가 목마르다”며 내 영의 탄식을 대신하셨다.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처럼 주님이 주시는 생수를 마시라는 거다. 그래야만 타는 듯한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직후 로마 병정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고, 그때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왔다(34절). 많은 의학 논쟁을 불러온 말씀이다. 기적일까? 심장이 파열될 때 일어난 현상일까? 과학적으로는 모르더라도 말씀의 의미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말씀을 묵상하며 이건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생수가 터져 나온 것으로 이해가 되었다. 7장에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7:38), 그렇다며 말씀하신 그대로 아닌가? 그렇다면 이 부분도 말씀이 실현된 것이다.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물은 마치 에스겔서 47장의 성전에서 흘러나오던 시냇물의 환상 같다. 예수님의 몸이 성전이다. 성전이신 예수님의 허리에서 물이 조금씩 흘러나온다. 그 물이 발목 정도 차더니, 무릎까지 찬다. 그리고 허리까지 차더니 거대한 시내가 되어 헤엄치기도 어려운 강물이 된다. 이 강물이 흘러 죽은 사해 바다가 살아난다. 이 물이 흐르는 곳마다 물고기가 번성하고, 어장이 서고, 각종 과실나무가 풍성하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교회의 역사다. 소수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를 덮었다. 예수님의 물을 먹은 자마다 살아나고 그들이 생수의 전달자가 되어 세상을 살린다. 주님의 갈증을 시원하게 해드려야 한다.

“다 이루었다”(가상 7언)

사람은 태어날 때의 차이와 죽을 때의 차이 중 어떤 차이가 더 중요할까? 둘 다 중요하지만 죽을 때의 차이가 더 결정적이다. 최후에 웃는 자가 진짜 승리자이기 때문이다. 죽을 때 되면 다 똑같다고 하는데 제발 비신앙인처럼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 본문의 예수님은 비록 십자가상에서 처절한 고통의 시간을 보낸 다음이기는 하지만 “다 이루었다”고 승리를 선언하신다. ‘테텔레스타이’(Τετέλεσται), 현재완료 수동태,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 상거래나 법률적 마침, 약속의 완성을 말할 때 쓰는 단어다. 맡은 사명을 다 강당하셨기에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씀이다. 그러니 이 말씀은 승리의 함성이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비참한 죽음이지만 “다 이루었다”, 이 승리의 함성으로 말미암아 십자가는 영광이 되었다. 똑같이 십자가에서 죽지만 강도의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이 어떻게 같을 수 있나?

‘이루었다(teleo)’는 단어는 ① 마치다/끝내다 ⓶ 지불하다 ⓷ 이행하다 ⓸ 성취하다는 뜻, 여기서는 ‘지불하다’ ‘성취하다’라는 의미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나의 죄값을 지불하셨다. 엄청난 선물이다. 나의 부채 대장에 “완불, 지불 완료” 서명을 하신 거다. 그 부채가 얼마인지는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를 보면 알 수 있다.

빚은 “1만 달란트”(마 19:24), 1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고 1달란트가 6000데니리온이니 신약 시대의 1달란트는 노동자 한 사람의 20년 임금에 해당하는 돈이다. 그렇다면 1만 달란트는 계산할 수 없는 천문학적 규모의 부채이다. 임의로 한 계산이 아니고, 미국에서 발행된 잉글리스 스탠더드 버전(ESV) 주석성경에서 계산하는 내용에 따른 것이다.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감이 좀 잡히시나? 내가 저지른 죄는 아무리 많은 돈을 지불해도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죄의 삯은 사망, 영원히 지옥 불에서 이를 갈며 신음하는 영벌에 처해질 운명이 나의 운명이었다. 그 어마어마한 죄값을 주님이 당신의 피값으로 완불하신 것이다. 엄청난 은혜이다.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는 감격, 다 이루었다는 만족, 다 이루었다는 영광을 누리며 “다 이루었다!” 그리고 돌아가셨다. 감동 아닌가?

“다 이루었다”는 이 말이 우리의 마지막 말이 되어야 한다. 돈을 많이 벌었기에 하는 말이라면 할 수 없을 것이고, 무슨 기념비를 세웠기에 하는 말이라면 역시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굉장한 업적을 얘기한 것이 아니다. 신실하게 주신 사명 감당하며 후회없이 살다가 “다 이루었다” 외치고 죽음을 맞자는 말이다.

30절 끝부분은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인데 직역하면 ‘영을 맡기셨다’, 또는 ‘영을 넘기셨다’는 말이다. 영을 맡기셨다는 것은 하나님께 주님의 영혼을 의탁하셨다는 뜻, 우리도 그래야 한다. 고난의 주간이 머지않았다. 십자가에 집중하자. 십자가는 복음이고, 제자도의 핵심이며 하나님 사랑의 클라이맥스이다. 십자가가 아니면 하나님 사랑을 나타낼 방도가 없음을 기억하고, 십자가가 영광이라 외치며, 거룩하고 십자가를 통해 큰 은혜 누리며 살아야 한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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